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1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9주)
우리 안에 있는 금송아지, 그리고 하나님의 초대
출32:1~10(11~14); 빌4:1~9; 마22:1~14
우리가 오늘 읽은 제1독서 출애굽기의 본문은 32장에 나오는 소위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 수르광야, 신광야, 르비딤을 거쳐 시내광야에 이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시내광야에 도착하여 2년 간 머물게 되는데,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여러 가지 계명들을 하나님께 직접 받았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께 그 계명들을 받으러 하나님의 산, 시내산(호렙산)에 올라가 있을 때 그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백성들이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형 아론에게 몰려가서 말합니다. “일어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오게 한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매우 불안하고 조급해 보입니다. 아마도 불안과 의심과 두려움이 그들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못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시내 사막 한 가운데 임시로 모여 장막을 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안과 두려움과 의심이 올라왔다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의 분명한 표시를 원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아론이 이들의 요구에 어떤 실랑이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본문은 곧바로 아론이 백성들에게 가지고 있는 금붙이를 모아 오라는 명령을 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금고리를 다 빼서 가지고 오자, 아론은 그것을 받아 녹이고, 그 녹인 금을 거푸집에 부어 송아지 모양의 상을 만들고는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 신이다”라며 선포를 합니다.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됩니다. 그들은 금송아지 상을 하나님의 현존의 상징으로 만들어 세웠습니다. 하나님 현존의 상징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거푸집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실제로 아론은 후에 사건의 경위를 모세에게 설명하면서, “...그들이 금붙이를 가져왔기에, 내가 그것을 불에 넣었더니, 이 수송아지가 생겨났습니다.”(출32:24)라고 변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앞에 25장부터 31장 그리고 뒤에 35장에서 40장까지 나오는 성막을 짓는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성막은 히브리어로 <미쉬칸>이라고 하는데 ‘머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현존하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미쉬칸>, 즉 성막의 목적은 금송아지 상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 성막 만드는 규례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다 말씀을 못하지만, 출애굽기 25장~31장, 또 35장~40장에 나오는 성막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금송아지(둘 다 하나님 현존의 상징)를 만드는 방법이 얼마나 대조가 되는지, 여러분이 성경을 조금만 읽어 보면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 놓고 축제를 벌였을 때, 하나님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출32:9~10)
이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 지나치게 의인화 되어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표현들은 잘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이 금송아지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는 걸까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대치할 어떤 것을 만들어 놓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본디 하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지복의 상태라고 한다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 무엇으로 이 지복의 상태에 이르려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갖는 힘일 수도 있고, 자신이 만들어 쌓아놓은 자신의 좋은 이미지일수도 있습니다. 그 힘과 좋은 이미지는 자신의 재력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일수도 있고, 자신의 영향력일수도 있겠지요. 심지어는 영적인 능력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자신들이 붙잡을 수 있는 것, 자신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 자신들이 안심할 수 있는 것, 자신들이 도피할 수 있는 것, 자신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이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현실의 불안을 온전히 그대로 느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믿었다면, 광야가 주는 불안을, 그들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자신들의 존재의 나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현존하시는 참된 하나님, 자신들이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급하게 현실의 불안을 순진한 낙관주의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볼 수 있고 손에 잡히는 ‘어떤 것’으로 불안을 위장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위하고 도피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생각에서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모든 것을 잊고 잠시 회포를 풀었을지 모르지만, 그 기쁨은 그들의 삶 전체를 떠받혀줄 만한 실재가 아니었으므로 공허한 것이었습니다.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이것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인간조건입니다. 우리도 실재의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대신, 내가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하나님을 대치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이런 인간조건을 알아차리고, 내 생각 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재이신 하나님께 신뢰를 두는 쪽으로 나아가는 행위를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이쪽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초대하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 초대에 “아멘”하고 응답하는 것이 우리 쪽에서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는 하나님의 계속된 초대를 말해줍니다. 어떤 임금이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혼인잔치는 둘이 하나가 되고 갈라진 것이 통합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고, 그래서 우리가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내적인 길이 혼인잔치입니다.
오늘 비유에는 세 번의 초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초대에 사람들은 아주 무심합니다. “임금이 자기 종들을 보내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 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3절) 사람들은 너무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있고, 자기 행복 프로그램에 빠져 있어, 미세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 초대가 옵니다. 4절.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
그러나 우리들에겐 그 초대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붙잡는 일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이지요. 재산도 늘려야 하고, 성공도 해야 합니다.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잔치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초대의 표지인 내적인 움직임(외로움, 우울함, 슬픔, 분노, 허무 등)을 간단히 죽여 버립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불완전하다고 느끼게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내적인 움직임을 우리의 여러 활동(지적인 활동, 육체적 활동)을 통해 무감각하게 만들거나, 억압함으로써 죽여 버립니다.
세 번째 초대가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초대를 받습니다. 길거리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 열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가난한 것들, 열등한 것들은 부유한 것보다 더 깊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모든 영역, 우리 전체 인생사, 우리가 처박아 두었던 무의식 깊숙이 있는 우리의 그림자들이 그것들입니다. 그것이 우등한 것이든 열등한 것이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잔치에 초대를 받습니다. 심지어 우리 안에 있는 악조차도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유일한 조건은, 우리가 그분의 초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려는 태도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이 비유 마지막 부분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쫒아내는 이상한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여기서 혼인 예복의 의미는, 나를 초대하시는 임금님을 존경하고, 내가 가진 것, 그것이 아주 보잘 것 없고 찢겨졌어도, 그것을 정성스럽게 다루어 혼인잔치에 가지고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잔치의 의미와 기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너무 많은 상처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여러 부정적인 표상이 예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불완전함과 상처를 내가 퇴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사랑의 예복으로 감싸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애정 깊은 눈으로 보아야 하고, 하나님께 그대로 보여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소유와 존재를 소홀히 대하면 잔치 상에서 쫓겨날 것이고, 내 중심에서 떨어져 나올 것이며, 내적으로 어둠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내적으로 분열시킬 것입니다. 이것이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의미입니다.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근본적으로 진정한 지복인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기 보다는 금송아지를 만드느라 더 분주한 사람들입니다.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성막을 만드는 대신 뚝딱 금송아지를 만들어 빨리 위안을 삼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길을 알았고 그 초대를 들었습니다. 거듭 넘어지고 같은 함정에 빠지기는 하지만, 실망하지 말고, 분주하고 급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주님의 세미한 부름에 귀를 기울이려는 자세, 관상의 자세로 돌아서십시오.
오늘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말씀을 더 깊이 새겨 보십시오.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