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tDVKxY9gFs
본문 요한복음 14:15-21 제목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당연히 너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말씀과 에베소서 6장의 말씀도 듣게 되겠고, 특히 아직 유교문화권인 현실에서 효도의 중요성은 여전히 강조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부모 사랑과 공경을 가르치고 강조하면 과연 자식들에게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겠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가르침으로 효도의 의무감은 어느 정도 심어 주겠고, 효도 행위 몇 가지를 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부모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까지 심어 주는 것은 아마 어려울 겁니다.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행태를 보면 부모가 모든 것을 다해 헌신하며 사랑했는데도 부모를 무시하고 거역하는 못된 자식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가 무능력해서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자기보다 부모를 더 사랑하는 자녀들도 있지요. 모든 게 완벽한 조건 속에서 자랐는데도 사랑 없는 냉담하고 차가운 사람이 되기도 하고, 너무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는데도 구김살 없이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이론으로 설명 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인 거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행태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자연스러운데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저절로 되지는 않지요. 많은 풍요와 권세를 누리는 복을 받아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가난과 힘든 환경 속에 오랜 세월 사는데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뜨겁고 순수하게 사랑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십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해주셨는데 첫째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아닙니까? 특히 요21장15-17절을 보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을 요구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말씀 앞에 서면, 그리고 사랑에 대한 교육을 잘 받으면 마음에 없었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과연 생겨나겠느냐는 거죠. 물론 몇가지 행동은 가능할 겁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고, 예물을 드리고, 기도시간을 지키고 등등,,, 하지만 사랑의 마음없이 그렇게 행동만으로 믿음의 길을 걷게 되면 믿음생활은 점점 힘겨워지게 되지요. 억지로 해야 할 때가 많아지니까요.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5절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우리가 계명과 말씀을 지키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키게 된다는 거죠.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이것에서 실수했지요.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긴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었지요. 그저 의무적으로,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한 의도였던 겁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을 잘 지켰다면 율법 잘 지킨 것은 하나도 자랑할 게 아니고, 공적으로 내세울 것도 아니지요. 하지만 사랑으로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킨 것이 자신들의 큰 업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이 남보다 더 의로운 자라는 증거로 여기기까지 했던 거죠.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너희들은 외식하는 자들이고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라면서 엄하게 책망하셨던 겁니다.
과연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을까요? 의무감이 아니라,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의지로, 즐겁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참된 나의 기쁨이 되게 할 수는 없을까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성령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해 주시고, 내 모든 삶을 이끌어 주시는 은총을 힘입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거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16절에 의하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17절에서는 진리의 영이시고, 또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무엇보다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서로 통하는 진실한 사랑을 전제로 해야만 의미가 있지요. 사랑하지 않으면 가까이 할수록 도리어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늘 함께 있고 싶고, 더 가까이 있고 싶어지게 되지 않습니까?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속에 계신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신다는 의미가 필수적으로 담긴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성령께서 지니신 그 사랑의 마음과 의지를 우리 안에 심어주시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 사랑의 의지 속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계명과 뜻을 기꺼이 따르고 순종하게 되는 겁니다. 나로서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말씀과 계명대로 살아가려는 의지도 부족하지만, 성령께서 내 안에 함께하심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기꺼이, 그리고 즐거움과 감사함으로 따르게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신다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사랑하게 되니까 15절의 말씀처럼, 그리고 21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서 내가 예수님과 더 일치되어가는 성숙함이 있게 되는 겁니다.
물론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도 어떤 것은 큰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부모는 자식의 문제가 아무리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라해도 억지로가 아니라 사랑의 의지로 기꺼이 그 부담을 받아드리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뜻과 계명이 부담스러워도 역시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자기 안에 품어 안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사랑 없이 지키는 계명과 헌신은 행하고 나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기의 행적을 내세우지요. 그것을 커다란 공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인 겁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행한 헌신과 계명 준수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지요.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앞세웁니다. 그래서 언제나 겸손과 온유함을 지니게 되는 거죠. 이처럼 성령의 임재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성공하게 하시기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시는 분이신 거죠.
마더 테레사 수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성공의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고, 사랑의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성공의 임무를 위해서는 능력과 실력과 권세와 힘과 요령이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사랑의 임무를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사랑으로 진실하게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꼭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지배하심 속에서 내 안에 진정한 사랑의 마음과 의지가 자리잡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으로 부활절 여섯째 주일입니다. 아직 부활절 절기인데도 오늘 주어진 성경 본문은 부활절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강림절에나 어울릴 본문이 주어졌지요. 아마도 부활절 다음이 성령강림절로 이어지기 때문에 미리 성령님에 대해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강요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마음이 심어지는 게 아니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조한다고 해서 부활이 믿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처럼 성령님의 임재와 감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분명히 믿게 되고,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의 계명, 그리고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을 억지로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이 성서일과로 주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임재는 인간이 인간 맘대로 불러올 수 있는 게 아니지요. 16절의 말씀처럼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즉 성령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영이십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생명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시고, 사랑의 영이시지요.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약속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우리는 늘 겸손히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더 신뢰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과 뜻 뿐만 아니라, 오늘이 어버이주일인만큼 우리의 육신의 부모님들도 의무감이 아닌 진정한 사랑의 의지로 공경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도 기꺼이 준행해 나아가는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늘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나 성령님의 임재와 성령께서 내 모든 삶을 주님의 뜻대로 지배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진실하게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고, 더 나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그 계명과 뜻대로 참되게 살아가는 것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삶을 우리의 삶에서 살아내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와 나와 항상 함께 하시기를 진실함과 겸손함으로 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더 깊은 부활의 생명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