내용으로나 이글의 시점으로보나 이것이 정신바른 한국인의 글이 아님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애국자라는 주장의논거가 총명함과 한때 독립협회 가담자라는 것이 옹색한 변명으로밖에 해석이안되고,봉건질서속에서 입헌군주제가 좌절당하자 고독한 결단을 내렸다는 식의 논리에선 이완섭의 비정상적 사고가 극에 이르렀음을 깨닫게해줍니다
민주화된 현재의시각에서 보면 어느나라의 과거사도 반동이며 비민주입니다 민주화를 향한 역사발전은 필연이었으며 어리석은 친일파 이완섭의 논리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고대그리이스의정치도 민주주의의 초석이아닌 옛날지식인에 의한 중우정치가 됩니다.
설령100중에 99를 양보해 그논리를 받아들인다해도 일제 침탈전엔 아무렇지않게 신하짓을 하다가 일제가 침략하자 입헌군주제에 눈을 뜬 이완용은 옹호의가치가 전혀없는 기회주의잡니다.
구국의 결단을 위해 친일을 택한 이완용이라면 그가 일제하 끌어모은 재산문제가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왜 더러운이야기로 남아있는지 이완섭에게 묻고싶습니다.그는 개인의영달을위한 선택으로 친일을 택한것 뿐입니다.
누구나 그상황엔 그럴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는 친일분자의 낡아빠진 수작으로 일신의영화를 버리고 만주들판을 헤메며 풍찬노숙을 일삼았던 우리의 선조와 그후손에게는 100번 맞아죽을 망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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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호> 이완용 - 고독했던 애국의 길 2001년 07월 19일
조선말 정치가인 이완용은 1882년 과거 시험에 응시 병과로 합격하여 검교, 수찬,
해방영군사마 등 주로 군 관련 하급관리로 정치역정을 시작한 사람이다. 과거에
합격하기 한 해 전인 1881년에 당시 유일무이한 서양식 교육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는 등 서양학문을 학습한 몇 안 되는 관리였던
탓에 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지내면서 나중에 순종이 되는 세자의 측근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완용은 벼슬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승승장구, 1887년에는
미국참사관이 되어 미국에 건너가 선진 사회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 외무참의를 역임하였다. 1888년 12월 미국 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1890년 귀국하였다. 1895년에는 오늘날의 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학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친러파로서 외부대신겸 농상공부대신의 역할을 했고
나중에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에는 다시 학부대신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후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성사시킨
공신으로서 12월에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후 일본의 사주를 받고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한 뒤 순종을 즉위시켰는데 이로 인해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태워지고 1909년 12월22일에는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이라는 자객으로부터
저격을 당해 몸이 난자 당했으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911년
조선 귀족원 회원을 역임했고, 1920년 후작에 올라 죽을 때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했다. 글씨를 잘 써 명필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알려진 이완용의 행적을 간단히 요약한 것인데, 그나마 모욕적인
표현들을 많이 줄이고 삭제한 끝에 얻어진 문장이다. 이완용은 한국의 교과서
등에서 일본의 조선 점령에 앞장서 협력한 친일파의 상징으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만고의 역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며느리를 겁탈하여
아들이 죽은 뒤 데리고 살았다느니, 고종을 칼로 위협하여 왕위에서 물러나도록
하였다느니 하는 밑도 끝도 없는 거짓말들이 이름 있는 국사학자들에 의해
언급되는가 하면, 유교에서 가장 큰 모욕으로 여겨지는 부관참시(죽은 사람의
묘를 파헤쳐 다시 죽이는 일)가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 한국 역사에서
이완용처럼 억울하고 부당하게 평가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완용은 우리
역사에서 다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깊이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기 때문이다.
185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이완용은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은 아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씨를 잘 써 훗날에는 당대 제일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는데, 지금 남아 있는 독립문의 현판도 이완용의 쓴 것이다.
24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개화기에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려면 외국어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육영 공원에 들어가
1886년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이듬해 주미 전권 공사 박정양을 따라 미국에
갔으나 1년 만에 병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미국에 건너가 대리 공사로 승진하는
등, 당시 몇 안 되는 미국통이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오랜 미국 망명세월을
마감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과 힘을 합쳐 독립협회를 결성, 자주독립 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이완용이 얼마나 신념이 강하고 용기 있는
애국자였는가는 서재필이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 논설에서 '대한의 몇째
안가는 재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학문 있는 정치가가 몇이 없으나 그 중에 마음이 발라 나라를 자기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혹시 있는 것을 알리라. 몇 달 전에 리완용 씨가
외부대신으로 있을 때에 어떤 외국 사신 하나가 대한 정부에 대하여 무슨
권리를 자기 나라 사람에게 주라고 하여 그때 내각에 있던 대신 중에도 그
권리를 대한 사람에게 주지말고 외국 사람에게 주자는 의론이 매우 있었으나
리완용 씨가 혼자 대한 인민을 위하여 못 주겠다고 정정당당히 정부에서 말한
까닭에 그 외국 공사가 리완용 씨를 좋아 아니하여 매우 불편한 일이 많이
있었으나 리완용 씨가 죽는 것을 무서워 아니하고 자기 생각에 나라를 위하여
옳은 일을 기어이 할 양으로 그 외국 공사의 책망과 한 정부안에 있는 대신들의
성냄을 받아가면서도 자기 힘껏 그 일을 방어할 양으로 하다가 필경 일은 자기
경영과 같이 아니 되었으나 대체 리씨가 자기 나라 임금과 인민을 대하여 자기
직분을 하였는지라‥‥‥ 그 까닭에 우리가 리씨를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으로 알고 또 갈린 탁지 대신 박정양 씨도 리완용 씨와 같이 칠만한
재상이라‥‥‥
1897년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천도'를 했던 머저리 고종이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국내외 정세가 혼미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이권을 쟁취하려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 내각의 장관이었던 이완용은 목숨을 걸고
외세와 매국노들에게 대항하여 조선의 이익을 수호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에서 급진 개화파의 선두였던 서재필이 1895년 12월에
귀국해서 민초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순한글 신문이다. 오늘날에도 한국에서는 독립신문 창간 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을 정도로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와
더불어 구한말 대한 자주독립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언론인 것이다.
지금 외부대신 리완용 씨가 일년 동안에 한 고생을 외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으나 이 때에 외부대신 지위가 그렇게 샘낼 자리가 아닌 것이 리완용씨는
다만 조선 사람들만 가지고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과 상관이 많이
있는 까닭에 조선 같은 나라에서 외국과 탈 없고 모양 상하지 않도록 교제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리씨가 일년 동안에 한 일을 보게되면 자기 힘껏
자기 재주껏 평화토록 조선에 큰 해 없도록 일을 조치하여 갔으니 만일 리씨가
갈리게 되면 리씨보다 나은 이가 또 있을는지 모르겠더라. (독립신문 1897년 1월
23일자)
이 시기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 지내던 시절 독립협회는
고종환궁운동을 한창 펼치고 있었으나 러시아에 빌붙어 있는 정부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파 정치가들은 수세에 몰려 있었고 곧 개각이 이루어져 친러파로
교체될 것이라는 설이 무성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결국 친러파에 의해 실각한
이완용이 장관직을 잃고 평안남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신문은 이완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학부대신 리완용 씨는 평일에 애국 애민하는 마음만 가지고 나라를 아무쪼륵
붙잡고 백성을 구완하며 나라 권리를 외국에 뺏기지 않도록 하려고 애를 쓰다가
미워하는 사람을 많이 장만하여 필경 주야로 사랑하던 자기 대군주 폐하를 떠나
평안남도로 관찰사가 되어 가게 되었다. 관찰사의 직무도 또한 대단히 중한
직무요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여 일하는 데서도 정부에 있는 사람만은 못하나
또한 중임은 중임이라. 이 대신이 정부에서 나가는 것에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대군주 폐하께 충성 있는 사람들은 다 섭섭히 여기더라. (독립신문 1897년
9월1일자)
삼월 이십 사일 독립협회 회중에서 임시회를 열고 회원 리건 호 홍긍섭 최경식
삼씨를 총대 위원으로 특별히 정하여 전라북도 관찰사 리완용 씨를 전별하면서
회중에서 리완용 씨에게 편지하기를 각하가 본래 맑은 덕과 중한 물망으로 좋은
벼슬도 많이 하고 일찍 대신도 하였고 또 본회 부회장의 직임을 겸하여 열심히
일한지가 이미 삼년을 지났고 또 여러 사람이 한가지 소리로 천거하여 회장이
되어서........ 하늘을 가리켜 함께 맹세하고 기어이 황상 폐하를 보호하여 우리
나라 자주독립의 권리를 튼튼케 하였다. 칙명을 받아 오늘 길을 떠나는지라 본
회원들이 수레를 붙들어 창연하고 결연함은 어찌 그 다하리요. 엎드려 원컨대
각하는 더욱 가다듬어 진무하고 순찰하여 천하의 뜻을 맑게 하기를 구구히
바라노라고 하였다 (1898년 3월 29일 독립신문).
이 글을 보면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서 고매한 인격과 덕을 지녀
회원들의 정신적인 구심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완용은 학부대신으로
일하던 시절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의무교육을 실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은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올리려고 하였다. 우선 용어를 공식적인 칭호에서 전하를 폐하로 높여
불렀으며, 명령을 칙, 국왕 자신의 호칭을 짐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단되었으나, 1894년 갑오개혁 때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1896년 1월부터 연호를 건양으로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198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다시
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로 고쳤으며,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올림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제국을 성립한 뒤 독립협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떠 입헌군주제로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수구파는
전제군주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1898년 부산 영도를
러시아에 임대하는 문제로 격돌하였다. 조차는 외국의 침략하는 첫 단계라고
생각하던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10일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만여 명이 참가한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열어 영도 조차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영도 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 균형이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이 자주독립국이 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역사상 최초의 정치 시위였던 만민공동회의 성공 이후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입법기관인 중추원신관제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수구파들의 모략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한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놀란
고종은 경무청과 친위대를 동원하여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킨 다음 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하였다. 여기에 자주
독립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 일본은 수구파에 가담, 고종에게
독립협회의 운동을 탄압하도록 권고했다. 이를 받아들인 고종은 곧바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함으로써 자주독립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완용은 서재필과 함께 이 같은 구한말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자주독립 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였으며 실제로 내각의 중심에서
실천에 옮긴 애국자였다. 과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게 있다면 그것이
왕권 유지에 눈이 멀어 개혁을 탄압했던 부패한 고종이었을까, 아니면
독립협회를 이끌어 목숨을 걸고 자주독립의 길을 갔던 이완용일까?
흔히들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는 말들을 하지만, 사실 역사도 끝난 바둑처럼
복기를 하면서 검토해볼 수 있는 대상이다. 만약 구한말 독립협회가 추진했던
입헌군주제가 성공했다면 그 뒤 대한제국은 어떤 길을 걷게 되었을까. 아마도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세력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세계적으로 러시아-프랑스-독일의 동맹과
일본-영국-미국의 동맹이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러일 전쟁에서도 영국과 미국은 전쟁비용의 대부분을 제공하면서 일본을
지원하였고 일본은 그 때문에 군사강국 러시아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후유증으로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짜르는 축출 당하고
제헌의회가 소집되기에 이른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대국들의 묵인아래 합병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혁명의 와중에서 러시아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져버렸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청나라도 1900년 의화단의 반란을 계기로 대륙 전체가
혁명기에 돌입하게 되고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라는 국가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이 같은 국제 정세 아래에서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막을만한 세력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입헌군주제 운동이 실패 한 뒤 만고의 애국자 이완용은 고독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을 새로운 지배자로 선택하는 일에
협력하게 된다면 아직도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왕에게 충성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것만이 선이라고 믿는 무지몽매한 군중들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완용의 시대에는 일본과 스스로
병합하는 것만이 유일한 애국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완용. 그는 진정한
애국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