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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7일(주일) 사순절 세 번째 주일낮예배♣
성경:고린도전서13:4(신279P)
제목:사랑은 풍선이 아닙니다
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서론
지난 1998년도 세계적인 영화상인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11개 부분에서 상을 휩쓴 영화가 있었습니다. 누구나가 한번쯤은 보셨을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타이타닉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번에도 "아바타"라는 영화를 만들어 지금까지의 영화중 우리나라 관객을 제일많이 관람하게한 감독입니다.
1912년 영국은 거대한 배 한 척을 만들었습니다. 선체 길이만도 259미터나 되는 46,300톤의 거대한 초호화 여객선이었습니다. 그 배는 영국이 해양제국이라는 명예를 걸고 자기들의 영광을 세계 만방에 자랑하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그 거대한 여객선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신족(巨神族) 타이탄의 이름을 따서 '타이타닉'이라고 지어졌습니다.
영국은 해양제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가장 크고 가장 튼튼하고 가장 호화스러운 배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배를 가리켜서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자랑했습니다.
이 배가 처음 출항할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영국을 출발한 타이타닉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 뉴욕을 목표로 거만한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첫 항해 때 그 배에 탔던 사람만 2,208명이나 되었습니다. 타이타닉은 모든 것에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크기도 최고요, 호화스러움도 세계 최고였습니다.
첫 항해에서 한 가지 더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건 속도입니다. 그래서 타이타닉은 전 속력으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갔습니다.
미국 뉴욕에 도착했을 때 '최고로 크고 튼튼한 배, 최고로 호화스러울 뿐만 아니라 최고로 빠른 배'라는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장은 최고로 빠른 속도로 가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첫 항해를 나섰던 그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배는 4월 14일 뉴펀들랜드 해역에서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승선자 2,208명 중에서 무려 1,513명이 이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해양 사고 중에서 최고로 큰 사고였습니다.
후에 역사는 타이타닉을 바벨탑 사건에 견줄 수 있는 인간의 교만이 만들어낸 비극 중에 비극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다'고 자랑할 만큼 크고 튼튼한 타이타닉이 첫 항해에서 1,513명과 함께 바다에 수장된 것은 인간의 교만에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엄청난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현대의 인간들은 자기들의 머리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과학적 지식과 발명품들을 자랑하며 얼마나 큰 교만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 시리즈 오늘은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말씀으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What:사랑은 우쭐하여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인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교만하다”라는 단어는 희랍어로 ‘퓌지오타이(φυσιουται) ’입니다. 퓌지오타이는 바람이 들어 팽팽해지는 것처럼 무엇인가 허황된 가운데서 자기가 우쭐하여 높아져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 일곱 번 밖에 나오지 않는데 고린도서에서 여섯 번이나 쓰였으니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많은 경고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도덕적 타락, 우상 문제, 심지어 사도직을 의심한 모든 죄의 바탕이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금세 고린도교회를 얕잡아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고린도교회 만한 교회를 보신 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도는 이 고린도 지방에 전도하러 올 때 중대한 결심을 했노라고 회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전할 메시지와 그 전달 방식에 대한 결단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바로 사도 바울은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도의 많은 사역의 여정 중에 가장 낮은 마음으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들른 곳이 고린도 교회였고 그런 고린도 교회는 사도로부터 선명한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깨뜨려져 생겨난 것입니다.
즉 그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 속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많은 은사를 경험한 생명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이들에게서 사라지자 하나님 앞에서 좋았던 모든 것들 때문에 오히려 이 교회는 갈등을 겪게 되고 분열의 양상까지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지식을 획득할 때에는 믿음과 사랑으로 부흥 속에서 했지만 십자가를 통한 참된 경건이 그들에게 살아 못할 때에 그 사랑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채 차가운 논리만이 남아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모든 죄의 뿌리가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사랑이 죄의 뿌리이지만 자기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목구멍까지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내가 틀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에 반하여 의지가 동의하지 않으면 죄는 마음 안에서 산출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얼 아시겠어. 내가 더 잘 알지. 먹어도 돼.’라고 하며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마지막에 교만이 작동해서 하나님의 판단보다 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교만이 결국 사랑이 없는 자리에서 생겨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교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자기중심으로 남을 판단하며 정죄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가 잣대가 되고 자기가 기준이 되어 판단하나 그러나 인간을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지 않습니까?
심판자는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판단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되어야 하겠죠? 그래서 성경을 캐논(canon, 尺度))이라고 합니다.
반면 교만한 자는 자기가 기준입니다. 자기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고 잣대가 되어 자기 보기에 따라 사람을 멸시하고, 함부로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기준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는데 가령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되지 않는다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자리에 들지는 말아야겠지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의 비유에서 자기중심의 교만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 비유로 거론 되어진 대상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바로 바리새인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러나 자기 이기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난하고, 파괴를 한다면 그것은 바로 교만의 중심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2).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 교만일진데 그 교만은 과도한 자기존중과 집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끝을 모르는 자기중심주의로서 항상 나를 한 단계 높은데 올려 놓으려는 욕망입니다.
시 75:5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뿔은 동물이 자신의 머리를 쳐들고 힘을 과시하며 자랑스럽게 다닌다는 점에서, 힘, 능력, 권위, 자부심 등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 75:5절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도전적인 태도를 갖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430)이 어느날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한참을 생각하던 어거스틴은 첫째는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둘째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둘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그렇다면 셋째는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역시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계속해서 제자들이 질문하기를 그러면 겸손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교만은 무엇일까요 하고 물으니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만이란 자기가 지극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부정에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던가요?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교만이라고 하였으니 이처럼 교만한 사람은 자신은 완벽한 줄 알아서 자신의 부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가 됩니다.
15세기의 설교자 중에 사보나 롤라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교만이란 자기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병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2.Why:왜 사랑은 우쭐하여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 없는 대상을 조건 없이 사랑한 무조건적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예쁘고 가치 있는 것을 사랑하는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대부분의 교회 청년들이 나이가 들도록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예쁘고 너무 유능한 사람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랑을 가리켜 우리는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에로스적 사랑의 강도는 그 대상의 미와 가치에 의해 정해집니다. 진선미와 영원에 대한 인간 본능의 추구적 사랑 즉 에로스적인 사랑은 희랍 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세계 종교에서 그리고 기독교적 신비주의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의 미와 가치를 묻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로운 사람들을 사랑한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연약하고 경건치 않은 죄인들과 원수들을 사랑한 무조건적 사랑이요 모순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을 가리켜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5장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10).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연약한 사람들과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과 죄인들과 원수들을 사랑한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모순된 사랑이었습니다.
조건이 많고 이유가 많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은 아가페과에 속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에로스과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행복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대상을 소유하므로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에로스적 사랑의 강도는 그 대상을 소유하므로 내가 얼마나 큰 만족과 얼마나 큰 유익과 얼마나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느냐에 달립니다.
행복 추구적 에로스의 사랑은 대부분의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활동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 받기 위한 낮은 차원의 신앙 생활 가운데도 이와 같은 에로스적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만족이나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만족과 행복을 포기하고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얻는 이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가 사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가 죽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가 죽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살리는 비극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10).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얻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는 역설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얻는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유익과 자기 평안과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은 아가페과에 속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에로스과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 없는 대상속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성취에 목적을 두는 자기 성취적인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대상을 소유하므로 자기가 행복하고 그리고 자기 삶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때는 권력의 쟁취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사업의 성공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명예의 획득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영생의 획득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에로스적 사랑의 강도는 그 대상을 소유하므로 내가 얼마나 크고 높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느냐에 달립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성취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가치 없는 대상 속에 가치를 만들어 내고 아름답지 못한 대상 속에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상대 성취적인 사랑이요 가치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경건치 못한 사람을 경건한 사람으로 만들고 불의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원수를 화목한 사람으로 만들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을 일겠습니다."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9)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11).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 성취적인 사랑이요 가치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부어질 때 자기만 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후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3,14).
십자가의 사랑은 미움의 사람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상
대방에 대한 사랑이나 상대방의 성취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사랑과 자기 성취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가페과에 속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에로스과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묻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의 행복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살려서 행복하게 만드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 성취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방의 성취에만 관심을 두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멋진 장식품이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가장 비극적으로 나타난 곳입니다.
아무 가치 없는 존재인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서 섬기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 큰 사랑의 파도 앞에서 깨달은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교만해 질 수 있겠습니까?
예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어느 날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를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들의 성적표를 받아든 이 아버지는 왜 이렇게 (미) 밖에 없느냐며 공부가 시원찮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이번에는 모두 (우)를 받아가지고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버지가 하는 말이 왜 (수)는 없냐는 것입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칭찬을 받아보고 싶은 이 아이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여 이번에는 전 과목이 (수)인 성적표를 갖다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아버지의 말인즉 "요즈음 선생들은 성적을 되는 대로 주더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그 자리에서 크게 실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교만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아버지의 사랑, 자식에게 자기 자랑을 앞세우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다면 이러한 사랑은 자식에게 통하지도 않거니와 반갑지도 않습니다.
그 때문에 부모들이 어쩌다 무엇을 가르친다고 "그것도 모르냐?"며 쥐어박고 구박을 할 때면 아이들이 속으로는 "나도 크면 알아요, 무얼 좀 아신다고 재요?"하고 나온답니다. 무슨 일에서나 자기 사랑이 앞서는 동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말로는 자식을 위함이라고 하지만 보다 먼저 자기 자랑이 앞서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사랑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로는 교회를 사랑해서 목사님의 사역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교회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사랑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성도들은 한 생명의 소중성을 그리고 그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세를 가집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고 정중한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친절히 대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앞세우고 우쭐대며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3.How: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교만을 치료합니까?
첫째,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할 때 비로소 교만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교만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영접하게 될 때, 교만이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서 툭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자신의 배속이 훤해지고 온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집니다. 지겹도록 '누가 더 크냐'고 다퉜던 제자들도 예수님의 겸손한 사랑을 깨닫고 덧입은 순간부터 비로소 겸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세워주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는 사역을 힘차게 감당했습니다.
리더십도 나누어서 공동으로 발휘하였습니다. 선교의 주도권이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에게서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실라에게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때에도 바울을 축복하였습니다.
둘째, 주님의 아가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게 함으로 교만을 이겨나가게 하십니다.
아가페 사랑의 본질적 특징은 무조건 남을 나보다 훌륭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죄악된 인간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셨습니다. 인간을 섬겨야할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섬기는 종의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바울은 아가페 사랑에 근거하여 이렇게 부탁합니다.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3). 이것은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우열을 가리는 습관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한 우리는 도저히 서로 남을 낫게 여길 수 없습니다.
비교하다보면 반드시 그리고 분명히 우열이 가려지는 부분들이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심지어는 제도적 교회마저 끊임없이 비교를 강요합니다.
서열을 매기고 그에 따라 줄을 세웁니다. 그에 따라 신분과 대우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런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삶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한 아가페 사랑의 삶을 출발할 수 없습니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에겐 굴종하게 되고 나보다 열등한 사람에게는 군림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
요즈음 게그콘서트에서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대사가 유행합니다. 실제로 세상은 1등만 기억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1등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꼴찌도 살고, 그것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곳입니다.
김성진 가천의대 석좌교수가 국민일보 특강에서 한 내용입니다. 미래 인류의 사망 원인 1위는 암도 아니요 당뇨병도 아니고 우울증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울증과 이어지는 자살이 사망 원인 1위가 된다는 것은 물질문명의 발달과는 반대로 인류의 정신이 피폐해지고 극도의 강박관념들이 만연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최소화하는 데는 가정과 학교의 역할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은 모든 비교를 중단하라고 명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무조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임을 인정하라고 단호히 명합니다. 나보다 훌륭한 근거와 이유를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가페 사랑이란 자신과 남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남을 자신보다 귀하여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 사랑에 익숙해지면 해질수록 자아로부터 해방되게 됩니다. 우리를 자아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비교입니다. 내가 남보다 훌륭하게 보여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아집착이라는 질병이 싹트게 됩니다. 비교에서 해방되는 만큼 자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루이스는 겸손한 사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마도 그가 주는 인상은, 여러분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쾌활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자기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가페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고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걸어 교만을 극복함으로 이런 사람으로 성장해갈 수 있기 바랍니다.
4what then:교만의 결과입니다
솔로몬 임금 다음으로 명성을 떨친 웃시야(783-724 B.C.E.) 왕의 오랜 치세 아래 유다의 국력은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웃시야는 군사력과 아울러 나라의 경제력도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그는 불레셋 족과 아라비아 족을 정복하였고 암몬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전 국토를 요새화 하였고 군대를 재편성하였습니다.
“전군에 방패, 창, 투구, 갑옷, 활, 물매를 마련해 주었고 활을 쏘고 큰 돌을 던지는 무기를 기술자에게 고안시켜서 예루살렘 성 망대들과 성 귀퉁이마다에 설치해 놓게 하였습니다.”(역대기하 26:14,15).
그는 왕으로서, 행정가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왕국 분열 이래 유다의 국토를 가장 넓게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능력이 곧 그의 약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교만 방자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제단의 분향을 자기 손으로 하고자 했습니다.
대사사장 아사랴와 ‘용감한’ 제사장 팔십 명이 뒤따라 들어가 웃시야 왕을 가로막고 말하였습니다.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일이 아닙니다. 분향하는 일은 선별된 아론의 후손 제사장들이 할 일입니다.
이 성소에서 나가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셨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왕을 떠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웃시야는 화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화를 내는 사이에 문둥병이 그의 이마에 번졌습니다. 그리하여 웃시야 왕은 문둥병자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므로 별궁에서 홀로 문둥병을 앓으며 지내야 했습니다(역대기하 26:18-21).
웃시야 왕은 교만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성질 급해서 급하게 무너지고 싶으면 교만하면 됩니다. 교만은 마귀의 죄입니다. 천사가 교만해지면 마귀가 됩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놔두지 않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응징하는 죄입니다.
교만했던 사람들을 보면 웃시야왕이라든지, 느부가넷살이라든지 헤롯왕이라든지 오래 안걸리고 즉각 무너뜨리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큰 승리 후에도 곧장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의 대 승리 이후에 교만해서 바로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최고의 시험이 대승리입니다. 큰 승리 이후의 어떤 모습을 갖느냐? 곧장 교만해집니다. 승리 이후에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합니다. 인구조사자체가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다윗이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교만한 마음이 배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내가 얼마나 위대한 왕인가, 내가 얼마나 통치를 잘했는가, 자기를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기를 보십니다. 교만함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치시지 않았습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16:18)의 말씀을 결코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고린도 교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서로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해서 음행을 저질렀으면서도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사랑은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것입니다.
사랑이신 우리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으로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케 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높이십시다. 나는 낮아지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겸손히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첫댓글 목사님 목소리 설교 듣고 싶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