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볼수록 새삼 고마울 건 세계 어디를 가도 아라비아숫자를 공통으로 사용한 다는 점이다.
언어처럼 숫자도 국가마다 다르다면 수치 정보를 얻기 위해 큰 번거로움을 겪어야 할 것이다.
아라비아숫자가 전파되기 전까지 유럽에서는 로마숫자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숫자가 얼마나
편리한지 편리한지는 384를 로마숫자 CCCLXXXIV로 나타내 보면 알 수 있다.
로마숫자는 특히 계산이 복잡해 당시 유럽에서는 수판을 이용해 계산을 대행하는 전문가들이 활동했다.
그런데 아라비아숫자가 보급돼 누구나 쉽게 계산을 하게 되자 지배층은 아라비아숫자가 1을 7로 변조하거나
0을 붙여 수를 부풀리는 위조가 쉽다는 점을 들어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라비아숫자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상인 계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결국 전 세계를 평정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제반 사회 제도뿐 아니라 시계와 달력에서도 변혁을 시조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는 십진법인데 시계는 24와 60을 단위로 하므로 하루를 10시간, 1시간을 100분,
1분을 100초로 하는 십진 시게를 만들어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제정한 달력도 새로 정비했다.
그레고리력에서는 월에 따라 날수가 들쑥날쑥하지만 새 달력에서는 한 달이 10일씩 3주, 30일로 일정하며
1년은 열두 달과 5일의 휴일로 구성된다.
나름 체계가 있는 시계와 달력이었지만 현실에 착근되지 못한 채 몇 년 후 패기됐다.
아라비아숫자의 간편함은 로마숫자의 권위를 누르고 세계 공용 숫자로 등극했지만,
프랑스 혁명 시계와 달력은 실패한 것이다.
최근 대학에 심각한 두통을 안겨준 게 내년부터 시행 예정이던 시간강사법이다.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치지 않았다는 면에서 프랑스 ㅅ계.달력과 닮은 꼴이다.
논란이 많아 시행을 2년 아예하는 안이 발의돼 지난 19일 국회 법사위를 통과했고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다.
시간강사법의 취지에는 십분 공감한다.
강사는 대학 교육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저렴하게 학사 운영을 하려는 대학의 이기심으로 강사료는 교통비를 갈음할 정도로 적고
학기 시작 직전에야 강의 담당 여부를 알 수 있다.
이런 고층을 감안할 때, 강사료를 대폭 올리는 한편 강사에게 공식적인 교원 지위를 부여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해고하지 못하게 하는 시간강사법은 강사들에게 일종의 복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반값 등록금과 구조조정의 압박을 받는 대학이 높은 처우와 고용 안전성을 보장하는
강사를 채용할 리 만무하다.
강의를 대형 화해 기존 교수가 맡게하고 초빙.대우.겸임교수 등의 이름으로 비정년 교원을 채용하는
편법이 동원되다 보니 강사의 몫은 도리어 줄어들게 됐다.
강사를 보호하려는 시간강사법이 그들을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시간강사법은 비정규직인 강사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현실에 대한 정교한 진단이 부족한 채 거칠게 만들었기에 표류할 수밖에 없다.
관련자들이 입안할 땐 제발 법안이 현실과 만나 일으킬 파장을 시뮬ㄹ레이션 해보기 바란다.
아라비아숫자가 무리없이 정착한 건 그 장점이 로마숫자의 관습을 뛰어넘을 만큼 컸고,
권력자가 선포한 게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아래로부터 확신됐기 때문이라는 점도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
박경미 홍익대 수학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