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전백 梁甸伯, {1870.3.10 ~ 1933.1.17)】 3.1독립운동의 33인 민족 대표
"강직한 의(義)의 인,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 양전백 목사
양전백(梁甸伯, 1870.3.10 ~ 1933.1.17)선생은 양반가문의 후손으로 1870년 3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슬하에서 한문을 수학한 선생은 서당을 차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다가 1892년 김관근(金灌根) 조사(助事: 전도사)를 만나 서울 정동교회에서 기독교와 서구문명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였다.
한국장로교 최초의 7인 목사로 손꼽히는 분이며 3.1독립운동의 33인 민족 대표이신 고(故) 양전백(梁甸伯) 목사. 1869년에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태어난 그는 타고난 학자의 기질과 재능으로 한학을 수학한 후 곧바로 마을 서당의 훈장이 되었다.
때마침 만주에서 예수를 믿고 돌아온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등 초대교인들은 의주를 중심으로 철산, 구성, 선천의 각 군인(君人)들에게 만주로부터 들여온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게 되었다. 이때 소년 양전백은 처음으로 기독교 서적을 보게 되었고, 구성 사람 김이련(金利鍊)과 김관근(金灌根) 부자(父子)의 전도로 26세가 되던 해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때마침 청일전쟁으로 학당건물이 파괴되었으므로 양전백은 자기 집을 교회당 겸 학당으로 제공하였는데, 이것이 곧 구성군 신신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1897년에 선천에 와서 살면서 선교를 시작한 윗테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와 함께 선천교회를 창설하여 초대 지사가 되었고 1902년 겨울에는 초대 장로가 되었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에는 졸업과 동시에 선천읍 교회의 목사로서 선천을 비롯해서 구성, 철산 등지에 전도활동을 폈다.
또한 1906년에는 김석창(金錫昌), 노정관(魯晶權) 등과 함께 신성(信聖)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교육에 주력했다.
철저한 민족교육과 기독교 교육으로써 신성학교는 일제의 주목을 받아, 1911년에는 105인 사건으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즉 조선 제 1대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가 1910년 11월 5일에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러 갈 때 신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는 흉계로 일제탄압이 가해지게 되었는데, 양전백 목사는 윤치호,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체포되어 5년형의 언도를 받고 3년 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이 사건은 일제의 날조사건으로서 양전백 목사는 신성학교 학생YMCA 창설자이고 학생Y 하령회의 주임강사였기 때문에 주모자로 돌리게 되었다. 1910년과 1911년 여름, 두 차례에 걸친 학생Y 하령회를 통해 양목사는 당시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부회장이던 윤치호 씨를 비롯해서 이상재, 이승만, 에디(G. S. Eddy), 화이트(G. C. White), 와이어(H. H. Wire), 브록크만(F. M. Brockman), 질레트(P. L. Gillett) 등과 함께 학생Y 회원들을 지도하였는데, 이것이 일제에게는 눈의 가시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제는 1910년부터 국내의 모든 민간단체를 해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YMCA만이 끝까지 살아남아 항일운동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최후의 탄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흔히 105인 사건이라고 하면 사북지방의 기독교 세력과 안창호(安昌浩) 등의 신민회(新民會) 지하조직을 뿌리뽑기 위해 날조된 탄압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YMCA 총무이던 질레트 씨는 이것을 완전히 YMCA 세력을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음모라고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다.
「작년도(1911년)에 있은 두 차례의 학생Y 하령회에서는 대회장이던 존경하는 윤치호 선생으로부터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으나 양전백 목사의 학생대표이던 양준명(梁濬明)씨 등은 총독살해 음모자라는 혐의로 체포당했다.
일본경찰은 이 하령회가 총독살해 음모를 위해 조직되었다고 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한 증인을 내세우기도 했다」고 국제선교협의회(I. M. C.)의 의장이며 에딘바라 계속위원회(Edinburgh Continuation Committee) 위원장이던 모트(J. R. Mott) 박사에게 보고했다.
이처럼 양전백 목사는 목회자뿐 아니라 학생Y 운동의 개척자였으며 항일투사이었기 때문에 3년 간 옥고를 치루게 되었고 출감해서도 계속 학생Y 운동에 지도력을 발휘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33인 민족대표로 헌신하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고, 2년 만에 석방되어 교회목회와 선천YMCA 육성에 힘쓰다가 65세를 일기로 1933년에 선천의 자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양 목사는 이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정신과 이 세상에 나긴 공로는 많은 이의 교훈으로 남아,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복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1894년 세례를 받은 선생은 교회를 건립하여 평안도 일대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1900년 초등교육기관 명신학교(明信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듬해에는 부속 여자소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설립하여 한국의 기독교계와 민족을 이끈 수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병탄한 일제는 민족지도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선생은 일제 관헌에게 처참한 고문을 받았다. 기소된 123명중 105명은 일제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하여 선생을 포함한 99인이 무죄로 풀려났다.
이후 선생은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의 제5대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 세계에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 독립선언식에 민족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민족과 교회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던 선생은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던 중 병을 얻어 1933년 1월 17일에 6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때 일제는 허위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고문을 받았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감자들에게 가해진 고문방법은 무려 70여 가지에 이르렀다. 결국 모진 고문에 못 이겨 몇몇 이들은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양전백 목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양전백 목사는 구속 이후 1년 6개월 만인 1913년 무죄로 석방됐다. 교회로 돌아간 것은 햇수로 3년 만이었다. 이때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고 머리털과 수염까지 뽑힌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는 눈물로 그를 맞이한 교인들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나는 이제 교직(목사직)을 사하여야 되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 중 통초(아픔과 괴로움)를 이기지 못해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해 거짓을 말했으니 목사를 할 자격이 없다는 실로 진솔하고 순수한 고백이었다. 그러자 교인들은 “목사님 같이 양심적인 분은 없다”며 울면서 사임을 만류했다. 양전백 목사가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927년부터 그는 한국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게 됐다. 서울 피어선성경학원(현 평택대학교 전신)에 머물면서 교회사 자료를 수집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병을 얻어 선천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던 중 1933년 1월 17일 64세를 일기로 선천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그가 1회로 졸업한 평양신학교의 기관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은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실었다.
"선생은 웅변의 인(人)도 아니요, 문장의 인도 아니며, 팔면(八面) 활달한 사교의 인도 아니요, 기책(奇策) 종횡(縱橫)한 지략의 사(士)도 아니다. 다만 강직한 의(義)의 인이며, 자애 깊은 정열의 인이다. 비리와 불의 앞에서 추호도 굴치 않는 마음, 빈천과 약자를 보고는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마음,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