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에 응답하라
행3:1-10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목회 초년병 때에 미숙함으로 인해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친정어머니와 사시는 집사님 댁에서 속회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스님들의 옷을 입고 다닐만큼 철저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시골에 방이 하나라, 친정어머니가 할 수 없이 방구석에 계시고, 속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헌금시간과 헌금기도가 있었고, 기도를 마친 제가 눈을 뜨면서,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기도 전에는 분명히 천원짜리들뿐이었는데, 만원짜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속으로 누군가 지갑에서 만원 짜리를 착각해서 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집사님이 연락이 왔는데, 만원짜리의 주인공은 불교신자인 친정 어머니였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예배 중에 그분을 괴롭히던 무릎 통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분도 놀라고 너무 좋아서 만원을 헌금했고, 이번주부터 교회에 나오신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얼마나 기뻐겠습니까? 치유가 있었고 불교신자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니, 놀라운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얼마 후에 그분의 친구분들이 갑자기 주일예배에 나타나셨습니다. 왠일인가? 했더니, 무릎 고침받은 할머니가 동네분들에게 용한 목사가 있어서 기도하면 고칠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허리 통증, 무릎 통증을 지닌 할머니들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가 참 난감했습니다. 예배 후에 제 앞에서 뭔가는 버티는 그분들을 위해 할 수 없이 기도를 하기는 했는데, 진땀이 나더군요. 그분들이 고침을 받았을까요?
아니요!! 그날 그랬다면 제가 여기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의 능력인줄 착각에 빠져 이단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다행히 집사님의 친정어머니는 친구이자 후임목사에게 세례 받고 소천하셨다고 합니다. 그분에게는 그동안 어머니의 영혼구원을 위한 딸의 기도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응답이 무엇입니까? 병이 고쳐진 것이나, 문제가 해결된 것이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본문을 보면서도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는 것을 응답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집중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주간 본문을 묵상하면서 응답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응답에 대한 생각을 나눠 보겠습니다.
첫째, 23.4%
23.4%가 무엇일까요?
23.4%는 순종과 인내의 숫자를 의미합니다.
고전 15:4-6의 말씀입니다.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 그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열두 제자와 500여 명의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이와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며, 예수님의 명령을 받았던 열두 제자와 오백여 명의 제자 중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가 120명입니다. 퍼센트로 따져보니, 23.4%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명령을 들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의 말씀을 보면 누구는 밭을 사서, 누구는 소를 사서 누구는 장가를 가서 혼인 잔치 초청에 응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던 120명의 문도들도 예루살렘을 떠날 이유가 없었겠습니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했던 것입니다. 순종은 하기 쉬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 기 어렵지만, 믿음으로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인내했습니다. 더운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10일을 기도했습니다. 어제 오후에 교회에서 두 시간 주일 준비했습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땀으로, 속옷이 축축해지더군요. 그런데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있었다면 발냄새, 땀냄새 등등 정말 지독한 인내의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각자의 이유도 많고,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시설이 불편할 수도 있고,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보다 세상을, 인내보다는 정욕을 따라 살 이유가 많습니다.
비록 세상은 이러하지만, 저와 벤츄라 교회, 그리고 성도님들도 23.4%의 들어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순종에 임한 응답
우리는 응답을 결과에 집중할 때가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이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응답이지요.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근본적 응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다른날도 보았던 앉은뱅이를 이날따라 유독 주목하여 보았는가?
베드로의 마음에 임한 세 가지의 응답이 그를 보게 하신 것이며, 그를 향하여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강림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23.4%는 그냥 된 것입니다. 순종의 숫자입니다.
삶의 환경이나 처지를 극복한 숫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마가 다락방의 120 문도에게 성령강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날 성령의 역사가 그리고 성령의 충만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큰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들의 기도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동네가 난리가 났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 사람들이 놀라고 당황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술에 취했다고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성령의 강림과 성령의 충만은 그 자체가 응답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달라고 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성령이 주시는 마음과 인도하심으로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고,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 충만이 응답입니다.
성령강림 사건 후에 베드로의 설교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구원과 성령의 사역을 선포합니다. 최고의 설교가 선포되었습니다. 그중 38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구절에 신앙의 핵심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랬다면 베드로복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설교에 능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니, 더불어 말씀이 충만해 집니다. 설교가 터져 나옵니다. 말씀을 외치고, 말씀대로 행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충만한 것이 응답입니다.
영국의 크리스천 투데이의 플로렌스 테일러는 "연약함을 느낍니까?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성경구절 10가지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면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한 힘이 있다고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행1:8, 히4:12, 고후 12:9-10, 고후13:4, 사40:29
엡3:16. 욥12:13-15, 예10:12절 고전6:14
마19:26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충만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보고 외칩니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예수님의 마음이 충만했고,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충만하니, 그 마음과 믿음이 고통받는 영혼을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충만하면 상대방의 약점이 약점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예수가 충만하면 갈등이 화해와 용서로 변합니다. 이기적 존재에서 이타적 존재로 거듭니다. 희생할 줄 알고, 양보할 줄 알고 결론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강림 후의 초대교회는 어떠했습니까? 2장44-47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벤츄라교회와 성도가 추구해야 할 모습입니다.
셋째, 응답에 응답하라.
오늘 설교 제목이 “응답에 응답하라”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응답이라 생각하지만, 성령충만이, 말씀 충만이, 예수 충만이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응답받은 자입니다.
여러분, 이 예배 중에 임하신 성령님의 임재와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느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응답받으셨습니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응답받은 자로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앉은뱅이를 향한 베드로의 외침은 응답에 대한 응답입니다. 성령의 응답이 그로 하여금 응답하게 했습니다.
말씀의 응답이 그로 하여금 응답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응답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응답에 대한 응답을 할 때입니다.
주를 위하여 할 바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주저하고 응답하지 못하고 계시지 않나요?
주가 원하시는 것을 무엇인지 알면서도 주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기도하라고 마음 주셨는데, 멈칫거리고 있지 않나요? 이제는 응답에 응답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