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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宗廟)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궁궐의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세웠다.
현재의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 종묘는 정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완공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광해군 즉위년(1608)에 재건되었으며
그후 몇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뜰앞의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사적 125호인 종묘는 뛰어난 건축적 가치와 600년이 넘도록 이어져 온 제례행사등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001년에는 종묘제례 및 제례약이 국내최초로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 종묘 배치도
15 창경궁 가는 길 (연결 門) 14 영녕전 악공청 13 정전 악공청 12 영녕전 11 제정 10 전사청 9 정전수복방, 찬막단 8 정전 7 칠사당 6 공신당 5 어숙실 (재궁) 4 향대청 3 공민왕 신당 2 망묘루 1 외대문 (정문)
■ 종묘 둘러보기
ㅇ 정문 (外大門)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
그런데 이 어정(御井)은 최근에 종묘공원 지하주차장을 만들면서 水原이 고갈되어 물이 없는 우물이 되었다.
종묘의 정문은 남쪽에 사묘(祠廟)의 표문(表門)답게 정면 세 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문 안 서쪽으로는 본래 종묘를 지키는 수복방이 있었다.
정문은 원래 전면 중앙에 난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도로 면이 높아지게 되어 땅에 묻히고 지금은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다.
<종묘 정문.... 종로 거리에서 종묘공원을 지나 약간 안쪽에 있다... 입장료 1,000원>
ㅇ 삼도(三道)
정문을 들어서면 종묘의 본전이라 할 수 있는 정전까지 보도블럭 깔듯이 돌판이 깔려있는데 이를 삼도(三道)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가운데는 조금 높고 좌우는 조금 낮게 깔려있는데 일반적인 궁궐의 경우 가운데는 임금이 걷는 어도(御道)라고 하는데 이처럼 神殿이나 陵 같은곳에서는 신이 걷는 神道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돌판을 따라 가면 메인으로 도착하는 곳이 정전이고, 다시 왼쪽으로는 영녕전으로 이어지며 정전에 가기전에 재궁이라 하는 어숙실, 즉 제례시 임금이 대기하는 곳을 거쳐 가게끔 이어져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어숙실 - 정전 - 영녕전까지 이어지는 보도블럭... 삼도(三道)가 놓여져 있다>
ㅇ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
종묘의 정문을 들어서서 삼도를 따라 어숙실 - 정전 - 영녕전으로 이어지는게 순서이나
정문 안쪽 오른쪽으로 관심을 끄는 건물이 3채가 있으니 망묘루와 공민왕 신당, 향대청이다.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추모하고, 나라와 백성을 돌보고자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가운데 한 칸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공민왕 신당은 망묘루 동쪽에 별당으로 고려 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한다.
신당 내부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한자리에 있는 영정(影幀)과 준마도(駿馬圖)가 봉안되어 있다.
신당의 정식 명칭은 '고려 공민왕 영정 봉안지당(高麗 恭愍王 影幀 奉安之堂)'이다.
태조가 공민왕의 업적을 기려 세웠다고 하는데 이곳에 공민왕 사당이 있다는게 의아하기만 하다.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 폐(香祝幣)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는 내부에 1, 2교육관을 만들어 종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영상이나 자원봉사자에 의한 해설을 하고 있으며
에어컨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무더운 여름철에는 종묘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다.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 일곽의 앞쪽에는 지당(池塘)이 있는데 세종 25년에 지어진 것이며,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것은
땅은 네모나고 하늘은 둥글다는 天圓地方 사상에 의한것이며 대부분의 궁궐 연못은 가운데 섬에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곳은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것이 특이하다.
<망묘루>
<공민왕 신당>
<향대청....제사 진설....>
<연못>
ㅇ 어숙실(御肅室) : 재궁(齋宮)
정전 동남쪽에 있는,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준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북쪽에 어재실, 동쪽에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다.
이곳에서 목욕하고 대기하다가 바닥이 깔린 어로(御路)를 따라 정전의 동문으로 입장해서 제례를 올리게 된다.
ㅇ 정전(국보 제 227호)과 부속건물들
정전은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에 태조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 19위, 왕비의 신주 30위등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건물구조는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가 109m, 남북이 69m나 되는 묘정 월대(돌을 쌓아 만든 단)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로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문으로부터 이어져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신실의 양 옆으로는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 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은 우리나라에서 단일 목조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 (총 101m)이며 이는 신실을 늘릴때마다 계속 이어 붙인 증축의 결과이다.
정전에는 남문과 서문, 동문이 있는데 남문은 정문처럼 보이지만 혼백이 출입하는 곳이므로 사람은 다닐 수 없으며
왕과 제관들은 동문으로, 악공들은 서문으로 드나 들었다.
<정전 남문...>
<정전 전경.... 돌로 쌓아 올린 넓은 월대가 앞마당처럼 보인다...>
<정전, 즉 종묘는 궁궐에 비하여는 검소하게 지어진듯... 돌계단 하나의 장식도 간단하다>
- 공신당 : 조선 왕조 역대 功臣들의 위패 83위를 모신 곳이다.
정전 남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으며 창건 때는 3칸에 불과하였으나 나중에 9칸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로 되었다.
- 칠사당 : 일곱 小神을 모셨다 하여 칠사당이라고 한다.
정전 남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으며 운명, 집, 음식, 거처, 성문출입, 형벌, 길을 주관하는 일곱 소신의 위패를 모시고
사계절에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 사당이다.
- 제례음식 준비시설 : 전사청, 제정, 정전수복방, 찬막단
제례음식은 정전의 오른쪽, 동문밖에 있는 전사청에서 제수 음식을 마련한다.
만들어진 음식은 진설하기 전에 '찬막단'에서 검사를 하며 음식조리에 쓰이던 우물이 전사청 동쪽에 있는 '제정(祭井)'이다.
수복방이란 정전의 수복들이 머무는 방이다.
(수복 : 조선 시대에, 묘(廟), 사(社), 능(陵), 원(園), 서원(書院) 따위의 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구실아치. ≒수복이. )
<전사청>
<제정(祭井)>
<앞에 보이는 돌로 쌓은 단이 찬막단, 뒷편이 정전수복방이다.>
- 악공청 : 종묘제례때 아악사들이 대기하거나 연습하던 곳,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이다.
현재는 관람객들이 쉬어가는곳이면서 종묘에 대한 교육 영상물등을 보여주는 곳이다.
악공청 앞에 서 있는 공중전화 부스가 참 멋스럽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종묘나 궁궐 같은곳에는 그에 맞는 모습(작은 초가집등)을 창안해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ㅇ 영녕전(보물 제 821호)
영녕전은 정전에서 옮겨진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별묘(別廟)이다.
정전과 좌우 익실 앞으로 동·서월랑이 뻗어 나와 ㄷ자 형태를 이루고 그 사이를 박석을 덮은 상·하월대가 울타리를 가득 메우는 점도 동일하며, 부재의 처리나 건물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종묘 정전보다는 작지만 건축 공간 자체의 장엄한 공간 구성은 여기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친근감 있는 장인들의 솜씨는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세조 3년(1421)에 건립되어 16실에 왕의 신주 16위, 왕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영녕전 남문.... 정전 남문과 같다>
<영녕전 전경....>
여기까지 둘러보았다면
종묘안의 대부분을 꼼꼼하게 다 본 셈이다.
영녕전을 지나 길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창경궁과 이어지는데
원래는 하나였던 지형을 원남동 도로를 내는 바람에 둘로 갈라진채 종묘에서 창경궁은 육교로 건너가야 한다.
나중에라도 지하차도화 하여 묻어버린채 지상의 궁궐은 원래대로 하나로 합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종묘 입장권으로 창경궁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물론 창경궁에서 종묘로도 가능하다)
<영녕전 지나 창경궁 가는 길....>
<창경궁을 가려면 육교를 건너야한다. 육교아래 원남동 도로....>
<종묘 역사 및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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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최근들어 종묘앞 도로까지의 녹지대, 즉 종묘공원은 노인들의 휴식장소로 사랑받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먹고 마시는 장사들과 이동식 노래방의 등장에 이어서 '박카스아줌마'라 불리우는 노인상대 매춘까지...
노인들의 해방구로 변모하고 말았으니 표면적으로는 최근 관계기관의 집중단속으로 많이 절제되고 있는듯 하였으나
그 내부적인 문제점과 폐단은 겉으로만 보아서는 도저히 알수가 없었다.
뿐만아니라 각종 도심집회의 단골 장소로 종묘공원을 이용하는 바람에 조용하고 경건하게 유지해야 할 종묘 사적지는 아랑곳없이
저마다의 주장을 담은 확성기 소리와 프랑카드, 유인물....등이 난무하는 정치적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이 되어버렸다.
'세계문화유산'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눈에 띄기도 한다.김신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