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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한 민중신학자의 이야기와 그의 신학
1996년 10월19일
아침, 선생께서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매년 환절기 때만 되면 중환자실에 입원하다 며칠 후 기력을 회복하셨으니 막연히 ‘이번에도 괜찮겠지’ 했다. 일정표가 짜인 대로 일을 마친 뒤 저녁때가 돼서야 병원 중환자실로 향했다.
심각했다. 아니, 의사들과 가족들은 이미 포기한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줄서 있고 한 사람씩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병실로 들어갔다.
저녁 7시경이 되어서야 선생님을 뵈었다. 눈이 풀어져 있다. 입에는 기도삽관홀더가 물려 있었고, 폐로 연결된 튜브를 통해 힘겹게 숨을 쉬고 있다. 선생님의 큰 눈이 깜빡인다. 무슨 말일까. 눈치 없는 제자는 그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선생은 눈빛 교신을 포기했다. 그렇게 몇분이 지난 뒤 나는 다음 사람의 접견을 위해 방을 나와야 했다.
새벽 12시 10분경 삽관기구를 입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난 시각, 선생은 마지막 숨을 들이마셨다고 한다.
교회 설립자 & 설교자
1922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그 이듬해 어머니 선천댁의 등에 업힌 채 간도의 명동촌으로 이주했다. 1941년 도쿄로 유학길에 올랐지만, 1943년 강제징집을 피해 북만주 지역으로 도피했다가, 해방을 맞아 1946년 서울로 귀국했다.
숨어지내던 시절 용정과 연길 사이의 모아 산에서 체류하면서 선생은 모아산교회 개척을 주도했다. 선생이 설립한 첫 번째 교회였다. 그때 20대 초반의 청년 안병무는 벌써 설교가로 이름을 날렸다.
선생은 1947년 서울에서 두 번째 교회 설립을 주도했다. 그 교회는 감리교회였다. 공식적으로는 감리교 목사가 설립자로 되어 있지만, 교회 이름이 일신교회라는 점은 그 교회의 숨은 개척자가 선생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일신’이라는 단어는 당시 선생의 생각의 단면을 보여주는 키워드였기 때문이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선생은 단과대학별로 조직되어 있던 기독학생회들을 통합한 연합기독학생회 결성을 주도했고 초대 회장이 되었는데, 그때 만난 12명의 동료들과 동인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의 이름이 ‘일신회’였다. 여기에는 한 하나님(一神), 한 믿음(一信), 한 몸(一身)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해방 정국, 이념으로, 종교로, 지역주의로 분열되어 서로 극한적으로 반목하던 시기에 선생이 꿈꾸었던 대동단결의 기독교 버전이 ‘일신’이었던 것이다.
일신교회에서 선생은 전도사 직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선생은 명설교가로서 돋보였다.
한국전쟁이 종식되던 해인 1953년 일신회는 서울에서 ‘향린원’이라는 평신도 수도자공동체를 조직했고, 그해 5월에는 그들이 공동으로 사역하는 평신도교회인 향린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때 선생은 사실상 책임사역자였고, 선생이 개척을 주도한 이 세 번째 교회에서도 명설교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네 번째 교회는 1975년에 독재정권에 의해 강제해직된 기독자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갈릴리교회’다. ‘갈릴리’라는 이름은 민중신학 운동을 시작하던 때의 선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용어였다. 예수의 장소였고 민중의 장소였으며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사건을 일으킨 장소, 그곳이 갈릴리였다. 그리고 시공간을 달리하여 일어난 수많은 민중사건의 장소를 선생은 갈릴리라고 불렀다. 갈릴리는 민중사건의 장소적 은유인 것이다.
이 교회도 설립 당시의 향린교회처럼 평신도 지도자들이 주축이 된 교회였다. 하지만 해방정국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향린교회와는 달리, 갈릴리교회는 독재정권의 긴급조치 정국에서 반독재를 외치던 진보적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평신도교회였다. 전자에선 ‘자유주의적 개인’이 강조되었다면, 후자는 민중신학적인 ‘정치신학적 주체’를 소리 높이 외쳤다. 물론 당시에는 향린교회도 그렇게 재주체화되고 있었다. 이렇게 갈릴리교회와 향린교회의 진보적 신학과 신앙 형식을 주도한 이는 물론 선생이었다.
그리고 1987년 선생은 다섯 번째 교회를 설립했다. 이번에도 평신도교회다. 갈릴리교회에서 시도했던 예배 형식이 보다 발전된 형태로 셋팅되었다. 모두가 전면을 바라보게 하는 전통적 교회의 배치가 아니라 빙 둘러앉아 예배를 나누었다. 앞면과 뒤면이 없어졌고 신의 장소와 신자의 장소가 뒤섞였다. 신을 대리하는 성직자가 없는 교회에서 성직자의 자리를 따로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 중에 누군가 질문하기도 하고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이야기 나눔이 하나로 묶여서 설교가 되었다. 그것을 ‘하늘뜻나누기’라고 불렀다. 하늘뜻은 선포되는 게 아니라 나누는 것이다. 신이 분리된 곳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자리 옆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교회의 이름은 ‘한백’이다. 그 이전에 지은 교회들의 이름 속에는 선생의 생각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이름에 대해 토론했다. 해서 이름짓기에는 선생의 생각이 채워진 것이 아니라 선생의 비움이 담겨 있었다. 선생이 시도한 마지막 교회는 그랬다. 평신도 엘리트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보통의 신자 대중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회를 만들어갔다.
이 모든 교회에서 선생은 여러 명의 설교자 중의 하나였으나 가장 돋보이는 설교자였다. 강단에서 하든 둘러앉아서 하든 선생은 언제나 서서 설교를 했다. 건강이 나빠서 그냥 서 있는 것도 힘겨워 할 때조차, 신자들이 앉아서 말씀하길 권해도, 선생은 한사코 서 있겠다고 주장했다. 선생은 그것이 설교자의 도리라고 믿었다. 설교하다가 다리가 풀려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더라도 서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예의이고 신자 대중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선생은 큰 교회를 거부했다. 해서 1950년대 향린교회를 시작하기 전부터 ‘분가선교’를 강변했다. 일정 수가 되면 교회를 분가하자는 주장이다. 마지막 교회인 한백에서도 그랬다.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나누는 것을 꿈꾸었던 것이다.
신자 수가 얼마나 되면 분가를 할 것인가? 이것이 두 교회를 함께 한 이들의 고민이었다. 그 숫자를 두고 얘기할 때 선생은 늘 가장 적은 숫자를 얘기하는 편에 속했다. 향린에서 120명이 넘으면 분가하자고 말했다. 30대 청년 안병무는 자신의 육성으로 설교할 수 있는 숫자가 그 정도라고 보았다. 그리고 한백에선 30명을 주장했다. 심장질환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있던 60대 노년의 안병무가 자신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숫자는 그 정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이유가 붙었는데, 둘러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적정 숫자가 선생에겐 그 정도였다.
다작의 글쟁이였던 선생의 많은 글은 설교에서 시작했다. 간단한 메모로 설교를 하고, 그 후 그것을 글로 만들어 발표했다. 하여 글쟁이 안병무의 많은 글들은 설교할 당시의 특정한 시공간이라는 현장성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뒤에 글로 재탄생하였으니, 선생의 글을 읽을 때 그 현장의 문제의식은 그 글의 의미를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 설교 때에 사람들의 반응, 문제제기와 대화 등이 글 속에 반영되곤 했다. 즉 선생의 글이 설교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대중이 그 글 속에 숨은 저자로 들어가기도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한백교회와 함께 하던 시절 선생은 자필로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해서 설교했던 것을 글로 만들 때 두 단계를 거친다. 첫째 단계는 구술자가 기록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에선 문장을 다듬는 과정이 이어지는데, 대부분은 제자가 그 일을 맡았다. 문장을 읽고 수정할 만큼의 건강이 허락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생의 설교와 글은 설교 연행 현장의 대중과 구술자, 그리고 교정자가 개입되어 만들어진 집합적 결과물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렇게 설교에서 글로 이어지는 집합적인 집필 과정은 선생의 후기 사상과 상응한다. 선생은 예수와 주위 대중을 주와 객으로 나누었던 이제까지의 예수연구를 비판하면서, ‘주객도식 해체론’을 편다. 예수와 대중은 구분할 수 없다. 복음서 속의 예수의 말은 단독자로서의 그이의 말이 아니라 그곳에 함께 했던 이들과의 사건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해서 선생은 예수역사학의 단위를 ‘말’도 아니고 ‘행위’도 아닌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는 데 선생의 설교와 글쓰기 경험이 한몫했다. 안병무의 신학은 이렇게 책과 이론을 통해서 구현된 것이 아니라 체험과 자기 성찰의 결과물인 것이다.
잡지 발행인
선생은 평생 네 개 잡지의 발행인이었다. 그 잡지들은 선생의 사상의 변화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해서 선생을 사상가로서 시기구분을 할 때 이 잡지들을 기준으로 구분해도 좋은 방식이 될 수 있다.(1)
첫 번째 잡지 《야성(野聲)》은 1951년 11월12일에 첫호를 펴냈다. 한국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일신회 회원들을 선생이 수소문해서 다시 의기투합한 결과가 잡지의 창간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제호를 ‘야성’으로 정한 이는 선생이었다. 주가 도래할 것을 예언하는 광야의 고독한 외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생의 평생 동지였던 홍창의 장로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있는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자 하는 간절함”을 담은 표현이라고 이야기했다.(2) 한데 그것만은 아니다. 이 작명 속에는 ‘고독한 외침’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당시는 수많은 이들이 소리높여 진리를 주장하고 있던 때다. 한데 그 진리들은 하나같이 증오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메시지로 귀결되는 것들이었다. 선생은 그 진리들에 의해 헐벗고 감옥에 가고 죽임당하는 민족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는 아웃사이더 지식인이었다. 선생과 함께 했던 일신회도 그런 생각을 공유했다. 해서 선생은 ‘대로의 외침’이 아닌 ‘광야의 외침’이라고 표현했다.
선생은 이 잡지의 편집인이자 발행인이었다. 일신회 회원들이 글을 기고했지만, 많은 부분들은 선생이 채워넣었다. 때로 예정된 기고자가 글을 못 보내는 경우도 있고, 그때그때 잡지가 의견을 표명하거나 소식을 전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해서 선생은 매호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지만, 동시에 ‘편집실’, ‘편집인’, ‘주간’, 그리고 ‘심원’ 등의 이름으로 잡지 곳곳을 채워넣었다.
전쟁 중인데도 많은 독자들이 그 책을 읽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이들도 많았다. 특히 교계 인사들은 이들 아웃사이더 지식인들의 잡지를 불쾌히 여겼고, 때로 공격적인 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럼에도 잡지는 전쟁 중에도 최고 3천 부나 발매될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그렇게 인기 있는 책이었지만 1956년 1월15일, 1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그해 선생이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잡지는 《현존(現存)》이다. 독일에서 학위받고 귀국(1965)한 지 몇 년 안 된 1969년 7월에 첫 호를 발행했다. 잡지 제호인 ‘현존’은 하이데거의 용어인 ‘Dasein’을 옮긴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Dasein과 안병무의 ‘현존’은 동일하지 않다는 문제제기가 이 잡지 발간 다음 해에 송기득을 통해 제기되었다.(3) 여기서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현존’이라는 안병무의 신학적 문제제기는 하이데거의 Dasein의 철학적 한계를 돌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선생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존재로서 무엇인가 계속 추구하고 묻고 싶”었다고 답했다.(4) 하이데거는 ‘지금 여기 살고 있는 것’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결국 ‘존재 망각의 역사’로 귀결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안병무는 더 철저하게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존재’로서 말하고 생각하며 추구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현존’이라는 제호가 시사하듯이 선생은 실존주의적 문제제기를 한편에선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하이데거적 실존주의의 탈역사성과는 달리 더 철저히 역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를 수용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더 철저히 현실을 묻고자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안병무는 실존주의에서 관계의 필연성을 배운 것 같다. 하이데거는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인 Dasein(현존재)과 시간을 초월한 Sein(존재) 간의 상호관계를 ‘실존’(Existanz)라고 말했다. 이 둘은 별개인데 서로 연결해서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양자는 서로 연동되어 있으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것이 ‘실존’인데, 인류는 시간에 귀속된 현재에만 주목한 탓에 실존을 보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에서 강조점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있다. 안병무는 그런 관계의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안병무는, 시간 속의 것과 시간을 초월한 존재 사이의 관계를 주목한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시간적 존재 사이의 필연적 상호성에 주목했다. 가령 갈릴리의 예수와 한반도의 민중은 시공을 달리하지만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신학자라고 선생은 생각한 것이다. 해서 선생은 ‘현존’을 제호로 삼은 것이다.
이 잡지를 통해 선생이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신학의 탐구였다. 갈릴리의 예수가 서양의 시공간적 현존 속에서 실존한 것이 서구신학의 예수였다면,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현존에서는 다른 예수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그 다른 예수를 둘러싼 신학적 서사가 한국신학일 것이다. 선생은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담론의 마당을 만들었다. 그것이 《현존》이라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1980년 8월, 113호를 끝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전두환 신군부가 강제 폐간시킨 것이다. 왜냐면 안병무가 한국신학을 탐구하면서 도달한 것이 민중신학이었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세 번째 잡지는 《신학사상》이다. 《현존》이 한참 발행되고 있던 1973년 선생은 한국신학에 대한 탐구를 본격화하기 위해서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학술지 《신학사상》을 펴냈다. 《현존》에는 학술적 성과물을 담아내기도 했지만, 이 잡지는 50쪽 정도 되는 월간지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학술작업을 펴기가 어려웠다. 해서 본격 학술지인 《(계간) 신학사상》이 창간된 것이다.
이 책은 그 기조에 있어서 《현존》과 비슷했지만, 학술지였기 때문에 전두환 군부정권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민중신학적인 날선 신학적 비평이 아낌없이 구사되었다. 《현존》이 폐간된 이후에는 신학계뿐 아니라 진보학계를 풍미한 비평적 학술지로서 한동안 한국학 분야에서 굵은 궤적을 그었다.
그러므로 이 잡지는 《현존》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저에는 안병무 선생의 신학적 전개가 깔려 있다. 즉 한국신학의 탐구 과정에서 민중신학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두 잡지는 공히 보여준다. 단 《신학사상》은 현존보다 더 깊은 사유를 풍부히 담아낼 수 있었고, 《현존》이 강제폐간된 이후에도 그 논조를 꺾지 않고 이어갔던 것이다.
네 번째 잡지는 《살림》이다. 그 제호는 ‘죽임을 넘어서 살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단어는 선생의 말기 사유를 대표하는 키워드다. 선생은 1951년 《야성》을 발간할 때부터 《현존》과 《신학사상》에 이르기까지 내내 독재체제 아래에서 권리를 유린당한 민족/국민(nation)의 고통에 주목했다. 특히 1975년과 1979년(5)을 경유하면서 민족/국민 대신 ‘민중’(minjung)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민중신학이 대두한 것이다. 그것은 ‘타자성’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6) 한데 《살림》은 군부 독재정권이 민주주의를 외치는 대중의 저항에 한발 물러서서 제한적이나마 민주적 제도화가 실현되기 시작한 시기에 창간되었다. ‘제한적’이라는 표현은 메타적 분석이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대중의 관점에서는 갈망해마지 않던 민주주의가 ‘드디어’ 도래한 것으로 이해된 순간이 바로 ‘6.29선언’이었다.
선생도 1987년 6월 항쟁을 보면서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행렬을 중계하는 방송을 보면서 “아니, 그것은 장엄한 민족축제의 행렬이었다. 그러므로 울기만 하지 않았다. 환호, 환호, 그것이었다.”(7)라고 썼다. 하지만 선생은 곧바로 냉정을 찾는다. 군부독재로 환원될 수 없는 저 끈질긴 죽임의 권력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재자가 죽었어도, 또 다른 독재자들이 오공 청문회에 섰어도, 도처에서 환생하는 죽임의 권력은 끊임없다. 해서 선생은 ‘죽임을 넘어서 살림으로!’라는 슬로건을 제시한다. 바로 그 ‘살림’이 제호인 월간지가 1988년 12월부터 발간되었다.
이 시기에 선생이 주목한 또 다른 단어는 ‘숨’이었다. 1992년 선생을 중심으로 민중신학자, 민중교회 목회자, 기독교 민중운동 활동가 등이 참여하는 한국민중신학회가 창립되었는데, 그때 매월 발간된 소식지의 제호가 ‘숨’이었다. 물론 선생이 지은 것이다. 1975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 해직당하고, 이듬해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구속되어 9개월 정도 감옥에 있는 동안 심장질환이 발병했다. 이후 선생에게서 쉼을 쉰다는 것은 죽임의 질서에 저항하는 가장 격렬한 몸의 언어였다.
1987년 봄, 선생은 한 해에 한 번씩 한신대 신학대학원의 수유리 교정에 왔다. 그날엔 〈요한복음〉 수업이 있다. 그해부터 3년간 같은 수업을 했고, 그게 선생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수업 몇 시간 전에 학교에 와서 교수 휴게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2층 강의실로 올라온다. 50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다리가 풀어진 듯 강의실 의자에 풀썩 앉는다. 어깨를 거칠게 들썩이며 숨을 쉰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의 일상적인 모습은 그랬다.
1988년 어느 날 선생이 교회에서 하늘뜻나누기 시간에 성서의 ‘퓨뉴마’를 어떻게 옮기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여러 의견을 들은 뒤 선생은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기(氣)’라고 하면 어떻소?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성기’라고 할까?” 다들 유쾌하게 웃었지만 그 유머 이면엔 선생의 고통의 체험이 담겨 있었다.
선생의 해설은 이렇다. 프뉴마는 ‘바람’이나 ‘숨’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를 번역한 그리스어다. 흙으로 빚은 존재에 하느님이 ‘루아흐’하자 그가 생명이 되었다는 것,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는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곧 ‘루아흐’하는 것은 ‘기운’을 불어넣은 행위를 말한다. 해서 루아흐에서 유래한 프뉴마를 ‘기’라고 옮기는 게 딱 맞는 의미라는 주장이다. 고통스런 숨 쉬기가 아니었다면 그 느낌을 상상해내기 어려운 해석이었다. 그리고 ‘숨’과 ‘기’, 이 두 단어를 함축하는 용어가 선생의 ‘살림’이다.
이렇게 《야성》, 《현존》과 《신학사상》, 그리고 《살림》, 선생이 창간한 이 잡지들 속에는 선생의 신학적 사유가 깊게 새겨져 있다.
저술가
‘심원 안병무 선생 기념사업회’가 만든 ‘심원 안병무 아키브’(8)에 의하면 현재까지 선생의 글은 총 902편으로 정리되어 있다.(9) 하지만 안병무 아키브 보완작업을 통해 저작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글들을 다수 발견했다. 그것을 아키브에 목록화하는 시도를 했지만 아직 완전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다. 아무튼 현재까지 발견된 바에 의하면 선생이 쓴 글의 총 편수는 902편을 훨씬 넘을 것이다. 또 단행본 한글판 저서는 28권, 공저 형식의 저서는 6권이다. 그 외에 영어와 독일어와 일본어로 번역된 책은 최소 8권이 넘는다. 한마디로 선생은 다작의 작가다.
하지만 단행본 저작들은 글을 모아 펴낸 것이 대부분이고, 처음부터 단행본으로 기획되어 출판된 것은 6권에 불과하다. 선생의 대부분의 글은 잡지에 실린 것들이다. 특히 선생이 펴낸 잡지들에 많은 글들이 실렸다. 그리고 잡지에 실린 글들 중 많은 것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설교에서 시작한 것들이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설교가 글로 되어 잡지에 실리고, 그런 글들이 묶여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선생을 부를 때, ‘박사’나 ‘교수’ 등의 호칭을 쓴다. 선생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1956년부터 1965년까지 공부했고, 귄터 보른캄(Günther Bornkamm)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는 박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학자를 부르는 최고의 경칭은 ‘박사’였다. 선생은 이 호칭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지만, 그런 이유로 많은 이들이 선생을 ‘안병무 박사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한편 선생은 1970년부터 1987년까지 한신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중 독재정권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강제 해직되었으니(1차 해직: 1975.6~1980.2 / 2차 해직: 1980.8~1984.7), 17년 재직기간 중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시기는 8년 정도였다. 그 이후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지만, 정년퇴임한 다음 해인 1985년부터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기에 학생들이 열렬히 원해도 강의를 할 형편이 못 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선생은 앞에서 보았듯이 무려 네 개의 잡지를 만들었다. 그중 《야성》과 《현존》은 창간 때부터 폐간 때까지 1인 편집인 시스템으로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이 두 잡지는 당대를 대표하는 잡지였고, 특히 《현존》은 당국에 의해 ‘금서’로 낙인찍혀서 강제 폐간되었다. 잡지, 즉 정기간행물은 문서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절,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던 매체였다. 마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의 ‘팟케스트’나 문재인 정권 때 ‘유튜브’가 대중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비판담론의 장(field)이듯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정기간행물이 그런 매체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최대종교이자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의 하나였던 천도교가 펴내던 월간지 《개벽》이 강제 폐간된 사례를 이어받아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무려 2천 종이 넘는 정기간행물을 폐간시켰는데, 그중에는 장준하의 《사상계》, 함석헌의 《씨ᄋᆞ의 소리》, 백낙청 등이 주도한 《창작과 비평》, 김재준의 《제3일》 등이 포함되었고, 안병무의 《현존》도 이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주목받는 정기간행물이었다. 또 《신학사상》과 《살림》은, 1인 편집인 시스템으로 발간된 것은 아니지만, 선생이 발행인이었고, 그 잡지에 기고한 저자 중 가장 많은 글을 쓴 이였다.
그밖에 많은 잡지들이 선생에게 글을 청탁하려고 줄을 섰다. 가장 영향력이 있던 지식인의 한 사람인데다 날카로운 필력으로 유명한 터여서 그는 정기간행물 기획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식인의 하나였다. 게다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글 대부분이 잡지에 실린 것들이고 그 수가 무려 1천 편에 이르니 글을 쓰는 일은 선생의 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겠다.
그러니 박사니 교수니 하는 호칭보단 작가라는 호칭이 선생에게 더 걸맞을 것 같다. 하지만 당대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안병무 작가님’이라는 말로 선생을 부른 이는 없다. 그럼에도 선생은 당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하나였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는 명설교가였을 뿐 아니라 동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빛나는 작가에 속했다.
참여지식인 그리고 민중신학자
《야성》 시대에 안병무는 이념 갈등으로, 그리고 전쟁으로 상처 입은 민족에게 예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선생이 추구한 것은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저항보다는 일신회 회원과 함께 수도자공동체를 만드는 데 있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53년 2월 서울로 속속 귀환한 일신회 회원들과 고아원이던 적산가옥을 구입해서 생활공동체이자 신앙공동체를 시작한 것이다. 그 고아원의 이름이 향린원이었다. 그해 5월에는 이들이 주축이 된 평신도교회가 개척되었는데 그 이름이 향린교회가 된 것은 이런 이유였다.
평신도 수도자공동체를 생활공동체로 만들고자 한 것에 대해 그 출사표라고 할 수 있는 글인 〈평신도의 목회: 그룹 운동의 방향〉(10)에서 선생은 ‘삶’에서 후퇴한 종교성의 장소로 전락해 버린 교회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으로 신앙을 삶과 접맥시키려 했다고 주장한다.(11)
전쟁이라는 시간은 모든 고통을 적을 향한 분노로 표현하는 시간이고 그 분노를 원초적 공격으로 표출시키는 시간이다. 한데 ‘전후’는 어떤가? 여전히 극한적인 고통이 삶을 휩싸고 있는데, 적을 공격하는 전장(戰場)이 사라졌다. 고통을 분노로 전환시키는 것은 그 사이 익숙해진 몸의 언어가 되었는데, 분노를 표출할 장소가 없어졌다. 해서 그 분노의 대상이 이웃에게로 혹은 가족에게로 전이되곤 했다. 수많은 이웃 간의 갈등과 가정폭력이 난무했다. 어떤 경우는 그 적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정신적 질환이 생기고 몸에 질병이 생긴다. 마음에 병이 들고 몸에 병이 들었다. 하지만 갈 병원도 없고 치료비를 낼 여력도 없다.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은 오로지 생활 속에서 그 모든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게다가 일터도 없고 끼니를 이을 재산도 없었으니 생활의 고통은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수도자공동체로서의 생활공동체는 이런 현실에 대한 선생과 일신회 회원들이 제시한 하나의 대안 모델이었다.
이것이 과연 대안일까. 생활공동체로서의 신앙공동체 모델이 가난과 질병을 위한 제도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려면 국가를 향해 말해야 하고 사회치유를 위한 공공적 활동을 펴야 한다. 하지만 전혀 아닌 것도 아니다. 생활공동체 모델은 마음의 자원을 만들어내는 데는 꽤나 유효한 시도였다. 고통을 분노로 대체하지 않아도 될만한 내면성의 발견, 그것은 마음의 자산을 만드는 일이 될 수 있었다. 선생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앙가주망(engagement)은 《현존》 시대에야 본격화된다. 내면성의 실험은 사회참여의 실험으로 외화된다. 사실 내면성의 탐구에서 사회적 앙가주망으로의 전환의 직접적 계기는 함석헌 선생과의 두 달여에 걸친 여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상계》 1961년 7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글 〈5.16을 어떻게 볼까〉는 5.16에 대한 한국 지식인이 제기한 첫 번째 비판이었다. 장준하는 함석헌 선생이 서슬 퍼런 박정희 군부쿠데타 세력의 탄압을 피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를 당분간 해외여행 길에 오르도록 주선했다. 그런 맥락에서 1962년 2월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북미 여정에 올랐고 그로부터 1년5개월에 걸친 세계여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여정의 마지막은 독일에 유학 중이던 안병무와 함께한 북유럽 여행이었다. 안병무와의 여행을 끝으로 1963년 여름 함석헌 선생은 귀국했다. 이제 세계의 비판적 지성의 한 사람이 된 함석헌 선생은 바로 군사정권을 향한 날선 비수 같은 글을 뿜어댔고, 이른바 어용지식인들은 ‘노망한 늙은이’ 운운하며 원색적 비판을 가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안병무의 생각의 전환, 참여적 지식인으로서의 전환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965년 선생은 드디어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 무렵은 5.16군사쿠데타(1960) 이후 잠잠하던 지식인들의 사회적 앙가주망이 재개되었고 친정부적 어용지식인들과의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때였다. 그때 중앙정보부가 기획한 간첩조작사건이 일어난다. ‘동백림 사건’(12)이다. 선생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바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다시 2년이 지났다. 그때 《현존》이 창간되었다. 그 전까지 선생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대열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는데, 잡지라는 당시로선 가장 트랜디한 담론매체를 운용하는 스타지식인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즉 선생의 1인 잡지라고 할 수 있는 《현존》은 비판적 지성으로서 사회적 참여를 신앙적으로 담론화하는 매체였다.
그런 선생에게 중요한 어휘는 ‘민주주의’와 ‘민족’이었다. 선생에게서 ‘민중’이 중요한 신학적 키워드로 등장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인 1975년이었다. 선생과 서남동 목사, 두 발군의 신학자가 선두에 선 신학운동인 민중신학이 시작된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민중신학은 1975년 《기독교사상》에 실린 두 편의 글, 안병무 선생의 〈민족・민중・교회〉와 서남동 목사의 〈민중의 신학에 대하여〉에서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이 두 글이 발표되는 직접적 계기는 ‘민중’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안병무의 글은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간첩조작사건인 1974년 인혁당 2차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어 각각 15년과 10년 형을 선고받은 김동길, 김찬국 두 교수가 집행정치로 이듬해 2월에 출소하자, 이들 기독자 교수의 출소를 환영하는 3.1절 예배 때 했던 설교원고였다. 서남동 목사의 글은 김형효 서강대 교수가 신학계 내에서 불고 있는 반정부적 지식인들의 담론을 비판하자 이에 대한 답글로 쓰인 것이다. 김형효의 비판 역시 박정희 정권의 반정부적 지식인에 대한 공격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이 두 학자는 공교롭게도 ‘민중’이라는 단어를 자신들의 논지에 중요한 어휘로 부각시켰다. 아직 거기에 신학이라는 말이 덧붙여지지는 않았다. 단지 민중과 신학을 병렬시킨 것이다. 이제까지 모든 신학들은,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민중을 외생적 변수(exogenous variable)의 하나로 간주했다. 한데 선생과 서남동 목사는 그것을 내생적 변수(endogenous variable)로 전환시켰다. 예수는, 민중이 아니지만 민중 편을 든 메시아였다라고 주장할 때, 민중은 신학의 외생적 변수다. 반면 신이 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그때 사람은 신학의 내생적 변수가 된다. 해서 불트만은 ‘신학의 과제는 인간학’(Anthropologie als Aufgabe der Theologie)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병무와 서남동은 이 말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신은 ‘인간’으로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민중’으로 왔다. 그는 묵을 곳도 없어 마굿간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사람들이 그이를 ‘마리아의 아들’로 불렸다는 것은 아주 일찍부터 그의 아비가 부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당시 사회에서 귀족이 아닌 한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것은 그이의 가족이 가장 비참한 계층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뜻한다. ‘마리아’, 아니 아람어식 이름인 마리암(Maryam)은 대개 이름 없는 여성을 가리킬 때 부르는 가짜 이름인 경우가 많았다.(13) 곧 예수는 민중이었다. 그를 메시아로 부르는 것, 나아가 신의 아들이고 동시에 신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안병무와 서남동에 의하면, 신이 민중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서 그 신을 섬기는 것은 민중에게 밥을 주고 물을 주는 행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실은 이런 문제제기는 두 신학자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다. 당시 개신교와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던 몇몇 청년 지식인들의 날선 비평이 그들은 선도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이 일어나던 바로 그날, 곧 1970년 11월13일, 새문안교회에서 강연을 하던 개신교청년운동가인 오재식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리면서 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으로 해석했다. 그 강연에 기반을 두고 쓴 추모사가 《기독교사상》 1970년 12월호에 〈어떤 예수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여기서 ‘전태일이 예수’라고 말하고 있다.
오재식과 거의 같은 시기에 또 다른 청년지식인이 민중신학적 사유의 토대가 되는 논점들을 제기했다. 오재식보다 8년 연하의, 막 서른 줄에 들어선 청년 김지하는 당시 가톨릭 신자였지만 가톨릭청년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아니었고 급진적인 시인이자 비평가로 활동했던 이였다. 한데 그의 많은 글은 놀라우리만큼 날카로운 그리스도교적 비평을 담고 있었다. 우선 그는 동학운동에서 3.1운동으로, 그리고 4.19의거’로 이어지는 저항적 민족주의 계보의 민중운동을 이야기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주장에 반론을 편다. 그런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이 민중을 포용하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정작 동학운동에서, 3.1운동에서, 4.19운동에서 죽어간 무지렁이 대중은 저들의 ‘저항적 민족주의의 계보에 기입되지 못한 도구에 불과하지 않았는가’,라고 그는 되묻는다.(14) 이것은 훗날 안병무가 ‘오클로스 민중론’을 펴는 사유의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1972년에 김지하가 쓴 시나리오 〈금관의 예수〉는 예수와 거지들(민중)이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다. 이것은 훗날 안병무와 서남동의 민중 메시아론의 토대가 된다. 그밖에도 그의 담시(譚詩, ballade)인 〈장일담〉 등은 민중예수론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사실 감옥에 있거나 수배되고 있던 김지하를 음으로 양으로 돌봐주었던 서남동을 통해서 김지하의 옥중기록들이 유출되었고, 서남동은 안병무와 그의 문제제기들을 공유하면서 그 논점들을 신학적 서사로 번안해내곤 했었다. 그런 점에서 1970년 어간 오재식, 김지하 같은 청년 지식인들이 마치 예언자처럼 민중을 신학의 내생적 변수로 해석하는 사유의 길을 터놓았다면, 서남동과 안병무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소통 가능한 언어로 번안해냈다. 그때가 1975년이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1975년의 두 편의 글은 아직 민중신학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지 않았다.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이 천명된 시기는 1979년이었다. 그해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CCA) 서울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 참석한 이들이 그즈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신학운동을 ‘민중신학’(minjung theology)이라고 불렀다. 처음으로 이름이 생겼고 그것이 CCA 매체와 참석자들을 통해 전 세계 그리스도교 네트워크로 퍼져나갔다. 당시 독일의 진보신학을 대표하는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나치의 정당성을 부여해준 칼 슈미트(Carl Schmitt) 류의 정치신학에 반하는 새로운 신학운동을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theology of post-Auschwitz)이라고 불렀고, 가톨릭을 대표하는 요한 밥티스트 메츠(Johannes B. Metz)는 ‘신정치신학’(Neue Politische Theologie)이라고 했다. 나치즘 혹은 파시즘적 정치신학의 폐해를 넘어서기 위해 많은 신학자들은, 신학이 정치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더 철저히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칼 슈미트 식의 정치신학과는 다른 정치신학을 말하려 했다. 몰트만은 민중의 흥분과 갈망에 부응하는 정치체제야말로 메시아적 체제라고 주장한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 나치 체제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신학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문제제기하면서, 신의 나라와 세속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두 나라 사이의 길항적 관계가 견지되어야 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정치신학 운동이 비단 유럽의 현상만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 당시 세계 각처에서 불고 있는 정치적 신학운동들에 주목한다. 이때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흑인해방신학과 함께 한국의 민중신학도 새로운 정치신학의 맥락 속에 포함되었다.
하여 CCA를 통해 이름이 생기게 된 민중신학은 일약 세계적인 정치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의 하나로서 전 세계 신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서구사회에서 민중신학을 주제로 공부하는 것을 훨씬 용이하게 했고, 많은 신학도들이 민중신학으로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진보적 신학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이렇게 민중신학은 1979년을 계기로 전 세계적 신학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1979년 그 어간은, 민중신학이 국제적 위상을 갖는 새로운 정치신학의 반열에 오르고 안병무가 민중신학자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는 그 맥락과는 다른 문제의식이 고조된 시기였다. 즉 많은 유학생들이 몰트만적 정치신학의 한 부류로서 민중신학으로 논문을 쓰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한국에서 민중신학을 선도했던 안병무, 서남동 등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앞다투어 민중언어를 채취하러 곳곳을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몰트만 등이 나치의 대중추수주의를 낳은 민중의 흥분과 떨림을 신학과 직결시키는 것에 선을 긋던 그 시기에 민중신학자들은 민중과 지식인 사이의 경계를 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몰트만은 1979년 CCA를 통해 소개된 민중신학을 자신의 정치신학의 한 사례로 호출하고 있었지만, 그런 호출에 부합하는 민중신학은 1979년의 민중신학이라기보다는 1975년의 민중신학에 가까웠다.
한국의 군부독재 체제도, 나치 체제처럼, 시골과 도시 하층민 사이에서 더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런 대중의 지지에 기반을 둔 대중독재(mass dictatorship) 체제로서 작동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기보다는 그렇게 해석되었다. 대중의 지지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여론조사도 없었고 직접선거도 없었다. 단지 모든 신문과 방송이 그렇게 얘기했고, 지식인들은 그나마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대중은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대중독재 시대였다고 가정하면서 군부독재 체제 하의 한국과 나치 체제 하의 독일을 유사한 것으로 보고, 두 나라에서 그런 강권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교회와 주류 신학계의 정치신학을 문제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1975년의 민중신학과 몰트만의 정치신학은 잘 부합한다.
그런데, 말했듯이, 1979년 어간에 한국의 민중신학자들의 행보는 독특했다. 독재체제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1975년과 다르지 않지만, 이 시기 민중신학자들은 앞다투어 민중 언어를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민중이 체제에 의해 고난당하고 있다는 막연한 규정이 아니라, 민중의 언어 자체를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가면극(탈춤 등)을 들여다보았고 설화를 뒤져보기도 했다. 신문 속에서 숨은 듯 드러나는 민중 이야기도 눈여겨보았다. 당시 안병무 선생을 포함한 일단의 민중신학자들이 교도소에서 수감되었던 덕에 감옥의 언어도 부분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도달한 신학적 문제제기는 매우 흥미롭다. 특히 안병무와 서남동은 ‘죄’를 체제의 언어로 보기 시작했다.(15) 해서 죄의 굴레에 속박되어 있는 민중은 자신의 현실을 말하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그 언어는 지배체제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한데 하늘에 닿는 탑, 곧 가장 위대한 이데올로기로 온 세상을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바벨의 탑은 실패했다. 그 하나의 언어 프로젝트는 무수한 언어들 혹은 소리들로 분산되었다. 하나의 언어 프로젝트는 지배언어가 추구하는 세계의 질서다. 그 언어 속에서 민중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지식인들이 알고 있는 민중이었다.
한데 안병무 등이 탐구한 언어는 지배언어로 포용되지 않는 ‘하위문화적 언어들’(16)과 ‘소리들’(17)을 발견하려는 데 있었다. 지배적 언어로 만들어진 바벨의 탑에서는 보이지 않던 민중의 소리들이 그곳에는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의 메시지를 해독하며 그것을 세상에 번안해 내는 것, 민중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민중언어 탐구는 그랬다.
서남동은 민중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그들 특유의 소리를 주목했다. 그것이 바로 ‘한’이었다.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다. 고통을 말하는 서사(narrative)를 잃어버린 이들이 지르는 하소연 소리다. 방언처럼, 소리 형태는 그 사회 특유의 음성학적 질서를 갖고 있지만 그 소리는 의미를 구성하는 언어적 요건을 갖추진 못했다. 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다. 안병무는 죽임당한 아벨의 소리를 들은 신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소리를 듣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가 바로 민중신학자다. 해서 민중신학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독해하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자, 곧 ‘증언’하는 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각에서 성서를 읽으니 성서가 새로웠다. 바리새인들의 죄의 체제에 속박된 대중은 실어증에 걸렸다. 그런 이를 당시 언어는 ‘벙어리 악령 들린 이’(το αλαλον πνευμα)라고 불렀다. 또 어떤 이는 보지 못했다. 그런 이를 당시 사람들은 ‘그 자신의 죄나 그의 조상의 죄 탓’이라고 말했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자, 보지 못하는 자에게 보고 듣는 자가 되게 했다. 민중의 언어를 주목하고 죄의 체제를 문제제기 하게 된 이후 선생은 예수의 이 축귀 행위에서 그 체제에 대항하는 예언자의 증언 행위를 보았다. 증언은 누군가에게 볼 눈과 들을 귀를 주는 일과 함께 그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렸던 체제를 붕괴시키는 예언자적 행위다.
그런데 안병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치유 사건에서 구원자는 누구인가? 가령 〈루가복음〉 10,25~37에는 누가 이웃인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누가 이웃인가’고 되묻는다. 이에 대한 모범답안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구원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안병무와 서남동은 모범답안과는 다르게 말한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이가 구원자다. 같은 맥락에서 티매오의 아들과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에게로 다가가는 것을 사람들이 막았지만 그들은 금지된 길을 헤치고 예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예수는 이들에게,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듣지 못했던 칭찬의 말을 건넨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라고. 여기서 선생이 강조하는 바는 누가 먼저인가, 예수에게 다가간 것이 먼저인가 예수가 치유하는 이라는 사실이 먼저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둘을 따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이른바 ‘주객 이분법의 해체론’을 펴는 것이다.
몰트만은 안병무의 이러한 식의 해석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서기 2천년 어느 날 민중신학자 서광선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면서 몰트만과 안병무는 〈요한복음〉 1,29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누구인가에 대해 안병무는 고단 당하는 아시아 민중이 곧 오늘의 예수라는 논지의 주장을 폈고, 몰트만은 예수가 민중을 위해 일했지만 예수를 민중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18) 그리고 안병무의 민중 예수론에 대해 몰트만은 “민중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하여 낭만적으로 묘사”된 것에 지나지 않다고 평가절하했다.
이들의 논쟁이 흥미롭다. 1979년 어간 이후 민중언어에 주목했던 안병무를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은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민중을 위한다고 말해왔지만 실상 민중이 왜 체제의 언어에 더 많이 오염되는지를 철저히 묻지 않았다. 계몽주의적 주체라고 자임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성이다. 계몽주의는 민중의 가능성을 지식인의 언어로 덮어씌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반성적 성찰이다. 반면 몰트만은 민중신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민중을 옹호하고 있다고 보면서, 민중을 예수와 동일시하는 것은 지식인의 낭만적 순진함의 발로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몰트만이 보는 것은 나치에 동조한 민중의 퇴행성이었다. 그 점에서 1975년 무렵의 민중신학자들도 비슷했다. 한데 1979년 어간 민중신학자들은 다르게 보았다.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설득력 있게 답하진 못했지만 그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해석해 본다면, 그들이 그 시절 추구했던 것은 ‘민중의 자생적 생명력’에 대한 탐구였다.
사실 민중이 위험한 존재가 된 것은 지식인의 퇴행성 때문이 아닌가. 민중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더 위험한 것이라는 얘기다. 해서 선생을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언어를 사실상 봉쇄해버린 지배체제의 질서를 해체하고 싶어 했다. 그것을 선생은 ‘죄의 체제’라고 본 것이다. 그 체제 아래에서 민중은 할 말을 잊었다. 자기의 경험을 얘기하는 언어는 유실되었고, 타인의 눈으로 규정된 언어를 마치 자기 것처럼 얘기하는 것만 남았다. 해서 선생이 꿈꾸었던 것은 죄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생을 포함한 민중신학자들은 그런 급진주의적 비전을 이야기하는 방법을 몰랐다. 단지 그런 문제의식으로 민중의 언어, 민중의 자기 생명력을 읽어보려 했다. 선생은 그것을 ‘민중의 자기초월’이라고 말했고, 그것을 요즘의 말로 번안하면 민중의 ‘임파워먼트’다. 그것을 읽어내고자 좌우사방을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시기가 1979년 어간의 민중신학자들이었던 것이다. 몰트만은 그런 민중신학자들의 고민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해서 그는 단지 민중신학자들이 칼 슈미트 같은 위험한 민중주의에 빠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아무튼 안병무는 1979년 어간 민중언어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해서 1984년 무렵까지, 민중신학적 사고를 집중적으로 펼쳐나갔다. 1984년이란 사상가로서 선생의 사유가 절정에 이르던 시기다. 그 이후 선생은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긴 글을 읽을 수 없었고, 손아귀에 힘이 빠져서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글쟁이가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글쟁이의 사망선고 같은 것이겠다. 하지만 선생의 경우를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선생이 글을 못 쓰자 제자들은 고심 끝에 대담을 기획하게 되었고 그렇게 나온 것이 《민중신학 이야기》다. 제자들 몇이 사전 토론을 거친 뒤에 1985년 겨울부터 대담을 시작했고 이후 몇 차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과 이후에 별도로 했던 대담과 강연을 풀어서 글로 만들어 묶어낸 것이 이 책이다.
인천에서 열린 2016년 SBL국제학회(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annual meeting, 2016)에 참석한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의 개척자인 수기따라자(R.S. Sugirtharajah) 버밍햄대학 교수는 실망에 가득 차서 그 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민중신학 연구자들을 수소문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성서학회인데 어떻게 민중신학과 안병무를 다루는 논문 한 편도 발표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서 한국의 사정을 듣고 싶어 했고, 안병무의 저서를 영어로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해왔다. 그리고 그는 어느 책이 적절한지를 물었다.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민중신학 이야기》라고 말했다. 안병무 사상의 절정을 담아내는 책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된 시기에 고육지책으로 만든 대담집이 최고의 저작이라고 우리는 소개한 것이다.
대담이 진행될 때 선생은 굉장히 설레했다. 자신이 접해보지 못했던 대담의 마술을 체감한 것이다. 그 무렵 선생이 자주 했던 말은 ‘질문이 대답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야기라는 미디어가 메시지를 재구성한다’는 뜻이겠다. 선생은 대담 중에 인터뷰어들과 미묘한 생각의 긴장을 드러낸다. 한데 그 미묘한 긴장 속에 선생은 번번이 새로운 문제의식에 도달하곤 했다.(19) 그 결과 《민중신학 이야기》는 선생의 많은 책 중 가장 민중신학의 사유가 빛나는 책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중신학 이야기》가 선생의 책 중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볼 수 있지만, 선생의 민중신학을 학문적으로 평가할 때 가장 빛나는 성과는 그의 민중론이라고 할 수 있는 ‘오클로스론’에 있다. 그것은 선생의 예수해석의 핵심이기도 하다. 해서 이 글의 마지막 장은 선생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예수 해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오클로스와 예수
안병무 선생의 ‘역사의 예수’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한글 성서에서 ‘무리’로 번역된 ‘오클로스’(οχλος)라는 그리스어다. 이 단어는 제2성서(신약성서)에서 175회 등장하는데, 그중 선생이 주목하는 것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36회다.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사회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 단순한 ‘무리’라고 하면 될 것인데, 오직 이 복음서에서만 특별한 용례로 쓰였다. 여기서 그들은 ‘속해 있지만 속하지 못한 자’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혈통의 사람이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민족의 일원으로 여기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촌락이나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 주민들은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이다.
한데 〈마가복음〉에 나오는 오클로스 중 두 번을 제외하면 그들은 모두 예수를 따르는 대중이었고, 예수는 그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포용적이었다. 가령 예수는 나사렛 마을에서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는 사역을 했는데, ‘폴로이’(πολλοι)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그리스어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뜻의 단어인데, 문맥상 ‘마을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마을에서 활동할 때 폴로이, 곧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지만 그들 중에는 예수를 따르기를 거절한 이들도 많았다. 한데 오클로스는 항상 예수 주위에 있었다.
이렇게 〈마가복음〉에서 예수와 오클로스의 관계가 거의 대부분 친밀한 관계인 것은 이 복음서 공동체가 오클로스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해서 선생은 〈마가복음〉을 오클로스가 기억한 예수 이야기집이라고 해석한다. 비슷한 주장을 일본의 맑스주의 성서학자 다가와 겐죠(田川建三)가 먼저 이야기한 바 있지만,(20)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가와가 이 복음서를 회자시킨 공동체 구성원을 오클로스라고 말한 반면, 안병무 선생은 그들이 복음서를 회자시킨 대중일 뿐 아니라 예수 이야기를 전달한 대중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선생의 관점인데 그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예수 당대에 예수 운동의 목격자였고 또 그분의 치유 은사를 받은 수혜자였던 오클로스가 그분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때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 대부분이 오클로스였다. 왜냐면 그들은 그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대개 비슷한 부류끼리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수로부터 한 세대쯤 지나서 갈릴리 북부의 오클로스 공동체에서 그런 예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그것을 글을 쓸줄 아는 어떤 이가 문서로 만들었다. 그것이 〈마가복음〉이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은 구술문학이라는 얘기다. 안병무 선생이 이런 주장을 펴던 때에 이 복음서를 구술문학으로 보려 했던 이는 거의 없었다. 최근에는 이런 연구들이 제법 나오고 있지만, 1920~30년대 루돌프 불트만이 양식비평으로 예수 설화를 구술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했다가 실패한 이래 예수학계에서 〈마가복음〉을 구술문학으로 보면서 역사의 예수를 해독하려 시도한 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선생은 놀랍게도 ‘목격자’, ‘전달자’, ‘해석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예수 이야기의 구술을 통한 전달에서 문서의 형성 과정을 추론해 내고 있는 것이다. 복잡한 논의를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목격자도 전달자도 해석자도 모두 오클로스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목격하고 전달할 때 이미 해석을 한다. 그런데 해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있다. 목격자이자 전달자인 이들의 사회적 위치의 유사성이 해석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친다. 가령 여성, 청소년, 군인 등, 각 집단에 따라 기억하고 전달하고 해석하는 데 제각기 다른 경향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선생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오클로스라는 특정한 사회적 범주의 사람들이 예수 이야기를 기억했고 전달했으며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서의 예수와 역사의 예수 사이의 다리가 가설될 수 있었다. 복음서의 예수는 해석된 예수이고 역사의 예수는 실재했던 예수인데, 이제까지는 해석된 예수는 알아도 실재했던 예수를 알 길은 없다는 것이 주로 학계의 결론이었다. 해서 선생 당시에 학자들은 예수를 역사적으로 묻는 걸 주저했다. 선생보다 앞서서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론을 폈던 다가와 겐죠도 예수를 묻지 않고 〈마가복음〉 공동체만 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데서 기억해야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예수 설화의 집단성이다. 즉 예수 이야기는 예수라는 개인이 말하고 행동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예수 이야기에서 그것을 목격하고 기억하며 전달한 이와 예수는 분리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설화 속에는 예수 자신과 기억하는 자, 전달하는 자, 해석하는 자가 분리할 수 없이 엮여 있다. 해서 예수 설화에서 주위 사람들을 제거해서 예수가 한 진정한 말이 무엇이냐를 묻는 주류 예수 학계의 질문은 틀렸다. 하여 선생은 말한다. 주와 객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도 객도 없다. 그들은 이미 설화 속에서 분리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 우리는 신학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구원자인가? 최초의 복음서, 다른 복음서의 대본이 되었던 가장 오래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예수는 단독자가 아니라 집합적 존재다. 그렇다면 그런 집합적 존재로서의 예수가 구원자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주객 이분법을 해체하고 성서를 읽고 신학을 해석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집합적 존재로서의 예수라는 문제설정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예수사건’이라는 데 있다.
하이데거와 불트만에게서 사건은 만남을 의미한다. 한데 그들에게서 만남은 시간 속에 있는 존재와 시간을 초월해 있는 존재 사이의 만남이다. 그것을 그들은 실존이라고 불렀다. 반면 안병무는 다른 시공간대의 존재 사이의 만남으로 그 의미를 재해석했다. 예수와 그 주위의 오클로스는 각기 나름의 시간을 살았던 이들이다. 그들이 만나 사건을 일으켰다. 또 그 이야기가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이들과 만나 그 원초적 해석에 덧붙여진다. 그렇게 사건이 누적되면서 〈마가복음〉이 탄생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시대의 오클로스도 예수를 해석하는 대열에 섰다. 전태일이 그랬다. 해서 오재식은 그를 우리시대의 예수라고 말했고, 안병무도 서남동도 전태일 예수론을 이어받았다. 이것이 민중메시아론이다. 예수사건을 접한 이들은 구원을 체험했다. 그렇게 구원을 체험한 이들에게 예수사건은 메시아적 사건이다. 그런데 그 사건 속에 주와 객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니 사건 속에서 대중은 메시아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을 이해하지 못했던 몰트만은 안병무가 민중을 낭만화했다고 비평했다. 하지만 안병무는 민중을 낭만화한 게 아니라 민중의 자기초월 사건을 예수사건 속에서 읽어낸 것이다. 지식인은 그런 민중사건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그렇게 일어난 사건을 증언하는 자일 뿐이다. 칼 슈미트의 실수는 타인을 증오하고 파괴하는 것을 예수사건이라고 오인한 데 있었던 것이지, 그가 민중사건을 읽으려 했던 것이 문제는 아니었다.
아무튼 안병무 선생의 오클로스론은 역사의 예수를 해석하는 역사비평 방법의 개가였다. 그리고 그것은 골방의 학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 슈미트적인 것도 아니고 몰트만적인 것도 아닌 민중신학적인 정치신학으로 우리 시대에 개입하는 실천적 신학이다.
21세기 안병무
지난 세기 끝자락이 가깝던, 1996년 10월19일 선생은 이 땅에서 힘겨운 숨쉬기를 멈추었다. 그렇지만 그 고통스런 숨쉬기가 구현해 낸 신학적 질문들은 21세기에도 살아있다. 해서 우리는 선생을 독서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끊임없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최전선에서 읽어내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자신이 겪고 있는 몸의 고통들과 치열하게 대면시켰다. 해서 그렇게 나온 선생의 신학은 그의 몸의 언어이고 시대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우리는 선생으로부터 배운다. 더 넓게 시대를 읽고 더 깊게 자기 존재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극한 지점에서 우리는 선생과 시간의 대화에 들어선다. 그것이 진정한 ‘실존’이라고. □
(1) 선생이 창간한 잡지들을 통해 그의 신학의 흐름을 읽어내는 시도로 김진호, 〈안병무 해석학 시론―‘내면성의 발견’과 ‘민중적 타자성’ 개념을 중심으로〉, 《21세기 민중신학―세계의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삼인, 2013)을 참조.
(2) 황창의, 〈‘야성(野聲)’과 안병무(安炳茂)―한국전쟁의 비극이 피처럼 스며든 野聲〉, 《에큐메니안》(2013.05.27.)(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9819)
(3) 송기득, 〈철학적 실존과 성서적 현존〉, 《현존》 10(1970.4). 김남일, 《안병무 평전》(사게절, 2007), 339쪽에서 재인용.
(4) 안병무, 〈대화〉, 《현존》 12(1070.7). 김남일, 《안병무 평전》(사게절, 2007), 339쪽에서 재인용.
(5) 이 두 해는 민중신학의 출현이라는 의미를 갖는 시기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6) 그 차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간략히 타자성의 대두라는 점만을 지적해두려 한다.
(7) 안병무,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한국신학연구소, 1979), 137쪽
(9) http://www.simwon.org/page_yjQH03
(10) 《야성》 7(1953.1).
(11) 같은 글, 554쪽(여기서 쪽수는 이 글이 재수록된 《기독교의 개혁을 위한 신학》에서의 쪽수다). 이런 문제의식은 선생의 후기 사상에까지 지속되는데, 가령, 1987년 창립한 한백교회에서 선생은 예배 속의 ‘헌금 봉헌’ 순서를 ‘물질을 드림’이라는 이름으로 변경시켰고, 성찬나눔 대신 공동식사를 제안했다.
(12) 독일과 프랑스에 살던 이민자나 유학생들이 동백림, 즉 동베를린으로 건너가서 북한대사관에 드나들면서, 혹은 평양으로 가서 간첩교육을 받아 대남적화횔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2백 명 가까운 이들을 조사하여 34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하지만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이 1967년 6.8부정선거로 재선된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반전시키려고 정보부가 주도하여 만들어낸 조작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13) 이런 것은 ‘허구적 개체’(fictional entities) 개념과 비슷하다. 가령 유명하지 않은 어느 명민한 탐정을 ‘셜록 홈즈’라는 허구적 개체로 부름으로써 그를 표상하는 것과 같다.
(14) 안지영, 〈김지하의 역사의식과 '민중'의 의미 양상〉, 《한국학연구》 47(2017.11), 388쪽.
(15) 여러 민중신학자들이 그랬지만 특히 서남동과 안병무는 당시 가장 합이 잘 맞는 민중신학적 커플이었다. 그들이 제기한 신학적 어젠더는 누구에게서 유래한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서로 생각을 공유했고 비슷한 논조로 문제를 제기했다. 해서 세간에는 두 사람의 차이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실상 두 분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깊게 한 몸처럼 엮여 있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16) ‘작은언어들’이란 하위문화적 언어를 가리킨다. 가령 청소년들끼리 사용하는 은어들, 사회에 잘 통합되지 못한 가난한 청년들이 벽에 써대는 그래피티(Graffit), 종교인들의 방언, 무속인들의 언어, 가면극의 언어 등이 여기에 속한다.
(17) 지배언어에 속하지 않는 소리를 대표하는 것은 ‘한의 소리’ 같은 것이다.
(18) 몰트만, 〈안병무의 민중 메시야론과 문제점〉(전철의 신학동네. http://theology.co.kr/wwwb/CrazyWWWBoard.cgi?db=koreabank&mode=read&num=539&page=2&ftype=6&fval=&backdepth=1)
(19)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2006)에 수록된 나의 글 〈성서, ‘고전’ 혹은 ‘민중의 책’〉은 《민중신학 이야기》의 ‘성서’에 대한 관점이 그 이전과 이후 선생의 다른 관점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20) 그는 1965년 스트라스부르크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오클로스 공동체로서 〈마가복음〉을 해석하였고, 이 내용을 이듬해 수정 보완해서 일본어로 출판했다. 바로 이 책을 서남동이 한국에 소개했고 제자에 의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다가와 겐조(田川建三), 김명식 옮김, 《원시그리스도교 연구》(서울: 사계절,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