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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Der Mann blickte misstrauisch auf. "Wenn du die Wahrheit sprichst, sagte er dann, so verliere ich Nichts, wenn ich das Leben verliere. Ich bin nicht viel mehr als ein Thier, das man tanzen gelehrt hat, durch Schläge und schmale Bissen."
"Nicht doch, sprach Zarathustra; du hast aus der Gefahr deinen Beruf gemacht, daran ist Nichts zu verachten. Nun gehst du an deinem Beruf zu Grunde: dafür will ich dich mit meinen Händen begraben."
Als Zarathustra diess gesagt hatte, antwortete der Sterbende nicht mehr; aber er bewegte die Hand, wie als ob
er die Hand Zarathustra's zum Danke suche. -
그 사람은 의심스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대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내가 이 목숨을 잃더라도 잃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군요. 나는 인간에 의해 매질과 보잘 것 없는 음식으로 춤추는 것을 배운 한 마리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오.”
“그렇지 않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그대는 위험한 일을 그대의 직업으로 삼았고, 거기엔 경멸할 게 아무것도 없다. 이제 그대는 그대의 직업으로 인해 땅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그대를 내 손으로 묻어주겠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했을 때, 죽어 가는 사내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감사하기 위해서 차라투스트라의 손을 잡으려는 듯이 그의 손이 까딱거렸다. —
차라투스트라가 ‘그대의 영혼은 그대의 육신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하자, 이 사람은 의심스러워한다. 영혼이 육신보다 빨리 죽는 것을 이 광대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 광대의 말을 보면 그는 자기가 목숨(Leben)을 잃더라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목숨을 잃는 것은 이 육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인데, 육신이 죽기 전에 영혼이 더 빨리 죽어버렸다면 영혼을 잃을 것이 없다. 이 육신에는 생명 혹은 목숨이 붙어 있을 뿐이다. 이 목숨이 사라지면 그 뿐이지 영혼이 떠나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이 사람은 여태까지 영혼을 잃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영혼이 육신보다 결코 뛰어나지 않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이 광대는 그렇게 뛰어난 영혼이 자기에게는 이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조적으로 말하고 있다. 자기는 영혼이 없는 ‘한 마리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에 매를 맞아가면서 보잘 것 없는 음식을 얻기 위해서 줄 위에서 춤추는 것을 배워서 그것으로 연명해 왔으니 어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까보냐. 영혼 없는 한 마리 동물에 지나지 않으니, 지금 목숨마저 잃는다고 해도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런 식으로 자기를 경멸하고 있는 이 광대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 사람이 ‘소명’(Beruf)을 받고 그 직업(Beruf)에 충실한 일을 들어서 이 사람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사람은 동물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그 동물과 같은 삶으로 인해서 ‘땅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해준다. 땅으로 가야 초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 광대는 지금 땅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 초인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 여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영혼이 없는 동물과 같은 삶으로 영위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가 이 광대를 자기 손으로 묻어주겠다고 말한다. 광대를 묻어주는 것은 그를 확실히 ‘땅’으로 보내는 것. 완전한 하강을 이루고 대지로 돌아가 초인으로 나아가는 것. 그 일을 자기가 돕겠다고 자청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광대를 자기 손으로 묻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땅에 묻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이 일찍이 죽어버리고 없는 상태에서 목숨마저 없어져버린 육신이 땅 아래로 들어갈 때 땅으로부터 초인으로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땅이 곧 초인이 되기 때문이다.
7. Inzwischen kam der Abend, und der Markt barg sich in Dunkelheit: da verlief sich das Volk, denn selbst Neugierde und Schrecken werden müde. Zarathustra aber sass neben dem Todten auf der Erde und war in Gedanken
versunken: so vergass er die Zeit.
그러는 사이에 저녁이 되어 장터는 어둠에 싸였다. 이윽고 군중이 흩어졌다. 그들은 호기심과 놀람 자체도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땅 위에 누워 있는 죽은 사내의 옆에 꿇어앉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그는 시간을 잊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inzwischen)에 관해서는 읽기 76 참조.)
차라투스트라와 죽은 사내는 사이(inzwischen)로 들어간다. 죽은 사내는 ‘땅 위에’ 누워 있는데 확실히 초인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땅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아래로-감도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으니, 여기 ‘사이’는 극복되어야 할 인간의 현재를 뜻하는 것. 이 ‘사이’는 공간이기도 하고 시간이기도 한 것. 차라투스트라는 생각에 잠겨서 시간을 잊게 된다. 이 ‘사이’에 있으면서 ‘사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죽은 사내와 함께 이 ‘사이’를 벗어나고 있다. 시간 속에 있으면서 시간을 벗어나는 것. 죽은 사내이면서 죽지 않은 차라투스트라로서의 새로운 인간, 그것이 초인이라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이 사내를 묻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데, 이 사내를 묻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묻는 일이고 산맥에서 내려올 때 하고자 했던 아래로-감, 혹은 몰락은 이 죽은 사내를 땅에 묻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 사내를 묻는 것은 곧 차라투스트라 자신을 묻는 것.
시장의 군중들은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한때 호기심과 놀람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시들해졌다. 그리고 이들은 그 ‘사이’로 되돌아간다. 이 시장의 사람들은 어떻게 초인이 될 것인가. ‘사이’로 흩어진 이 시장의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Endlich aber wurde es Nacht, und ein kalter Wind blies über den Einsamen. Da erhob sich Zarathustra und sagte
zu seinem Herzen:
Wahrlich, einen schönen Fischfang that heute Zarathustra! Keinen Menschen fieng er, wohl aber einen Leichnam.
그러나 마침내 밤이 되자 그 홀로 있는 자 위로 찬바람이 불었다. 차라투스트라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오늘 멋진 고기잡이를 했구나! 사람은 하나도 낚지 못하고 송장을 하나 낚았으니.
차라투스트라를 일러 ‘홀로 있는 자’(Einsamen)라고 한다. 영혼이 아직 살아 있는 차라투스트라와 영혼이 죽은 광대의 시체가 함께 하고 있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이 영혼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죽음까지 맞이함으로 완전한 죽음에 이른 이 광대를 ‘송장’(Leichman)이라고 부른다. 홀로 있는 자 위로는 영혼과 같은 바람이 불고—영혼을 상징하는 바람이 부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그 아래에는 송장이 놓여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이 육신의 죽음을 땅에 묻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자기의 영혼을 아래로 가져가야 하는 입장에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일을 육신의 죽음을 땅에 묻음으로 시작하려 한다. 차라투스트라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부활로 가는 길이고, 이는 곧 초인으로 가는 길이므로 죽음은 너무나도 결정적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농담처럼 던지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가 ‘멋진 고기잡이’를 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해 준 말의 패러디가 아닌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그 유명한 말. 자기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는데 사람은 낚지 못하고 송장 하나만 낚았다는 것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는 완전 실패. 이것은 예수의 제자로서는 완전 실패했음을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서 그친다면 예수를 비웃는 데서 끝나고 말기 때문. 예수의 말을 살짝 비틀기도 하면서 자기는 예수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송장 하나 낚은 것은 정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멋진 고기잡이’를 했다는 말은 자조적인 말의 옷을 입은 진실의 말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을 때, 아래로-가기 혹은 몰락을 원하였던 것. 진짜 몰락은 죽음으로 가는 것인데 이제 땅 아래로 갈 수 있는 송장을 얻었으니 차라투스트라가 가는 길이 순조롭게 열리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차라투스트라의 인간적인 갈등. 차라투스트라의 내면 한쪽에서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연설을 하고 그 사람들이 감동하고 자기를 따르는 꿈을 꾸었을 법한데 그 일이 물 건너 가 버렸을 때 차라투스트라는 그것이 헛된 꿈인 줄 알면서도 약간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송장을 하나 얻는 결과가 나온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원래 가고자 했던 길로 가는 것이지만, 다른 길, 즉 사람들의 적극적인 환호 속에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초인을 설교하고 그들을 초인으로 이끌어가는 빛나는 지도자의 길과 같은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생각이 있었는데, 이제 그 길이 사라져 버린 것. 남는 것은 이 송장과 더불어 남은 하강 혹은 아래로-감 혹은 몰락으로 나아가는 것 뿐.
Unheimlich ist das menschliche Dasein und immer noch ohne Sinn: ein Possenreisser kann ihm zum Verhängniss werden.
인간적인 존재는 섬뜩하면서도 무의미한 것이다. 한 명의 익살꾼조차도 인가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다.
거기에(da) 있는(sein) 인간적인(menschliche) 존재는 자기의 온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비밀스러운(heimlich) 존재가 아니다(un). 이것은 나쁜-운명(Verhängniss)의 장난(Possen)이다. 사람은 누구든 세상에 자기의 온 모습을 다 드러내고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의미(Sinn)가 없다(ohne). 인간에게 있어서의 의미는 비밀스러운(heimlich) 것인데, 비밀스러운 존재가 아니니까 의미는 없고 그저 장난만을 일삼는 익살꾼이 판치고 있을 뿐이다. 이 나쁜-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으니 익살꾼인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 곧 재앙(Verhängniss)이 되는 것이다.
줄타기 광대를 줄에서 떨어뜨린 이 익살꾼은 사실은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재앙이 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 이들에게 ‘의미’가 없을 때에 이들은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짓밟고 떨어뜨리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재앙이 되고 있다. 이 무의미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차라투스트라는 무의미에 있는 인간들에게 ‘의미’를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그 의미는 곧 초인이라는 것.
Ich will die Menschen den Sinn ihres Seins lehren: welcher ist der Übermensch, der Blitz aus der dunklen Wolke Mensch.
나는 인간들에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싶다. 그 의미란 바로 초인이다. 어두운 구름,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번개이다.
앞에서 비밀스러운 것이 없는 인간은 무의미하고, 그 무의미한 인간이란, 이 세상에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했다. 더 이상 캐물을 여지가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의미가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의미가 아니고 그저 현상에 불과한 것이니까.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비밀스러운 것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캐묻는 과정이 있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까. 인간 존재가 현상이 아니라 의미이기 위해서는 비밀스러움이 있어야 한다. 이 비밀스러움은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에게 존재의 의미가 다름 아닌 ‘초인’이라고 말한다. 이 초인은 어두운 구름(dunklen Wolke)으로부터 나오는 번개인데, 인간이 이 어두운 구름과 같은 존재가 될 때에 인간은 의미를 가지게 되고 그가 곧 초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 같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어두운 구름과 같이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존재, 거기에서부터 번개가 나오는데 그가 바로 초인이라는 것.
Aber noch bin ich ihnen ferne, und mein Sinn redet nicht zu ihren Sinnen. Eine Mitte bin ich noch den Menschen zwischen einem Narren und einem Leichnam.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나의 뜻은 그들의 마음에까지 말하지 못한다. 나는 인간들에게 아직은 바보와 시체의 중간자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산맥에서 숲을 거쳐 시장으로 내려와서 인간 세계의 한 가운데로 내려왔는데 아직도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의 마음이 인간들의 마음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 거리는 실재의 거리가 아니고 심리상의 거리가 아닌가. 차라투스트라가 아직 인간과 같아지지 못하였다는 것. 인간과 같아지고 인간과 같이 땅 아래로 들어갈 때에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으로서 초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직 거리가 있으니 차라투스트라도 인간들도 초인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는 것. 이 거리는 또한 시간의 간격이기도 한 것이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인간들에게 ‘바보와 시체의 중간자’라고 한다. 차라투스트라 자신의 죽음에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철저하게 바보가 되지도 못하고 있다. 바보와 시체의 중간자는 절대로 초인에 이르지 못하는 것.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 중간자는 광대보다도 못한 존재.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바보가 되어야 할까, 시체가 되어야 할까. <바보이자 시체>가 그 답이 아닐까. 인간들과 같은 바보가 되어 죽음에 이르고 시체가 된 상태, 그 상태가 될 때 초인으로의 길이 보이는 것. 그리고 인간들의 마음에도 어필할(reden) 수 있을 것.
Dunkel ist die Nacht, dunkel sind die Wege Zarathustra's. Komm, du kalter und steifer Gefährte! Ich trage dich dorthin, wo ich dich mit meinen Händen begrabe.
밤은 어둡고 차라투스트라의 길들도 어둡다. 가자, 그대 차갑고 뻣뻣한 동행자여! 내 손으로 그대를 묻어 줄 그곳까지 그대를 메고 가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을 넘어서 있었지만 다시 시간 속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자 온통 어둠으로 가득하다. 밤이 어둡고 그가 가는 길들도 어둡다. 밤이 어둡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는 것은 이전에 시간을 넘어서 있을 때에는 밤이 어둡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 속에서는 밤은 당연히 어둠 속에 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 가운데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형국. 차라투스트라는 이 어둠 속에서 길을 떠나려 한다. 그의 동행자는 ‘차갑고 뻣뻣한’ 송장. 이 송장을 묻어 줄 그곳까지 차라투스트라는 이 송장을 메고 가리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땅-아래로 가기 위해서 내려왔으므로 차라투스트라의 가는 길도 땅 아래, 이 송장이 가는 길도 땅 아래. 차라투스트라와 송장이 일체가 되어 묻히고 초인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자기가 달려 죽게 될 십자가를 메고 가듯이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가 함께 묻히게 될 송장을 메고 간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부활하고 차라투스트라는 땅에 송장과 함께 내려감으로 초인이 될 것이다.
8. Als Zarathustra diess zu seinem Herzen gesagt hatte, lud er den Leichnam auf seinem Rücken und machte sich auf den Weg. Und noch nicht war er hundert Schritte gegangen, da schlich ein Mensch an ihn heran und flüsterte ihm in's Ohr - und siehe! Der, welcher redete, war der Possenreisser vom Thurme. "Geh weg von dieser Stadt, oh Zarathustra, sprach er;
8.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말하고 나서, 등에 그 송장을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채 백 걸음도 가지 않았을 때, 어떤 사람이 슬그머니 다가와서 그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런데 보라! 말을 건 자는 아까 탑에서 나왔던 그 익살꾼이었다.
“이 도시에서 떠나라,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가 말했다.
송장을 짊어지고 가니 힘이 들 수밖에. 백 걸음도 가지 않았을 때 어떤 사람이 다가오고 있다. 힘이 들어서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에 익살꾼이 다가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모종의 유혹이 아닐까. 익살꾼은 은밀하게 다가오고 있다. 앞에서 처음 나왔을 때에는 그냥 ‘익살꾼’이 아니라 ‘익살꾼 같은 사내’였는데 지금은 ‘익살꾼’이 되어 있다. 가짜가 진짜가 되어 있는 것. 사이비가 진짜 노릇을 하는 곳이 된 것. 이 사이비인 가짜는 차라투스트라에게 다가와서 가짜가 진짜 노릇을 하는 이 도시를 떠나라고 속삭인다. 이 도시를 떠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이 도시에 머무르면서 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초인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 도시를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광대는 죽음으로 몰아 넣었고 진짜 깨어 있는 자인 차라투스트라마저 이 도시에서 내쫓아야 사이비와 가짜가 마음 놓고 활보할 수 있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를 몰아내려 한다.
es hassen dich hier zu Viele. Es hassen dich die Guten und Gerechten und sie nennen dich ihren Feind und Verächter; es hassen dich die Gläubigen des rechten Glaubens, und sie nennen dich die Gefahr der Menge.
여기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대를 미워한다. 선하고 의로운 자들은 그대를 미워하고, 그대를 자기들의 적이며 경멸하는 자라고 부른다. 올바른 신앙을 믿는 사람들도 그대를 미워하면서, 그대를 군중에게 위험한 자라고 부르고 있다.
시장이 있는 이 도시에는 차라투스트라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한다. 이 사이비 익살꾼의 말은 진실일까. 이자의 말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진짜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가짜이니까. 자기가 가짜라는 것을 밝혀낼 가능성이 있는 차라투스트라를 이 도시에서 내쫓아야 가짜이면서 진짜처럼 행세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렇게 행하고 있다. 시장에 모였다가 흩어졌던 그 얼빠진 군중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미워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올바른 신앙을 믿는 사람들’도 차라투스트라를 미워한다고 말한다. 이 사이비 익살꾼에게 시장에 모였다가 흩어진 군중은 염려가 되지 않으므로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 군중은 자기 재주로 얼마든지 속여 넘길 수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에게 그 군중이 미워한다는 말은 하지도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사이비 익살꾼이 말하는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나 ‘올바른 신앙을 믿는 사람들’보다는 시장에 모였던 그 군중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초인의 씨앗을 보고 있었음을 사이비 익살꾼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가 차라투스트라의 마음과 관심을 알았다면 그 군중이 차라투스트라를 미워하고 있다고 말을 했을까? 이 사이비 익살꾼은 말하자면 헛다리를 짚은 것인데, 그러므로, 군중은 이 사이비 익살꾼과 같은 가짜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게 된다. 그래서 초인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Dein Glück war es, dass man über dich lachte: und wahrlich, du redetest gleich einem Possenreisser. Dein Glück war es, dass du dich dem todten Hunde geselltest; als du dich so erniedrigtest, hast du dich selber für heute errettet. Geh aber fort aus dieser Stadt - oder morgen springe ich über dich hinweg, ein Lebendiger über einen Todten." Und als er diess gesagt hatte, verschwand der Mensch; Zarathustra aber gieng weiter durch die dunklen Gassen.
사람들이 그대를 비웃은 것은 차라리 그대에게 행운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대는 마치 익살꾼처럼 말을 했다. 그대가 저 죽은 개와 한패가 된 것도 오히려 그대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대가 그렇게 몸을 낮춤으로써 오늘 하루 동안 그대 목숨을 구했으니까. 그러나 이 도시에서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내일은 내가 그대를, 곧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 위를 뛰어 넘을 것이다.” 그 사내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어두운 골목길을 계속해서 걸어갔다.
이 사이비 익살꾼이 말하는 ‘행운’(Glück)은 역설적이다. ‘차라리 행운이었다’는 말 속에 역설을 담고 있고, 이 역설은 또 다른 역설로 향하고 있다.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었고 줄타기 광대는 자기에게 하는 말인 줄로 알고 줄타기 묘기를 시작했고 줄타기 광대는 떨어져서 죽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지 않았으면 사람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는데 사람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음으로 해서 결국 차라투스트라가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까 ‘행운’이라는 것이다. 목숨을 건졌으니 행운이라는 것인데 군중들에게 초인을 알려주고자 하던 차라투스트라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니 행운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 줄타기 광대와 한패가 됨으로써 아래로-감 혹은 몰락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게 되었으니 진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이비 익살꾼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행운이 아니다. 어쨌든지 저 사이비 익살꾼은 차라투스트라를 조롱하느라고 행운을 들먹거렸지만 결국은 차라투스트라의 진짜 행운을 말하고 있는 셈이 된 것이다. 거짓된 자의 입으로 진실이 이야기되고 있으니 역설적인 것이다.
이 사이비 익살꾼은 자기가 가짜이면서 자기는 진짜 익살꾼이고 차라투스트라를 사이비 익살꾼으로 말하고 있다(gleich einem Possenreisser). 이 가짜 익살꾼은 죽은 자와 같은데 오히려 차라투스트라를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 도시는 이제 이 사이비 익살꾼과 같은 가짜와 사이비가 지배하는 곳이 되고 진짜와 진실은 추방당하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살아 있는 가짜가 진짜를 타 넘어가겠다고 위협해마지 않고 있다. 이 위협은 당치 않은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감내하지 않을 수 없는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 이 고통이 가짜라면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꿈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고, 초인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실현체가 될 수 밖에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큰 고통을 느낀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의 고통의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어두운 골목길을 가짜의 위협에 짓눌려서 죽은 자처럼 무력하게 걸어갈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이 세상에 사는 진짜의 현실이고 이 길이 곧 초인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Am Thore der Stadt begegneten ihm die Todtengräber: sie leuchteten ihm mit der Fackel in's Gesicht, erkannten
Zarathustra und spotteten sehr über ihn.
그 도시의 성문 앞에서 무덤 파는 사람들이 그와 마주쳤다. 그들은 횃불로 그의 얼굴을 비춰보더니, 그가 차라투스트라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그를 비웃었다.
성을 떠나라고 하는 사이비 익살꾼의 경고를 듣고 차라투스트라는 성 밖으로 가기 위해서 성문에 이르게 된다. 성문 앞에서 만난 사람들은 ‘무덤 파는 사람들’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만났다; 말하자면, 주체가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이 무덤 파는 자들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만남을 당하는 입장에 선다. 차라투스트라가 시체를 짊어지고 무덤 파는 자들을 찾아간 것도 아니고, 그들을 찾으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시체를 자기가 안장해 주려고 결심한 상태. 이 무덤 파는 자들을 우연히 만난 것인데, 하필이면 이 성의 안과 밖의 경계 지점에서 무덤 파는 자들을 만난 것일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무덤 파는 자들이 차라투스트라의 얼굴에 횃불을 비춰보면서 관심을 보인다. 차라투스트라를 알아보고는 비웃고 있다. 이 사람들은 직업이 무덤 파는 일을 하는 것이므로 차라투스트라의 시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 성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무덤 파는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이 성은 무덤 파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차라투스트라가 이 줄타기 광대의 시체를 묻어주려 하고 있으므로 차라투스트라도 역시 무덤 파는 사람이 된 것. 이 성의 사람들도 무덤 파는 자들이고 차라투스트라도 무덤 파는 자이다. 이 성의 사람들과 차라투스트라가 똑같이 무덤 파는 자들이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것.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묻기 위해서 무덤을 파는 자이고, 이 성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묻기 위해서 무덤을 파는 자라는 것.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의 길로 가고 있는 것. 이 성의 사람들도 역시 초인의 길로 이끌어야 하는데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이 성의 사람들이 어떻게 초인이 될 수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있으므로 이들도 역시 초인에 이르게 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무덤 파는 자로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와 이 성의 사람들은 정반대의 방향에서, 극과 극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일까.
"Zarathustra trägt den todten Hund davon: brav, dass Zarathustra zum Todtengräber wurde! Denn unsere Hände sind zu reinlich für diesen Braten. Will Zarathustra wohl dem Teufel seinen Bissen stehlen? Nun wohlan! Und gut Glück zur Mahlzeit! Wenn nur nicht der Teufel ein besserer Dieb ist, als Zarathustra! - er stiehlt die Beide, er frisst sie Beide!" Und sie lachten mit einander und steckten die Köpfe zusammen.
“차라투스트라가 죽은 개를 짊어지고 가는구나. 잘 됐군. 차라투스트라가 무덤 파는 사람이 되었다니! 이런 고기를 만지기엔 우리의 손은 너무 깨끗하니까 말이야. 차라투스트라가 악마에게서 그 먹이를 빼앗으려는 건가? 이제 좋다. 식사에 행운이 있기를! 악마가 차라투스트라보다 더 교활한 도둑놈이 아니기만 하다면 말이야!—악마는 그대들 둘 다 훔쳐다가 둘 다 먹어치울 거야!”
무덤 파는 자들은 사람의 무덤을 파는 자들이므로 ‘죽은 개’를 위해서는 무덤을 파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자기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이들이 사람들 가운데에는 가장 비천한 자들일 텐데, 차라투스트라가 자기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표나게 내세우며 마음껏 비웃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차라투스트라를 이미 알고 있고 죽은 줄타기 광대도 알고 있다. 이들도 역시 시장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연설을 들었기 때문이다. 줄타기 광대는 이들보다 더 못한 자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차라투스트라가 무덤 파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놀린다. 이들의 자기 비하를 조금 볼 수 있는 대목. 이들은 왜 차라투스트라를 이렇게 놀리는 것일까. 차라투스트라의 연설을 들은 군중과 같은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로부터 비천하게 여겨지는 일을 하고 있는 자들로서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시장의 사람들보다 더 차라투스트라의 연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즉, 이들에게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전혀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시장 사람들보다 더 비웃고 있다. 이 무덤 파는 자들도 역시 초인에 이를 수 있을까.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무덤 파는 자들은 줄타기 광대의 시체를 ‘죽은 개’라고 했다가 ‘고기’(Braten)라고 칭한다. 이것은 살덩어리로서의 고기(Fleisch)가 아니라 ‘구운 고기’를 뜻하는 말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이 죽은 자의 시체를 음식 삼아서 먹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 먹이를 악마에게서 빼앗으려고 하는 것인가 하고 놀리면서 말한다. 이들의 말에 의하면, 차라투스트라는 악마에게서 이 사람의 시체를 뺏어서 먹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먹는다는 말은 말 그대로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가로챈다는 의미 정도가 아닐까. 악마가 먹어야 할 것을 차라투스트라가 먹으려 하고 있다는 것, 악마의 것을 가로채서 가지려고 한다는 것. 이것은 무슨 뜻인가. 차라투스트라가 완전히 광인이 되어서 시체를 먹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악마나 하는 짓이지 사람이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 차라투스트라를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나마도 차라투스트라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의 것을 빼앗아서 먹으려고 하다가는 악마에게 둘 다 먹히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악마의 것을 훔쳤다고 했다가 악마가 차라투스트라와 그가 가진 것을 훔쳐다가 먹어치울 것이라고 한다. 악마와 같은 짓을 하려고 하지만 악마에게 제지를 당하고 결국은 악마에게 잡혀서 소멸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그 시체가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마는 것이니까, 소멸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사라짐을 말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이 죽은 줄광대는 그 시체가 땅에 묻히지도 못한 채 잡아먹힘으로써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완전한 사라짐이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의 말에 대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저러한 완전한 소멸만이 완전한 초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한 소멸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Zarathustra sagte dazu kein Wort und gieng seines Weges. Als er zwei Stunden gegangen war, an Wäldern und
Sümpfen vorbei, da hatte er zu viel das hungrige Geheul der Wölfe gehört, und ihm selber kam der Hunger. So
blieb er an einem einsamen Hause stehn, in dem ein Licht brannte.
Der Hunger überfällt mich, sagte Zarathustra, wie ein Räuber. In Wäldern und Sümpfen überfällt mich mein
Hunger und in tiefer Nacht.
Wunderliche Launen hat mein Hunger. Oft kommt er mir erst nach der Mahlzeit, und heute kam er den ganzen
Tag nicht: wo weilte er doch?
차라투스트라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숲과 늪이 있는 곳을 지나쳐 두 시간 가량 걸었을 때, 굶주린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여러 번 들려왔고, 그 자신도 배가 고파졌다. 그리하여 그는 불빛이 새어나오는 어느 외딴 집 앞에 멈춰 섰다.
굶주림이 도둑처럼 나를 엄습하는구나. 차라투스라는 말했다. 숲과 늪 가운데서 허기가 몰려오는구나. 그것도 깊은 밤에.
나의 배고픔은 이상한 변덕을 지니고 있다. 흔히 나의 배고픔은 식사 시간이 지난 후에야 찾아오는데, 오늘은 종일 배가 고프지 않았으니. 대체 나의 배고픔은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인가?
무덤 파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차라투스트라는 ‘숲(Wald)과 늪(Sumpf)’을 지나가고 있다. 앞으로 그는 ‘깊은 숲속’(tiefer Wald)에 이르게 되고 거기에서 자기의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깨닫고 아래로-가기 시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고향의 호수와 산을 떠나서 산맥 속에 있다가 내려오기 시작해서 ‘숲속’에서 성자를 만나고 도시에 이르렀고 이제 다시 그 도시를 떠나 숲속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깊은 숲에 이르기 전에 ‘숲과 늪’을 지난다. 숲은 성자가 살던 곳과 같은 환경인데, 그 숲에 이르기 전에는 ‘숲’과 더불어 ‘늪’이 있다. ‘숲과 늪’은 깨달음이 있는 ‘깊은 숲’에 이르기 전에 거치는 중간 과정과 같은 것인데,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유혹을 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굶주린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있고, 차라투스트라도 배고픔을 느끼고 있다. 또한 밤이다. 빠져버릴 수도 있는 늪과 잡아먹힐 수도 있는 늑대와 굶어죽을 수도 있는 굶주림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밤이 있는 곳을 통과해서 깨달음의 깊은 숲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과정은 예수가 자기의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짐승들이 있는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일과 대비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시험의 지대를 통과해서 깊은 숲에 이르고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어 아래로-가게 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배고픔을 느끼면서 그 배고픔이 이상한 변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밤’에 여기 ‘숲과 늪’에 이르러서 배가 고파져서 ‘외딴 집 앞에 멈춰’서게 된다. 이 외딴 집에 사는 노인에게 음식을 얻어 먹고 길을 계속해서 가서 ‘깊은 숲’에 이르게 된다.
Und damit schlug Zarathustra an das Thor des Hauses. Ein alter Mann erschien; er trug das Licht und fragte: "Wer kommt zu mir und zu meinem schlimmen Schlafe?“
그렇게 말하고 나서 차라투스트라는 그 집의 문을 두드렸다. 한 노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손에 등불을 들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누가 나를 찾아와 내 편찮은 잠을 깨우는 거요?”
‘그 집’은 숲속에 있고 그 집에는 ‘한 노인’(ein alter Mann)이 살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산 위에서 내려오면서 산과 도시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는 숲속에서 만난 사람도 한 노인(ein Greis)이었다. 두 노인 모두 은둔하고 있다는 면에서 같은 상태에 있다. 먼저 만난 그 노인은 성자였고 도시로 내려가는 차라투스트라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자기처럼 숲속에 사는 것이 좋다고 말했었다. 여기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에게 먹을 것을 줌으로써 차라투스트라가 도시로 갈 수 있는 힘을 나게 해주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도시로 가기 전에 숲을 지나고 있다. 앞에서 숲속에 이르렀을 때에는 차라투스트라는 힘이 넘치고 있었고 지금은 허기가 진 상태에 있다. 앞의 숲속에서는 차라투스트라가 힘이 빠지게 만들었고, 여기서는 힘을 내게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숲과 노인이 세상으로 가는 중에 지나는 곳인데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숲은 다시 산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곳이면서 도시로 갈 수도 있는 중간지대인 것이다. 숲은 갈등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도시로 가지 말고 이 숲속에서 은둔하면서 쉬라고 유혹하는 곳이기도 하고, 산보다 도시에 가깝이 있기 때문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도시라고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노인’이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나이가 들고(alt) 머리가 센(greis) 노인은 도시로 나가는 것을 망설이게 하면서 또한 도시로 나가는 것을 부추기기도 한다.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으니 이 숲에서 편안히 쉬라고 발걸음을 잡기도 하고 노인의 아량으로 먹을 것을 주고 계속해서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을 주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숲속에 있는 집의 문을 두드렸을 때 한 노인이 나왔는데 그 노인은 등불을 들고 있다. 밤의 한가운데 있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어떤 빛을 비추어주고 있음이 아닌가. 이 노인은 ‘편찮은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 노인의 불편함은 앞에 나왔던 성자 노인의 편안함과 대조가 되고 있다. 앞에 나온 노인은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편안함을 누리고 있었고 이 노인은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오는 바람에 편치 않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 노인은 차라투스트라가 세상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예시해주고 있지 않은가: 자기의 잠을 설치면서 빛을 비추고 먹을 것을 주어서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
"Ein Lebendiger und ein Todter, sagte Zarathustra. Gebt mir zu essen und zu trinken, ich vergass es am Tage.
Der, welcher den Hungrigen speiset, erquickt seine eigene Seele: so spricht die Weisheit."
Der Alte gieng fort, kam aber gleich zurück und bot Zarathustra Brod und Wein. "Eine böse Gegend ist's für
Hungernde, sagte er; darum wohne ich hier. Thier und Mensch kommen zu mir, dem Einsiedler. Aber heisse auch deinen Gefährten essen und trinken, er ist müder als du." Zarathustra antwortete: "Todt ist mein Gefährte, ich
werde ihn schwerlich dazu überreden." "Das geht mich Nichts an, sagte der Alte mürrisch; wer an meinem Hause anklopft, muss auch nehmen, was ich ihm biete. Esst und gehabt euch wohl!" -
“한 명의 산 사람과 한 명의 죽은 사람이요.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좀 주시오. 온종일 그것을 잊고 지냈소.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생기 나게 한다고 현자들은 말하지요.”
노인은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나와 차라투스트라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었다. “굶주린 자에게는 이 근처는 좋지 않은 곳이오. 그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살고 있다오. 동물들과 사람들이 홀로 은둔하고 있는 나를 찾아오지요. 그런데 그대 동료에게도 먹고 마시라고 하시오. 그는 그대보다 더 지쳐 있구려.”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내 길동무는 죽었소. 그러니 그에게 먹고 마시라고 권하기는 어렵지요.”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 집 문을 두드린 사람은 내가 주는 것을 받아야만 하오. 먹고서 잘들 가시오!”
차라투스트라는 ‘한 명의 산 사람과 한 명의 죽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노인은 그 줄광대의 시체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 이 노인이 하는 말은 ‘Das geht mich Nichts an.’인데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요’ 라는 뜻이지만 여기에서 Nichts, 즉 무(無)가 나오는 것은 상당히 의도적이다. Nichts, 즉 무의 상태에서는 삶과 죽음을 넘어서 있다는 것. 이 Nichts의 상태를 거쳐서 초인으로 나아가는 것.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무의 상태, Nichts의 상태를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이 노인이 사는 곳은 숲속이고, 이 숲속을 떠나서 도시로 가는데 거기에 초인의 길이 있다는 것. 거기에 이 무의 상태를 벗어나는 길이 있다는 것. 그 전에 거쳐야 하는 경계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사라지는 것, 혹은 사라지는 곳. 이 노인은 차라투스트라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진정한 현자(Weisheit) 혹은 ‘지혜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지혜는 죽음과 삶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 이 노인이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차라투스트라와 시체가 사실은 하나라는 것인데, 거기에 이르게 되면 초인이 되는 것. 이 노인의 역할은 자기 집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음식을 주는 것이고 그 문을 두드린 자는 그 음식을 받아 먹어야만 한다(muss nehmen)고 말한다. 이 노인이 주는 빵과 포도주는 Nichts라는 것. 이것은 예수가 성찬식을 제정하면서 제자들에게 준 빵과 포도주와 대비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살과 피를 주었고 그것은 곧 생명을 주는 것이었는데, 이 노인은 Nichts를 주는 것으로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