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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코리아 특집기사 1997년 8 월호, 김남수 편집주간 (미술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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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로서 유화 속에 동양정신의 수묵법을 도입하여 다양한 기법을 구사했던 원로화가 한봉덕 화백이 일환으로 오는 10월 예술의 전당에서 작품전을 가질 계획으로 준비를 해 왔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 했으며, 본지는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서둘러 '誌上遺作展' 을 갖고자 본란을 마련했다.
1950년대 후반 한국미술은 중요한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이른바 앵포르멜운동 등 추상미술의 태동이 그것이였다. 작가 한봉덕은 현대미술운동가의 기수로서 당시 아카데믹한 사실주의만을 추구했던 화단의 풍토에 반기를 들었으며, 고루한 전통과 기존질서에 저항하는 새로운 이념을 추구하는 데 앞장섰다. 다시 말해 일본치하의 획일적인 모방주의나 서구주의 편향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로서 탈전통, 탈장르의 새로운 미술운동이었다. 중국의 신경미술학교를 수학한 그는 당시 일본인 교수 우메하라 류사브로(梅原龍三郞)의 영향을 받아 초기 인사파 학풍에 매료되기도 했으며, 앙드레 드랑의 화풍이나 인상파의 대가 오지호, 이중섭, 윤중식 등의 선배작가들을 좋아했다. 1951년 그의 나이 불과 27살 되던 해에 동양백화점에서 가진 첫 전시회는 장안에 큰 화제를뿌리기도 했다. 풍경과 인물화, 정물화 등 습작기의 평범한 작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그의 재능이 인정되어 한국은행이나 스웨덴인이 그의 작품을 매입했던 일은 훗날 작가가 스웨덴에 진출하게 되는 인연이 된것이다.
그러나 그의 나이 34세가 되던 중견작가 시절에는, 유재를 사용한 캔버스 위에 모필(毛筆)을 화구로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 속에 존재해온 동양의 벽화와 같은 유현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고구려벽화를 보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정신세계로 이끌어 간다. 거기에 나타난 주제는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그 존재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넘어서서 영원과 한봉덕예술의 조형의 폭과 넓이와 깊이와 그 진수를 이해하는 정곡이 이 짧은 몇 마디의 글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싶다. 그가 스웨덴에서 정착을 한 것은 닥터 몰텐 손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당초 프랑스에 유학을 할 계획이였는데동화백화점 개인전에서 닥터몰텐이 그의 작품 3점을 매입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당시 스웨덴 게텐버그 국립미술관에근무하고 있었던 닥터 몰텐의 조카의 주선으로 스웨덴 진출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는 스웨덴에서의 첫 작품전을이 국립미술관의 부설미술관에서 가졌다. 작품<벽과의 대화> 라는 이미지 추상을 연작으로 발표하여, 무려 28점의 작품이팔려 나갔다. 물론 이떄의 추상화면도 고구려벽화의 이미지가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스웨덴 진출 불과 1년만인 72년, 미처 끝내지 못했던 보문사 석굴암 조성의 마지막 완성을 위해 일시 귀국했으며, 73년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 스톡홀름 트리에스모 룸 화랑에서 작품전을 가져 국제 미술시장에서 갈채를 받는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그후 그는 작크레어 콕스화랑, 막스갤러리 등 유럽에서 연쇄적인 초대개인전을 가졌고, 파리나 미국 등지에 진출하여 지난 93년에 귀국하기까지 무려 400여점의 작품이 말려나가 애장가들의 인기를 누려왔다. 과연 작가 한봉덕이 국내에서는 아직도 생소하리만큼 크게 유명세를 얻지못하고 있는데 반해 외국에서는 그토록 인정받고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 도 없이 의식이 있고 선견지명을 가진 작가였다는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남들이 서구화의 물결에 휩쓸려 부화뇌동하고 있을 때 그는 한국성을 고집하면서 회화의 양식기법에서 많은 실험과 연구를 거듭해 온 것이다. 50년대초 조선일보 문화부에 재직하면서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현대미술초대전'을 기획하여 창립전을 가진 당시만 해도 이응로, 유영국, 이봉상, 한봉덕 등 당시의 국내의 역량있는 현대미술 작가들과활발한 작품활동을 했으며, 이승만, 박고석, 한봉덕 등으로 이루어진 동인 그룹활동도 전개했었다. 그러나 고루한 한국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는 이단자로 몰리기도 했으며, 그가 유럽진출의 결심을 굳히게 된 것도 이러한 전후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는 분명히 혜안을 가진 화가요, 예술가였음을 지금에 와서 확인이 되고 있다. 지금 세계의 미술시장은 비록 유재를자료로 한 서양 화일지라도 그들의 아류나 모방을 일삼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속임수나 치한처럼 취급을 하고 있으며, 먹색을 도입하는등 한국성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우대를 받고 있는 것은 그만큼 동서의 교통이 지척간에 와 있음을 말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한때 문화부기자로서 일제잔재의 이유를 들어 국전반대론의 기사를 써서 필화사건을 일으키고 고발까지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던 그가 동료작가들에 의하여 이단으로 소외당했던 것도, 그가 성장을 한 과정이나 의식속에서 한국성 미술이 아니면 승산이 없음을 초기부터 감지했던 선각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가지 패턴이나 형식, 규제등에 얽히는 것을 한사코 싫어했던 화가였다. 그의 예술의 정신주의나 주제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미학적 사상을 보면 민족의 뿌리에 바탕한 한국의 전통회화나 서예와 불화 등이 현대적 감각의 시방식으로 수용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가 있다.
80년대초 문화화랑 초대전에서 보여준 슈르 레알리즘 계통의 낭만적인 화풍들은 인간애, 남녀의 애정, 샤갈풍의 환타지보다 한국적인 학(鶴)을 많이 그리고 있는 것이 돋보였다. 붓끛으로 파내듯 극세필 묘사의 환상적인 화면은 작가의 조형과 폭과 깊이, 저력을 읽기에 충분한 것이다. 새와 동물, 인간, 문자의 이미지 등 자연의 소재들을 반추상기법으로 묘사해내는 속도감있는 운필의 세, 붓 대신에 튜브로 그어대는 선의 운동감, 그리고 빨강, 파랑, 보라 등 한국의 사계에서 만나는 강렬한 색조의 표현 등은 고국에서의 애정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국에서의 생활환경의 변화때문에 고국에서의 동경과 향토애를 더욱 애틋하게 느꼈던 그는 장생도 등도 즐겨 그렸다. 80년대 중반 밝고 화사하고 희망찬 인간과 자연 등이 생동하는 주제로 등장했던 것도 당시 작가의 심리적 변화가 가져다 준 하나의 마스코트 같은 것이었다. 이떄의 작품의 명제들은 <자연의 합창>,<애정>,<행복> 등으로서 심오한 인생을 몸소 체험한 현상세계가 하나의 메타포로 승화되는 그런 작업들이었다. 뉴욕의 밀폐된 공간의 그림방에서 석달씩이나 그림을 그리다가 즉흥적인 충동이 일면 뛰쳐나와 한번 스케치를 시작하면 수백장이 완성되어야 끝을 내는 보헤미안적 기질의 작가였다. 89년 귀국 후 제주도의 풍물을 스케치 하기 위해 90년 제주에 작업실을 마련했고, 스케치북 10권을 그려댔지만 끝내 그가 선택한 소제는 한라산이었다. 동틀 무렵 해돋이 부터 분홍빛 노을이 붉게 물든 수평선의 낙조까지를 세심하게 관찰했지만 역시늠름한 자태로 우뚝 솟은 한라의 명산에는 비교할 바 되지못한다 해서 그는 현장에 작업실 가건물을 짓고 예리한 관찰을 하면서 <한라의 사계>를 완성해내었다. 무려 2천호 크기의 초대작 1점을 완성하는 데 무려 7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정열과 기백이 넘친 작품이었다.
몇년전 필자는 이젠 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 100여점을 한꺼번에 감상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양식별로 보면 산과 강을 반구상성으로 이미지화 한 작품들, 베아트리체를 연상케 하는 구원의 여신상, 신이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누드, 오버랩 기법의 여인과 고목의 병렬식 작품, 송학도, 발레는 하는 무희, 학과 문자예술 등 이루열거키 어려울 만큼의 다양한 소재가 등장하고 있었다. 학과 친숙해진 이유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어린 시절 늑막염을 앓아 요양차 금강산 표훈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나깨나 보았던 것이 군학(群鶴)이었다고 대답해준다. 특히 사체에서 보는 무(拇), 불심(佛心), 산(山), 인(人), 월(月), 천(川), 덕(德) 등 문자를 형상화 한 자화미술(字化美術)라든지 자화상, 비둘기, 오리, 공작, 게, 붕어, 투계 등의 다양한 소재들은 그 모두가 한국적인 표상을 담은 이미지화들이었다.
한국의 老대가 한봉덕 화백은 가시적인 사바세계를 떠났지만 그의 영혼과 예술세계는 항상 우리들 후손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는 서양화가로서 한국의 혼을 그리다가 이승을 떠나갔다. 그가 그랬듯이 우리 후예들 역시 한국의 혼을 그리며 살아갈 것이요, 또한 그의 뒤를 따라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다. |
http://blog.chosun.com/blog.screen?blogId=10319 에서 펌
첫댓글 이분의 그림을 예전에 본 적이 있는데 이 중에는 새로운 그림도 있군요.
새우그림에서는 섬세함, 다른 그림에서는 억센 힘이 느껴집니다.
동양적인 화폭이.. 글구, 글씨가 가미된 다소 불교적인.. 신앙이 깔린..<한문, 인도글..석가..>선이 무쟈게 짙숩니다요~.. 즐감허구 ..공부도 허궁.. 고맙습니다요~ ^^
캔버스가 꿈틀거리는 군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힘이 넘쳐나는 그림이군요. 새우의 뛰는 모습이 너무나 생동감 넘치고.....감사히 보고 갑니다.
반가운 작품들입니다.... 60년대 초반 중학시절에 혜화동 선생님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었지요....감회가 새롭습니다.....'양송'님 감사합니다.... ^^*
강석님 반갑습니다. 새로가입하신 분이시군요. 앞으로 자주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