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은 우리 동네 삽니다
(서프라이즈 / 반장아빠 / 2010-09-02)
‘가로등’ 그러면 떠오르는 것이 어린왕자의 다섯 번째 별입니다.
눈물의 나라에서 온 어린왕자가 다섯 번째로 찾아간 가로등에는
외로운 가로등과 외로운 점등인만 있었습니다.
왜 가로등을 켜고 끄냐고 묻는 어린왕자에게 점등인은 말합니다.
‘명령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자아를 상실한 점등인.
그 별은 일분에 한 바퀴씩 돌기 때문에 가로등 켜고 끄기가 보통 바쁜 게 아니라고
점등인이 말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어린왕자는 다섯 번째 별을 떠나며, 그래도 자신이 만났던 왕, 허영쟁이, 상인,
부끄러워 술을 마신다는 술꾼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자신을 위해 가로등을 켜지는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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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추억 속에는 또 하나의 가로등이 있습니다.
우리 집 골목 앞, 나무 전봇대에 달려 있었던 가로등.
가로등보다는 아마 외등이 더 정확할 겁니다.
전두환 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5공 시절,
밤늦게 술 마시고 집에 올 때면
그 전봇대에 대고 시원하게 오줌 한번 갈기고 들어가곤 했었죠.
외등을 올려다보며, 비겁한 나에게 “이 개 같은 놈아” 하면서
지린내를 퍼붓는 그 맛도 각별했었습니다.
지금은 전두환도 사라지고,
나무 전봇대도 뽑혀져 시멘트 전봇대로 바뀐 지 오랩니다.
막걸리는 약간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받아 마시는 것이 제격이듯이,
시멘트 전봇대는 그 맛이 전혀 안 나더군요.
아무튼, 시멘트 전봇대로 바뀐 이후로 그 앞에서 뭘 꺼낸 기억은 없습니다.
각설하고…
우리 동네 아름다운 점등인에 대해서 얘기 좀 해 보겠습니다.
우리 동네 성근이 형.
성근이 형과 가로등에 얽힌 사연을 오늘 꼭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성근이 형과 저는 일산 정발산 근처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잠 못 이루고 생각이 복잡할 때면 정발산을 오르는데….
성근이 형 역시 정발산 야간 등반을 홀로 즐기는 편입니다.
정확하게 5년 전 장마철 어느 비 오는 날 밤입니다.
제게 전화가 왔습니다.
정발산 야간 등산을 갔더니 가로등 꺼져 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길이 미끄러운데 지나가는 노인네들이 다칠까 봐 안쓰럽다고 했습니다.
이 가로등 켜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글쎄요…. 구청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성근이 형은 그 다음 날로 구청에 신고했습니다.
그랬더니 가로등 하청 준 업체에 직접 신고하라고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그 하청업체로.
하청업체는 이렇게 막연하게 전화로 신고하면 알 수가 없으니
불 꺼진 가로등의 번호를 적어서 불러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야말로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밤이었습니다.
성근이 형은 혈혈단신 정발산에 올라가 온통 산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17개의 가로등이 꺼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가로등의 번호를 적어 다음 날 가로등 보수 업체에 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다음 날 밤에 전화가 왔더군요.
불이 다 들어 왔다고, 기분이 너무 좋다고, 막걸리 한잔하자고.
저는 은근히 감동 먹었습니다.
밤에 정발산의 가로등이 꺼져 있어도 별반 불편 못 느끼고 무심했었습니다.
언젠가 구청 친구들이 갈아 주겠지 라는 생각조차도 안 했습니다.
나의 산도 아니고, 우리의 산도 아니고 그냥 뒷산 공원으로만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시민의식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말로만 산을 사랑한다는 허접스러운 놈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근이 형은 달랐습니다.
암흑에 침묵하는 시민이 아니라 불을 켜는 행동하는 시민이었던 거죠.
자아를 상실하고 명령에만 복종하는 점등인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는 점등인 이었습니다.
#
우리 옛 이야기 중에 ‘그믐밤에 놋다리 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달 없는 밤을 골라
아무도 모르게 개울가로 나가 마을 사람들이 건너기 좋게 징검다리를 놓는다는 것.
아들을 데리고 나간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와 징검다리를 놓으며 마을 공동체 의식을 배울 수가 있었을 겁니다.
이름 없는 산, 이름 없는 약수터.
물 마시기 좋게 깨끗한 호스가 꽂혀 있는 것을 보면서도 고마워할 줄 몰랐습니다.
누가 이렇게 물 먹기 편하도록 호스를 꼽아 놓았을까 생각조차도 안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두우면 어두운가 보다, 환하면 환한가 보다….
불을 밝힐 생각조차 안 했던 나.
통렬하게 반성할 게 너무 많은 나.
참 나빴던 나.
익명의 이름으로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디디며,
누군가 매어놓은 로프를 잡고 바위틈을 오르며,
누군가 놓아둔 약수터의 정갈한 컵을 보며 우린 희망을 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같다고.
그래도 이 삭막한 세상은 따뜻한 이웃에 대한 배려 때문에 살 맛 난다고.
요즘 성근이 형은 백만 송이 장미를 피우겠다고 거리를 누비고 다닙니다.
백 만 개의 가로등을 켜겠다고 빗속을 걸어 다닙니다.
성근이 형을 생각하면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밤 모처럼 비 맞으며 정발산 공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정발산의 환한 가로등을 올려다보며
감나무에 열린 감을 노래했던 시인 정현종의 시, <환합니다>를 중얼거려 봅니다.
환합니다
환합니다
감나무에 감이,
바알간 불꽃이,
수도 없이 불을 켜
천지가 환합니다.
이 햇빛 저 햇빛
다 합쳐도
저렇게 환하겠습니까.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와도
따지 않고 놔둡니다.
풍부합니다.
천지가 배부릅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배부릅니다.
내 마음도 저기
감나무로 달려가
환하게 환하게 열립니다.
반장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