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 가을
진주성과 남강변의 가을 전경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된 곳으로서 일명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 때의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고 왜구 방비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내성의 둘레는 1.7km이고, 외성의 둘레는 약 4km이다.임진왜란(선조 1592년~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때는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1592. 10.5~10까지의 가을에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3,800여명의 적은 병력으로 3만여 왜군을 대파했으며 1593. 6.19~29까지의 우기에 재침한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창의사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장군의 6만여 민,관,군이 10만의 왜군을 맞아 최후까지 항쟁하다 전몰한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중의 한곳이다.
남강변과 진주성의 촉석루
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 마루위에 마주보는 세 장사
一杯笑指長江水 한 잔 술로 웃으면서 장강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 장강의 저 물은 도도히 흘러가네
波不渴兮魂不死 저 강물 안 마르듯 우리의 넋도 없어지지
아니하리
학봉 김성일(1538 - 1593)은 임진왜란 발발(임진년 4월 13일) 이틀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4월 26일에
경상도초유사(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불러서 타이르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로 임명되었고 5월 15일경 진양(진주)에 이르러 조종도, 이로와 같
이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세 사나이의 결의와 비장함을 시로 표현하였다
월영산 호국사옆 서장대로 올라가는 돌 계단
서장대 전경
서장대에서 내려가는 성벽로
성벽에 설치된 천자,지자 총통
성벽 문 전경
좌측방에서 바라본 촉석루와 남강
정문인 공북문 안의 잔디광장
공북문 입구의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충무공 김시민 장군 어록(語錄) 나는 충의를 맹세하고 진주성을 지켜 국가 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나를 따르는 자 살 것이며 도망하는 자 멸할 것이니 감히 도망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나의 엄지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와 장지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
*선조 대왕이 내린 선무공신 김시민 공신교서 내용*
가선대부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상락군 김시민에게 내리는 임금의 글
왕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대는 외로운 성을 지키고 많은 적을 막아내어 이미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충성을 다 바쳤으니 그 공적을 가상히 여기고
그대의 노고에 보답하려면 의당 공훈을 표창하는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므로 이미 거둔 여러 사람의 공의(公議)를 따라 특별한
은총을 표시하고자 한다.
아! 그대의 타고난 기품은 웅대하며 호탕하여 일찍이 활 쏘고 말
타는 일을 전공하여 무과에 합격하였고, 자신에게는 충의를 실현
하겠다고 다짐하였으며 국가의 어려운 일에 힘을 다하였으니
그 마음가짐이 변함이 없었다.
지난번 국가의 운명이 막힘으로 인하여 섬 오랑캐의 날뜀을
당하였다. 우리나라가 백여 년 동안 평화의 시대를 겪은 나머지
온 백성이 굳센 뜻을 가지지 못하여 팔도가 바람 부는 대로
무너질 때에 한 명의 남아다운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 그대는 진양(진주)의 판관으로서 큰 기둥처럼 홀로 우뚝 섰다.
스스로 관찰사에게 청하여 용감한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차례
인근 군현의 적을 격파하였고 벌떼처럼 웅크리고 있는 도적의
군대를 쫓았으니 그 명성이 이로 인해 스스로 떨치고 이웃 고을이
그대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관군이 싸우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을 때에
오랑캐의 기병이 그 빈 틈을 타서 진주성을 공격해온다는 보고를
듣고 급히 본 성으로 달려 들어갔으니 죽음 보기를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 것이다.
돌을 져다가 성의 귀퉁이(女墻)를 중수함에 자신이 병졸보다 먼저
앞장섰고 맛있는 음식을 자신이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지라는 작은 것을 나누어 먹으니 백성들의 기뻐하는 마음을 얻을 수 있었고,
피눈물을 마시며 성위에 올라 지휘하면서 죽음으로써 함께 지켜
내자고 맹서하여 약속하였다.
밤낮없이 싸움을 독려하고 지혜로운 계책을 냄이 더욱 기발하였다.
적은 군사를 가지고 밖으로부터의 도움이 없이 싸웠으니
적은 군대를 가지고는 진실로 많은 수의 적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뿐 무리들이 마침내 멀리 도망을 치려하였다.
그러나 그대가 오히려 약한 군사를 가지고 강한 적을 제어할 수
있었음은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 공로가 이와 같으므로 이전에 상을 내림이 한 번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목사로 승진시켜 그대의 아름다운 명성을 포상하였고,
이어서 군사를 총괄하도록 발탁하여 큰 재목의 뜻을 펴기를
기다렸다.
뜻밖에 한 발의 유탄을 맞아 마침내 나의 만리장성이 무너지리라고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살아서는 어진 장수가 되었고 죽어서는
충신이 되었으니 그대는 어찌 유감이 있으리오.
그대와 더불어 이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었으나 편안하고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으니 이처럼 나의 가슴속에 아픔을 느끼고 있다.
그대에게 정승의 지위(병조판서)를 증직하여 자손을 등용하더라도 어찌 족히 의사(義士)를 표창함을 다 하겠는가?
오랑캐가 다시 와서 성이 함락되었으니 전일의 그대 공훈이 더욱
값지구나. 그대가 진주 사람들에게 사랑을 끼침이 이미 깊어서 그대의 공적을 기리는 상소가 간절하고 여론을 물어보아도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내 뜻도 또한 그러하다.
이에 그대를 선무공신 2등에 봉하고 두 계단의 품계를 올려주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한 등급을 높여준다.
아들이 없으면 생질이나 조카, 사위를 한 등급을 올려 주겠으며,
적장자는 대대로 이를 세습하여 그 녹을 잃지 않게 할 것이다.
(죄를 지은 경우에는) 영구토록 사면령을 적용할 것이다.
이에 노비 9구, 토지80결, 은7냥, 겉옷과 속옷의 옷감 1벌, 말 1필을 내려주니 이르거든 받으라. 아아! 앞으로 백 세대에 달할 때 까지
그 아름다운 명성을 지닐 것이며 후손에게 내려 전해질 것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없으므로 조용히 내 마음속에서 스스로
슬퍼한다. 그러므로 이에 나의 뜻을 보이고자 하니 생각건대
마땅히 이 마음을 잘 알아주겠지!
*공신 명단*
1등 이순신, 권율, 원균
2등 신점, 권응수, 김시민, 이정암 ,이억기,
3등 정기원, 권협, 유사원, 고언백, 이광악, 조경, 권준,
이순신(李純信). 기효근, 이운룡
만력32년(1604) 10월 일 (施命之寶)
☞.위 공신교서의 원본은 2007년 일본에서 찾아와 현재 국립 진주 임진왜란사 박물관에 영구 전시중에 있다.
영남 포정사의 정문
가을이 깊어가는 촉석루와 의기사 [위 사진10.20일 FUJI撮影]
☞.진주성 1차 전투때의 시기가 10월(1592. 10.5~10)이였는데 그때의 오늘쯤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장례가 있은후 민,관,군이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여 전열을 가다듬느라 낙엽이 뒹구는 성내는 온통 부산하였을것이다.깊어가는 가을날 진주성에서 그때 당시의 진주사람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돼새겨보며 사색에 잠겨 보았습니다
2008년 10월 21일[화요일]
♧진주성지킴이회 회장 염우섭♧
문화재청 진주성 지킴이회 "홈페이지 바로가기"아래 ▽ C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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