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 입문 전 안토니오 데 올리비에라 살라자르는 1889년에 태어났다. 살라자르는 성직자 교육을 받았지만 후에 쿠임브라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1926년 반공을 기치로 하는 코스타 장군의 군사 쿠데타가 성공하자 1928년 교수를 그만두고 경제장관이 된다.
정계 입문 후-경제장관 활동과 독재체제 확립 경제장관 시절, 그는 아주 간단한 정책으로 경제적 성과를 거둔다.(세금 인상, 지출 억제, 국가 거대 사업 중지)하지만 국민의 불만은 많았다. 1932년, 수상의 자리에 오른 후 국민연합당을 창설하고 조국 발전을 명분으로 하여 자신과 국민연합당의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한 권위주의적 헌법 개정을 추진해 성공한다. 살라자르는 이웃나라 에스파냐의 독재자 프랑코와 마찬가지로 비밀 경찰, 군대를 이용해 국민들을 억눌러 공포의 대상이었다.
살라자르의 정책과 경제 쇠퇴 살라자르 최대의 공적 한 가지는 세계대전의 전화를 피한 것인데, 에스파냐 내전에는 프랑코, 무솔리니 등 파시즘 세력과, 2차대전때에는 연합군과 손을 잡으며 교묘한 중립 외교를 이끌어내 전쟁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실시한 우민화정책(3F 정책, 풋볼(축구), 파두-포르투갈의 전통 음악, 파티마- 종교 성지 이 세가지에 몰두하게 해 국민의 지력을 떨어뜨리는 정책. 덕분에 당시 포르투갈 문맹률은 40%에 육박했다.)과 농업 위주 경제 정책으로 산업 발전 저해와 경제 몰락을 불러왔으며,국가 경제를 식민지 수입에 의존하여 포르투갈은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였다. 경제 쇠퇴로 인해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해외로 이주했는데, 이들이 부치는 돈이 외화 획득의 주 수입원일 정도였다.
살라자르의 정계 은퇴와 독재의 종언 1960년대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독립하기 시작했고, 그를 막아보겠다고 일으킨 전쟁에 사용하는 막대한 돈도 포르투갈 경제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경제 쇠퇴와 그에게 닥친 혈전증으로 초라하게 물러날 수밖에 없없다.살라자르는 1970년에 사망한다. 하지만 그가 물러나고 나서도, 죽고 나서도 독재는 계속되었는데, 1974년 민주화를 목표로 한 무혈 쿠데타가 드디어 살라자르의 정권을 쓰러뜨렸다.
살라자르는 아직도 유럽의 악명높은 독재자로 유명하며, 포르투갈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롤링은 살라자르의 이름을 자신 소설의 악한 마법사(살라자르 슬리데린)이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