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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싱가살라 짧은 경(M31. Cūḷagosiṅgasuttaṃ)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나디까2)의 벽돌집3)에 머무셨다.
2. 그때 아누룻다 존자4)와 난디야 존자5)와 낌빌라 존자6)는 고싱가살라 숲의 동산에 머물렀다.
3 그때 세존께서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7)에서 일어나셔서 고싱가살라 숲의 동산8)으로 가셨다. 그때 동산지기가 세존께서 멀리서 오시는 것을 보고 세존께 말씀드렸다.9)
"사문이여, 이 동산에 들어오지 마십시오. 여기는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10) 세 분의 선남자들이 머물고 계십니다. 그분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4. 마침 아누룻다 존자는 동산지기가 세존과 더불어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듣고서는 동산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동산지기여, 세존을 막지 말게. 우리의 스승이신 세존께서 오신 것이네."
그리고 나서 아누룻다 존자는 난디야 존자와 낌빌라 존자에게 가서 말했다.
"존자들이여, 나오십시오. 존자들이여, 나오십시오. 우리의 스승 세존께서 [206] 오셨습니다."
5. 아누룻다 존자와 난디야 존자와 낌빌라 존자는 세존을 영접하고는 한 사람은 세존의 발우와 가사를 받아들고 한 사람은 자리를 준비하고 한 사람은 발 씻을 물을 가져 왔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시고 발을 씻으셨다. 세 존자들은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세존께서는 한 곁에 앉은 아누룻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 다.
"아누룻다들이여,11) 그대들은 견딜만한가? 잘 지내는가? 탁발하는 데 어려움은 없는가?"
"저희들은 견딜만합니다, 세존이시여, 잘 지냅니다, 세존이시여. 탁발하는 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주석
2) 『디가 니까야』 제2권 「대반열반경」(D16) §2.5와 §2.11에 의하면 나디까(Nādika)는 꼬띠가마와 웨살리를 연결하는 대로변에 위치한 왓지(Vajjī)족의 마을이다. 본경(M31)과 다음 경(M32) 등을 통해서 보면 이 나디까의 고싱가살라 숲은 여러 유명한 장로들이 즐겨 수행하던 곳이었다. 그런 만큼 이 지역 사람들도 불교와 큰 인연이 있었으며 『디가 니까야』 제2권 「대반열반경」(D16) §2.7과 「자나와사바 경」(D18)과 『상윳따 니까야』 제6권 「벽돌집 경」3(S55:10)을 통해서 보듯이 과위를 증득한 신도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일찍부터 이 지명에 대해서는 나디까(Nādika)로도 전승되었고, 냐띠까(Nātika)로도 전승되어 온 듯하다. 주석서들에서 각각 다른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냐띠까는 친척(ñāti)들끼리 사는 마을로 설명되고(SA.iii.281), 나디까는 강(nadī)과 연관이 있는 이름으로 간주된다. 현재 인도 비하르주의 웨살리와 빠뜨나 사이의 강가(Gaṅgā) 강에 있는 나따까(Nātaka)라는 마을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디가 니까야』와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대부분 나디까로 통일해서 옮겼고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냐띠까로 통일해서 옮겼다.
3) '벽돌집'은 giñjakāvasatha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는 "벽돌(iṭṭhakā)로 만든 큰 강당(mahā-pāsāda)"(MA.ii.235; SA.ii.75)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4) 아누룻다 존자(āyasmā Anuruddha)에 대해서는 본서 「고싱가살라 긴 경」(M32)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5) 본서 「날라까빠나 경」(M68) §2에 의하면 난디야 존자(āyasmā Nandiya)는 아누룻다 존자, 낌빌라 존자, 바구 존자, 꾼다다나 존자, 레와따 존자, 아난다 존자와 다른 잘 알려진 사꺄족(석가족)의 좋은 가문의 아들들과 함께 출가하였다. 『율장』과 주석서 문헌에서는 성도 후에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신 부처님을 따라서 사꺄의 아누삐야(Anupiya)에서 아누룻다 존자(āyasmā Anuruddha), 아난다(Ananda), 바구(Bhagu), 낌빌라(Kimbila), 데와닷따(Devadatta) 같은 왕자와 이발사 우빨리(Upāli)를 비롯한 많은 사꺄의 청년들과 함께 출가하였다고 나타난다.(Vin.ii.180; AA.i.108; DhpA.i.133;iv.127)
이처럼 그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의 사꺄족의 왕족 출신이라고 하며, 그가 난디야로 불리게 된 것은 그의 출생이 그의 가문에 큰 기쁨(nanda)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출가하여 곧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ThegA.i.86)
초기불전에는 세 명의 난디야가 나타난다. 『상윳따 니까야』 제6권 「난디야 경」(S55.40)과 『앙굿따라 니까야』 제6권 「난디야 경」(A11:14)에 나타나는 삭까 사람 난디야(Nandiya Sakka)와, 아누룻다(Anuruddha) 존자와 낌빌라(Kinbila) 존자와 함께 본 경(M31) 등에서 언급되는 난디야 존자(āyasmā Nandiya)와, 『상윳따 니까야』 제5권 「난디야 경」(S45:10)의 난디야 유행승(Nandiya paribbājaka)이다.
6) 낌빌라 존자(āyasmā Kimbila)는 난디야 존자 등과 함께 출가한 사꺄족 왕자 출신이다.(위의 주해 참조) 그는 본 경과 다음 경과 「날라까빠나 경」(M68)과 본서 제4권 「오염원 경」(M128) §8에서 아누룻다 존자와 난디야 존자 등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낌빌라 존자는 강가(Gaṅga) 강 언덕에 있는 낌빌라 도시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낌빌라 존자(āyasmā Kimbila/Kimila)와는 다르다.(DPPN)
낌빌라의 대나무 숲과 함께 언급되는 「낌빌라 경」(A5:201) 등 『앙굿따라 니까야』의 몇몇 경에 나타나는 낌빌라 존자는 낌빌라 도시의 상인의 아들인 낌빌라 존자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예를 들면 본경, M32, M68, M128)는 사꺄족 출신의 낌빌라 존자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DPPN은 이 두 사람을 하나의 표제어 안에서 함께 설명하고 있다.
7) '홀로 앉음(paṭisallāna)'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지워 없앰 경」(M8)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8) 문자적으로 '고싱가(go-siṅga)'는 소(go)의 뿔(siṅga, Sk. śṛnga)을 뜻한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싱가살라 숲(Gosiṅgasāla vana)'이라 하였다. 이 숲에는 아주 오래된 나무 한 그루(eka jeṭṭhaka-rukkha)가 있었는데 이 나무의 몸통(khandha)에서부터 소의 뿔과 같은 모습(go-siṅga-saṇṭhāna)을 한 가지(viṭa-pa)가 뻗어 나와 있었다. 그래서 이 나무 때문에 이 숲 전체가 고싱가살라(소뿔 모양을 한 살라 나무) 숲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M.ii.235)
9) 이하 본 경의 §§3~9는 본서 제4권 「오염원 경」(M128)의 §§8~14와 같은 내용이다. 「오염원 경」(M128) §§1~7에 의하면 꼬삼비에서는 비구들이 분쟁이 생겼는데 그들이 중재하려는 세존의 말씀도 듣지 않게 되자 세존께서는 발라깔로나까라 마을로 가셨다. 그 무렵 바구 존자(āyasmā Bhagu)는 발라깔로나까라 마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에게 설법하시어 그를 기쁘게 하신 뒤에 세존께서는 동쪽 대나무 동산으로 가시어 그 경의 §§8~14의 일화가 진행되는데 이 §§8~14가 본 경 §§3~9와 같다.
바구 존자(āyasmā Bhagu)에 대해서는 본서 「날라까빠나 경」(M68) §2의 주해를 참조할 것.
10)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은 atta-kāma-rūpā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자기의 이익을 원하는 것을 본성으로 하여 머문다(attano hitam kāma-yamāna-sabhāvā hutvā viharanti)."(MA.ii.236)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주석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자는 이 교단에 출가했지만, 의료 행위를 한다거나 사자(使者)의 행위를 하거나 심부름꾼으로 나서는 등 21가지 삿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jīvikaṁ kappeti), 이런 자는 이 교단에 출가하여 21가지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anesanā, 삿된 생계수단)을 버리고 네 가지 청정한 계(catu-pārisuddhisīla)에 서서 부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적합한 두타행(sappāya-dhutaṅga)을 결심하고 38가지 대상 가운데서 자기에게 맞는 명상주제를 가지고 마을을 버리고 숲속에 들어가서 증득[等至, samāpatti, 초선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본 삼매]을 일으켜서 위빳사나를 통하여 [사문의] 일(kamma)을 하면서 머무는데, 이러한 자를 자기의 이익을 원하면서 머무는 자라 한다."(MA.ii.236)
『쿳다까빳타 주석서』(khpA.236~237)에 의하면 21가지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대나무를 줌(veḷudāna), 향기로운 잎을 줌((pattadāna), 꽃을 줌(pupphadāna), 과일을 줌(phaladāna), 치목을 줌(dantakaṭṭhadāna), 세숫물을 줌(mukhodakadāna), 목욕한 뒤 바르는 분가루를 줌(sinānaāna), 목욕가루를 줌(cuṇṇadāna), 진흙을 줌(mattikādāna), 아첨(cāṭukamyata), 반쯤만 사실인 이야기를 함(muggasūpyata), 다른 사람의 아이를 귀여워함(pūribhaṭayata), 심부름을 감(jaṅghapesanika), 약을 제조하는 기술(vejjakamma), 전령의 일을 함(dūtakamma), 심부름꾼이 됨(pahiṇagamana), 탁발음식을 주고받음(piṇḍapaṭipiṇḍa), 보시를 권장함(dānānuppadāna), 집터 보기(vatthuvijja), 별자리 보기(nakkhattavijja), 수상(手相) 보기(aṅgavijja)"(KhpA.236!237)
이 가운데 앞의 10가지 정도는 『청정도론』I.44에서 언급되어 나타나고 몇몇은 『디가 니까야』 제1권 「범망경」(D1) §1.21 등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네 가지 청정한 계는 본서 제1권 「역마차 교대 경」(M24) §2의 주해를, 38가지 명상주제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지워 없앰 경」(M8) §18의 주해를 참조할 것.
11) '아누룻다들이여'는 Anuruddhā(복수 호격)를 옮긴 것이다. 단수 Anuruddha가 아니라 복수 Anuruddhā로 나타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복주서는 이런 방법을 '하나와 나머지의 방법(eka-sesa-naya)'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하나를 지칭하여 나머지 전체를 다 포함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아누룻다 존자 한 사람만을 복수로 지칭하여 난디야 존자와 낌비라 존자를 다 포함시켜 부르는 방법을 뜻한다. 이런 어법은 본서 「 날라까빠나 경」(M68) §4 이하와 본서 제4권 「오염원 경」(M128) §11 이하에도 나타난다. 복주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아누룻다들이여'[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은] 하나와 나머지의 방법(eka- sesa-naya)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하나의 부분이 유사한 나머지 전체를 다 포함하는 방법(virūp-eka-sesa, Vis.XVII.197 참조)을 말한다. 그래서 복수의 형태(bahu-vacana- niddesa)로 말씀하시는 것이다."(MAṬ.ii.170)
6.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사이좋게 화합하고 정중하고 다투지 않고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이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머무는가?"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사이좋게 화합하여 다투지 않고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이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머뭅니다."
"아누룻다들이여, 그러면 그대들은 어떻게 사이좋게 화합하여 다투지 않고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이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머무는가?"
7. "세존이시여, 여기서 저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러한 동료 수행자들과 함께 머문다는 것은 참으로 나에게 이익이고, 참으로 나에게 축복이다.'라고. 그래서 제게는 이 스님들이 눈앞에 있건 없건 항상 그들에 대해 자애로운 몸의 업[身業]을 유지하고, 제게는 이 스님들이 눈앞에 있건 없건 항상 그들에 대해 자애로운 말의 업[口業]을 유지하고, 제게는 이 스님들이 눈앞에 있건 없건 항상 그들에 대해 자애로운 마음의 업[意業]을 유지합니다.12) 그러면 제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마음은 제쳐두고 [207] 이 스님들의 마음에 따라야겠다.'라고. 세존이시여, 그러면 저는 제 자신의 마음은 제쳐두고 이 스님들의 마음에 따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희는 몸은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난디야 존자도 역시 ··· 낌빌라 존자도 역시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기서 저희들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 세존이시여, 참으로 저희는 몸은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같이 저희들은 사이좋게 화합하고 정중하고 다투지 않고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이 서로를 우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머뭅니다."
8.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가?"
"참으로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뭅니다."
"아누룻다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그대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가?"
9. "세존이시여, 여기서 저희들 중에서 먼저 탁발을 마치고 마을에서 돌아온 자는 자리를 마련하고 마실 물과 발 씻을 물을 준비하고 여분의 음식을 담을 통을 준비합니다. 나중에 탁발을 마치고 마을에서 돌아온 자는 남은 음식이 있으면 그가 원하면 먹고, 원하지 않으면 풀이 없는 곳에 버리거나 생물이 없는 물에 던져 넣습니다. 그는 자리를 치우고 마실 물과 발 씻을 물을 치우고 여분의 음식을 담은 통을 치우고 밥 먹은 곳을 닦아냅니다. 누구든 마시는 물 항아리나 씻는 물 항아리나 뒷물 항아리가 바닥이 나거나 비어있는 것을 보면 그는 그것을 준비합니다. 만일 [너무 무거워] 혼자 감당할 수 없으면 손짓으로 다른 사람을 불러서 손을 맞잡고 가져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우리는 그 때문에 묵언을 깨뜨리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대신에 닷새마다 법담으로 온 밤을 지새웁니다. 세존이시여, 이같이 저희들은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뭅니다."
10.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13)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14) 세존이시여, 이것이 저희들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11.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 머 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208] 가라앉히기 위해15) 또 다른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것이 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그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주석
12) 이 세 가지는 본서 「꼬삼비 경」(M48) §6에 나타나는 '여섯 가지 기억해야 할 법들(cha sāraṇīyā dhammā)' 가운데 처음의 세 가지에 해당한다. 이 여섯 가지는 본서 제3권 「사마가마 경」(M104) §21에도 나타난다.
13) 여기서부터 본 경의 내용은 본서 제4권 「오염원 경」(M128)과 달라진다. 「오염원 경」(M128)에서는 세 존자가 아라한과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 설명되고 있지만 본 경에서는 4선-4처-상수멸을 증득하여 번뇌를 소멸하였다고 나타나기 때문에 「오염원 경」(M128)이 더 앞선 일화를 담고 있다 하겠다.
14) 이하 네 가지 선정의 정형구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은 본서 제1권 「미끼 경」(M25) §15의 주해를 참조할 것.
15) '이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로 옮긴 원문은 etassa vihārassa samatikkamāya etassa vihārassa paṭippassaddhiyā이다. 여기서 samatikkamāya(뛰어넘은 뒤)와 paṭippassaddhiyā(가라앉힌 뒤)를 주석서는 각각 samatikkamatthāya(뛰어넘기 위해)와 paṭippassaddhatthāya(가라앉히기 위해)의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어서(MA.ii.243) 이렇게 옮겼다.
12.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렀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이 [선정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 이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그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13.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그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 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14.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 머 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또 다른 인간의 법을 초월했 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209] 공무변처(空無邊處)16)를 구 족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그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15.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를 구족 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그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16.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그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 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17.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무소유 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구족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그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18. "아누룻다들이여, 장하고 장하구나. 아누룻다들이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렇게 머 무는 것을 뛰어넘고 이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여기 저희들은 원하기만 하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그렇게 머무는 것을 뛰어넘고 그렇게 머무는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여 편히 머무는 것입니다."
19. 그러자 세존께서는 아누룻다 존자와 난디야 존자와 낌빌라 존자에게 법을 설하여 가르치시고 격려하시고 분발하게 하시고 기쁘게 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셨다.
21. 그때, 디가 빠라자나 약카17)가 세존을 뵈러 갔다. 세존을 뵙고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디가 빠라자나 약카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아라한·정등각자와 이들 세 분 선남자들인 아누룻다 존자와 난디야 존자와 낌빌라 존자께서 왓지에 머무시니, 그것은 왓지족들의 이득이고 왓지 백성들의 축복입니다."
디나 빠라자나 약카의 말을 듣고 땅의 신들도 소리를 질렀다.
"여래·아라한·정등각자와 이들 세 분 선남자들인 아누룻다 존자와 난디야 존자와 낌빌라 존자께서 왓지에 머무시니, 그것은 왓지족들의 이득이고 왓지 백성들의 축복이다."라고. 땅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사대왕천의 신들도 ··· 삼십삼천의 신들도 ··· 야마천의 신들도 ··· 도솔천의 신들도 ··· 화락천의 신들도 ··· 타화자재천의 신들도 ··· 범중천의 신들도 소리를 질렀다.
"여래·아라한·정등각자와 이들 세 분 선남자들인 아누룻다 존자와 난디야 존자와 낌빌라 존자께서 왓지에 머무시니, 그것은 왓지족들의 이득이고 왓지 백성들의 축복이 다."
이같이 하여 그 찰나 그 시각에 범천들에게 까지도 알려지게 되었다.
주석
16) 본 경에 나타나는 공무변처(空無邊處, ākāsānañcāyatana)와 식무변처(識無邊處, viññāṇañcāyatana)와 무소유처(無所有處, ākiñcaññāyatana)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로 분류되는 사처(四處)에 대한 설명은 본서 제1권 「 지워 없앰 경」(M8) §8이하의 주해들을 참조할 것.
17) "디가 빠라자나 약카(Dīgha Parajana yakkha)에서 '디가'라는 것은 "마니, 마니짜라, 디가, 그리고 세릿사까"(D32 §10)라고 전해 내려오는 스물여덟 명의 야차(약카) 장군(yakkha-senāpati)들 가운데 한 명인 천상의 왕(devarājā)을 말한다. '빠라자나'는 그 약카의 이름이다."(MA.ii.244)
『디가 니까야』 제3권 「아따나띠야 경」(D32) §10을 참조할 것.
'약카(yakkha, Sk. yakṣa)'는 중국에서 야차(夜叉)로 한역되었다. 이 단어는 yakṣ(to move uickly)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문자적으로는 '재빨리 움직이는 존재'를 뜻한다. 그러나 빠알리 주석서에서는 √yaj(to sacrifice)에서 파생된 명사로 간주하여 "그에게 제사 지낸다. 그에게 제사음식을 가져간다고 해서 약카라 한다."(VvA.224) 혹은 "예배를 받을만한 자라고 해서 약카라 한다."(VvA.333)고 풀이하고 있다.
『디가 니까야』 제2권 「빠야시 경」(D23) §23에서 보듯이 약카는 일반적으로 비인간(amanussa)으로 묘사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그들은 아귀(peta)들보다 높은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선한 아귀들을 약카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PvA.45;55) 그들은 많은 계통이 있는데 후대 문헌으로 올수록 우리말의 정령, 귀신, 요정, 유령, 도깨비 등 나쁜 비인간인 존재들을 모두 일컫는 말로 정착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힌두 문헌의 빠샤짜(Piśāca, 도깨비, 유령, 악귀, 『상윳따 니까야』 제1권 「요정 경」 (S1:46) §2와 「삐양까라 경」(S10:6) §3에도 pisāca로 나타남)와 거의 같은 존재를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약카는 힘이 아주 센 비인간을 뜻한다. 그래서 본서 「삿짜까 짧은 경」 (M35) §14와 『디가 니까야』 제1권 「암밧타 경」(D3)에는 금강수약카(Vajirapāṇī)가 금강저(벼락)를 손에 들고 부처님 곁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래서 신들의 왕인 삭까(Sakka, Indra)도 약카로 표현되기도 하며(본서 「갈애 멸진의 짧은 경」 (M37) §5/M.i.252: J.iv.4), 『상윳따 니까야』 제1권 「삭까 상윳따」(S11)의 「삭 까의 예배 경」2(S11:19)에서 삭까의 마부(수행원) 마딸리는 부처님도 약카로 지칭하고 있으며 본서 「우빨리 경」(M56/i.386) §29의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에서 우빨리 장자도 부처님을 약카로 부르고 있다. 자이나교에서도 약카는 신성한 존재로 숭배되고 있는데 이러한 영향이 아닌가 한다.
육도윤회의 입장에서 보면 약카는 사대왕천의 북쪽에 거주하며 꾸웨라(Kuvera, 웻사와 나(Vessavaṇa)라고도 한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5장 §5의 [해설] 참조.)가 그들 의 왕이라고 한다.(『디가 니까야』 제3권 「아따나띠야 경」(D32) §7 참조) 『마하 바라따』(Mahābhārata) 등의 힌두 문헌에도 약카(Sk. Yakṣa)는 꾸웨라의 부하들로 묘사되고 있다.
22.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러하다, 디가여. 그것은 그러하다, 디가여. 어떤 가문에서 세 명의 선남자들이 집을 나와 출가할 때, 만약 그 가문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가문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어떤 가문에서 세 명의 선남자들이 집을 나와 출가할 때, 만약 [211] 그 가문의 후손들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어떤 마을에서 세 명의 선남자들이 집을 나와 출가할 때, 만약 그 마을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마을에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어떤 성읍에서 세 명의 선남자들이 집을 나와 출가할 때, 만약 그 성읍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성읍에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어떤 도시에서 세 명의 선남자들이 집을 나와 출가할 때, 만약 그 도시가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도시에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어떤 나라에서 세 명의 선남자들이 집을 나와 출가할 때, 만약 그 나라가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나라에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모든 끄샤뜨리야들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끄샤뜨리야들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모든 바라문들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바라문들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모든 와이샤들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와이샤들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모든 수드라들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그 수드라들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이 이 세 명의 선남자들을 청정한 마음으로 기억한다면,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과 사문·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들에게는 오랜 세월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디가여,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이 세상에 대한 연민으로, 신들과 인간들의 이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해 수행하는 저 세 명의 선남자들을 보라."
세존께서는 이같이 설하셨다. 디가 빠라자나 약카는 흡족한 마음으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고싱가살라 짧은 경(M31)이 끝났다.
출처 :
1. https://blog.daum.net/sumisan80/959
2. 대림 스님 옮김, 『맛지마 니까야 2』, 초기불전연구원, 83-98쪽.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
사두사두사두
고맙습니다 ....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