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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崔茂宣]
신무기로 왜구를 섬멸한 화약의 아버지
출생 - 사망 1325 ~ 1395.4.19.
고려후기 사회는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무선(崔茂宣,1325~1395)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위대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시기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인물로 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무선 졸기(卒記) 1)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되뇌이는 말이 있었다.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태조실록] 1395년 4월 19일)
이 말은 그가 중국에 이어 고려인으로서 최초로 화약제조를 발명한 원동력이었다. 최무선은 고려인으로 태어났지만, 정작 [고려사]에는 기록이 별로 없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태조실록]에 실려 있는 졸기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남겨진 이유는 고려 말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데 최무선과 이성계가 함께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고령의 최무선이 세상을 뜨자, 태조 이성계는 최무선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사실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모아 그의 일생을 재구성해 보면, 최무선은 1325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永州)로, 시조는 최한(崔漢)이며 아마도 증조부인 최익겸 때에 이르러 영천에서 과거를 통해 개경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부친이 재직했던 광흥창은 고려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맡아 관리한 관청이었다. 광흥창사는 정5품의 관직으로, 관직 서열상 그리 낮은 관직이 아니다. 특이한 것은 7세손이었던 최무선 때부터 영성공파(永城公派)라는 별도의 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 초기에 그의 화약 발명의 공이 크게 인정받아 ‘영성공’으로 높임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영천 최씨 영성공파가 되었다.
최무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다만, [태조실록]에 천성이 밝고 방략(方略: 일을 꾀하고 해 나가는 방법과 계략)이 많으며 병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기는 고려왕조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때였다. 지배층은 권력을 잡기 위해 전쟁만 일삼았고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왜구가 빈번히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방에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최무선은 어렸을 적부터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자랐다. 아버지가 광흥창사였던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부친의 직업으로 보아 개성 혹은 예성강 하구의 바닷가에 살면서 고려 사회의 위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광흥창사는 예성강 하구를 통해 개성을 비롯한 전국으로 운반되는 곡식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당시 왜구는 예성강으로 통하는 서해안 여러 항구의 쌀과 곡식을 노리고 있었다. 최무선이 언제 어떻게 관리가 되었는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나가긴 했지만, 조상의 음덕, 즉 음직(蔭職)을 통해 관직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경로를 통해 관직에 나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기시(軍器寺) 소속의 하급 관리부터 출발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훗날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만든 것으로 보아 병기제작 관련 업무를 맡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집념으로 화약을 만들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든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집념의 결과였다. 당시 고려에는 화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장 달려가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정이오(鄭以吾)의 [화약고기(火藥庫記)]에 따르면, 최무선은 중국말을 잘했다고 하고 [세조실록]에는 그가 원나라에 가서 화포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전한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드는 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해 쓰면 되는 것이어서 귀찮게 국산으로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화약은 불꽃놀이와 같은 장난감에나 쓰는 것이지, 무기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무선은 달랐다. 그는 일찍이 화약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약을 이용한 무기도 개발하여 왜구 소탕에 사용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무선의 오랜 꿈이 이루어 진 것은 1377년(우왕 3) 10월의 일이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및 화기(火器)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된 것이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그가 화약 만드는 기술을 완전히 습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무선은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焰硝匠) 이원(李元)에게서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웠다. [고려사]에 따르면 최무선은 이원과 같은 동네에 살아 친하게 지내며 은근히 화약 만드는 기술을 물어보고 자기 집 하인 몇 명을 시켜 화약제조법을 완전히 익힌 다음, 고려 정부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화약 제조뿐만 아니라 화통도감의 설치 또한 그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한 뒤에 최무선은 도당(都堂)에 건의하여 시험해 보려 했으나, 관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속이려 하는 인물로 비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화약 제조를 건의했고, 그의 정성에 감동한 왕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게 하여 마침내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화포의 제조와 왜구의 섬멸
전라북도 군산시에 위치한 진포대첩지비. 1380년(고려 우왕 6년) 진포에서 있었던 고려군과 왜군의 해상전투에서 고려군은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앞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화통도감을 맡은 최무선은 곧장 화포 제작에 착수했다. 그는 곧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㷁" class="imagefont">)·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 다양한 화포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화약 무기 제조의 결과는 엄청났다. 1380년(우왕 8) 가을에 왜선(倭船)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그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였다. 최무선은 도원수 심덕부(沈德符)·상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화포를 배에 싣고 왜구가 들끓고 있는 진포로 갔다. 고려군에게 화약이 있는지 모르고 있던 왜구들이 배를 한곳에 집결시키자 최무선은 그곳을 향해 화포를 발사하여 배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 잔당들이 육지로 올라오자 이번에는 병마도원수였던 이성계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모두 섬멸시켰다. 진포 전투 이후로 왜구의 침략은 점차 사라졌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무선이 그리도 열심히 만들어 낸 화통도감은 고려 창왕 때(재위기간 1388-1389) 없어지고, 그 기구는 군기시(軍器寺)에 흡수되었다. 화통도감이 사라진 이유는 불분명하다. 왜구를 성공적으로 소탕한 뒤 더 이상 필요 없어져 버린 것인지, 아니면 고령이 되어 더 이상 공직 생활을 할 수 없던 최무선을 계승할 후계자가 없어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화약 제조법, 조선으로 이어지다
최무선은 1395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아들 하나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은 바로 아버지가 진포 싸움에서 왜구를 물리친 그 해, 세상에 태어났다. 최무선이 죽었을 때 최해산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최무선은 아내 이씨에게 ‘아들이 장성하면 이 책을 주라’면서 화약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을 남겼다고 한다.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최해산은 화약 제조법을 습득했고, 이후 1401년(태종 1) 군기시에 특채되어 화포 개발 실험에 주동적 역할을 했다. 야사에 따르면 최해산은 장남이 아니고 차남인데, 장남은 화약 실험 중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설도 전한다. 우리나라 무기의 역사를 바꿔 놓은 최무선이었지만, 아쉽게도 [고려사] ‘열전(列傳) 2)’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와 함께 진포전투에 참여한 나세 장군만 [고려사] 열전에 이름이 올랐다. 나세는 원나라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홍건적과 왜적을 물리친 공을 남긴 장군이다. 최무선은 [고려사] 나세전에 살짝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무기는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그의 아들 최해산을 통해 조선왕조의 중요한 국방기술로 전수되었다. 세종대에 보다 향상된 화약제조법이 나오게 된 것 또한 최무선 부자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는 조총을 앞세운 왜군이 조선군을 압도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보다 화포 기술에서 앞서 있었던 것도 최무선의 화약제조 덕분이었다.
출처:(인물한국사, 정성희)
역사의 도시 군산
새만금과 함께 떠오르는 곳
21세기를 약속받은 땅이 군산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면서도 군산은 숱한 역사를 간직한 도시다. 진포대첩의 자랑스러운 역사 현장이 그곳에 있다. 금강과 금만경이 서해로 대단원을 이룬다. 기름진 들과 풍부한 바다, 고즈넉한 산들이 어우러진 천혜의 비경도 때묻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첨단산업도시로, 국제무역항으로 크고 있는 도시가 군산이다. 11말 기준으로 27만 2,503명이 살고 있다.
새만금 관광은 하루로는 부족하죠
새만금 방조제는 이제 한국의 관광지가 됐다. 새만금의 도시 군산에 도착해 새만금을 가려면 제일 먼저 찾는 곳에 비응관광어항이 있다. 이곳은 대한민국 최초의 다기능 관광복합 어항이다. 서해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조망대가 있다. 비응항의 상징인 빨강색과 하얀색 두개의 등대가 보인다. 수산물 센터와 많은 횟집들이 입맛을 돋운다. 서해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생선을 즉석에서 맛볼 수 있다. 이곳에서 유람선을 이용해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고군산군도를 둘러볼 수 있다. 비응관광어항 주변에는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돼 있다. 파란 하늘을 따라 늘어선 풍차는 연인들의 데이트 명소다. 방조제 바다낚시는 낚시꾼들에게 큰 인기가 있다. 비응항 주변을 돌아보고 새만금 방조제로 진입한다. 세계 최장 33㎞의 새만금 방조제가 한눈에 펼쳐진다. 새만금 사업은 군산시 비응도, 신시도,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까지의 바다를 메워 국토를 확장하는 사업이다. 장장 20년이 걸렸지만 아직도 미완이다. 세계 최장의 방조제가 개통됐지만 내부개발은 더 많은 시간과 재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새만금 사업이 완료돼 고군산 국제해양관광지개발, 비응도 관광어항 개발 등이 매듭되면 군산은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급부상하게 된다.
방조제 중간에 배수갑문 2개가 설치돼 있다. 담수호의 수위조절과 홍수량을 조절하기 위해서다. 신시도와 가력도에 있는 갑문의 위용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폭 30m, 높이 15m, 무게 5백t의 거대한 수문 36개가 바다와 호수 쪽에 이중으로 설치돼 있다. 배수갑문이 있는 신시도는 새만금 방조제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섬이다. 현재는 육지와 연결돼 있다. 신라시대 대학자인 최치원이 거주했던 유서 깊은 섬마을이다. 군산의 대표사진으로 자리잡은 서해의 비경이 이곳에서 나왔다. 그만큼 한눈에 펼쳐진 빼어난 경관이 탄성을 만든다. 갯바위낚시, 선상낚시, 갯벌체험을 할 수 있다.
1 군산에서는 가족들이 갯벌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수두룩하다.
2 장수 수분령에서 발원한 금강은 군산시 금강하구둑을 거쳐 서해로 나간다.
3 비응관광어항 주변에 조성돼 있는 풍력발전단지.
4 근대역사문화유산의 하나인 구 군산세관.
고군산군도의 대표섬 선유도 해수욕장
아름다운 여러 섬들이 모여 천혜의 비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 고군산군도다. 그 안에 선유도 해수욕장이 자리했다. 선유도해수욕장은 선유낙조와 명사십리, 삼도귀범 등 선유팔경이 유명하다. 바다낚시, 갯벌체험 등 체험관광이 가능한 전천후 관광지이다. 섬과 섬을 연육교로 연결한 장자교와 선유교위에서 밤에 가족과 함께 환상의 야경을 볼 수 있다. 주변 망주봉과 선유봉을 비롯한 등산코스가 압권이다. 섬에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얼마나 행복할까. 선유도와 무녀도, 장자도를 잇는 9.28km의 하이킹코스가 이곳에 있다. 최고의 국민 관광지로 각광받는 이유다.
이야기가 있는 군산 도보여행 구불길
군산에서는 스토리 여행이 가능하다. 군산의 동부권역인 개정, 성산, 나포 등 6개면 3개동에 대해 4개의 도보여행 코스가 만들어졌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수풀이 우거져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여행길이라는 뜻의 ‘구불길’이라는 이름이다. 도보여행의 4개 코스는 두 달여간에 걸쳐 직접 골목골목을 찾아다녀 개발됐다. 실제 도보여행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각 코스는 15~20km 거리다. 일반 성인이 걸어서 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일정 중에 식사를 하거나 농가체험을 하는 등 여유롭게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군산은 바다와 강이 만난다. 평야와 나지막한 동산이 더 어우러진다. 아름다운 풍광이 도보여행지로 제격인 셈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와 역사의 흔적을 만나면서 걷는 여행길. 여행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편안한 휴식이 제공된다. 도보여행 1코스는 비단강길이다. 비단처럼 펼쳐진 금강과 인접한 채만식 문학관, 금강철새조망대, 오성산, 나포십자들 등을 둘러보는 코스. 문학과 역사, 자연과 생태가 어우러져 여행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2코스 햇빛길. 생태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된 즐거운 자연학교에서 시작한다. 망해산, 임피초교, 채만식 생가터, 깐치멀 농촌체험마을로 이어진다. 오르막이 많아 힘든 것은 감수해야 한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과 무성한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길이 땀방울을 식혀준다. 3코스 큰들길은 전국 최우수브랜드 쌀인 ‘큰들의 꿈’을 재배하는 대야들을 가로지른다. 아름다운 채원병 가옥을 들러 숨을 고른 후 최호장군 유지, 발산리 유적지 등을 지나며 과거와 소통하게 되는 매력적인 코스다. 4코스 구슬뫼길은 마치 원시림처럼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군산저수지 주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이 보인다. 평화롭고 옥산(玉山)이라는 지명이 말해주듯 저수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들이 마치 구슬처럼 아름답다. 이 코스를 따라 가다보면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쌍천 이영춘 박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각 코스에는 인접한 식당과 휴게소의 위치와 코스주변에 저렴하게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민박, 찜질방 등 숙박가능업소,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약수터 위치 등의 정보가 제공된다. 코스 인근에 울외장아찌, 밤호박, 토마토, 도라지가공품 등 농특산물 재배지를 경유하도록 안내한다. 농가체험 또는 농특산물 산지 구매가 가능하도록 하여 여행객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여행자들의 코스 이탈방지를 위해 코스 중간 중간에 리본 등을 부착하거나 스프레이식 페인트를 이용하여 노면, 전신주 등 다양한 곳에 방향을 표시하는 배려도 돋보인다.
도심 속 여유로운 쉼터, 은파관광지
햇살 받은 물결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모습. 이 때문에 은파라 했다. 조선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는 역사 깊은 곳이다. 저수지를 중심으로 인근의 작은 산들을 포함하는 70여만평이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다. 봄에는 화사한 벚꽃길을 만들어 주고, 여름에는 아카시아 향기와 느티나무의 짙은 녹음을 만끽할 수 있다. 가을에는 산책로를 따라 알밤을 주우며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저수지를 한 바퀴 도는 약 6킬로미터의 순환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은파의 상징인 길이 370m, 너비 3m의 국내 유일의 보도현수교로가 나타난다. 은파를 가로지는 ‘물빛다리’ 위에서 호수에 비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여유를 느낄수 있다. 야간에는 조명으로 연출된 빛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황금빛 낙조로 물드는 4계절 생태관광지 금강호 관광지
백제의 관문이었던 금강하구에 1990년에 하구둑이 완성됐다. 주변의 갈대숲을 찾아 날아가는 겨울철새의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 특히 가창오리의 군무가 환상적이다. 금강철새조망대는 전국 최초로 만들어졌다. 국내 최고의 매머드급 360도 회전식 조망센터다. 금강일대의 철새를 쉽고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철새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볼 수 있는 강점을 지녔다. 11층 조망대에서 철새와 금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고배율 망원경은 늘 인기가 있다. 조망대 1층에는 조류의 진화과정과 철새들의 장거리 비행원리, 조류과학 등이 설명된 상설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생태학습장으로서 가치도 인정받는다. 120석 규모의 영상관에서는 금강에 서식하는 철새들의 생태를 관람한다. 동물표본실과 수족관, 곤충 표본 체험관, 철새신체탐험관, 금강조류공원, 부화 체험장, 탐조회랑 등도 색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서해 낙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금강의 황홀한 노을을 10층 회전 레스토랑에서 지켜보면 음식의 맛에 자연의 신비로움이 더해진다. 철새조망대 인근에는 일제 강점기의 세태를 풍자한 ‘탁류’의 작가 백릉 채만식 선생을 만날 수 있는 문학관이 있다. 사계절 체류형 생태 관광지 조성을 위해 종합개발을 추진중인 금강호 관광지가 대기중이다. 진포시비공원, 진포대첩 기념탑도 함께 둘러보면 금강 여행의 재미는 배가 된다.
신나게 달리는 군산 새만금 시티투어
새만금 방조제와 근대문화유산을 연계한 탐방이다. 오전 9시10분부터 시작해 오후 6시까지 하루 동안 새만금과 근대문화유산, 금강철새조망대, 채만식 문학관, 재래시장 등 군산시 전역을 돌아보는 코스다.
세계 최장을 자랑하는 33km의 새만금 방조제.
군산시가 월요일을 제외한 주6회 운행한다. 새만금 방조제 코스와 고군산군도 코스로 운영중이다. 올해부터는 유료다. 그 대신 군산시의 정체성을 살린 근대문화 중심도시의 개발과 근대역사 경관 조성사업 등이 추가될 예정이다. 시티투어버스 참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군산시 문화관광홈페이지(http://tour.gunsan.go.kr)나 관광진흥과(450-6110)로 문의하면 된다. 시티투어 탑승료 19세 이상 성인 5000원, 초·중·고 및 경로·장애인·군인은 2500원이다. 20인 이상 단체의 경우 각각 1000원, 500원씩 할인된다.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근대역사문화유산
군산은 근대문화도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된 항구도시다. 다른 개항 항구와는 달리 오직 쌀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상공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군산은 일본인들의 도시였다. 호남, 충청의 쌀은 일본으로 강제 수출됐다.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했던 역사적 아픔이 군산에 서려 있다. 수탈의 흔적들은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를 통해 그려진다. 과거문화의 자료들을 근거로 근대문화를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현장 체험학습의 장이 많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군산의 인구 중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5:5 정도나 됐다. 내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이 주거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원도심(구도심 지역)의 건물 가운데 약 20%는 일제시대 지어진 가옥이다.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는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1909년에 창건됐다. 미루어 보아도 이전에도 일본인들이 군산에 많이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동국사는 일본 조동중에서 ‘금강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군산에 있던 5개의 일본 사찰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동국사에서 해망동을 향해 몇 걸음 옮기면 구 히로쓰 가옥이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두목 하야시가 게다를 신고 걸어 나오는 장면이 촬영됐다고 해서 ‘하야시 집’으로 불린다. 이 집은 포목점을 경영해 큰 돈을 번 뒤 군산부의회 의원을 지낸 히로쓰의 저택으로 일본풍의 정원이 아름답다.
월명공원 아래로는 해망굴이 있다. 1926년 10월에 개통된 터널로써 (구)군산시청 앞 도로인 중앙로와 수산업의 중심지인 해망동을 연결하고자 만들어진 반원형의 터널이다. 해망굴에서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월명공원 전망대에서 금강이 서해와 몸을 섞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내항에 자리한 구 군산세관은 100년 전에 완공(1908년 6월)된 건물.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 등 건축재를 수입해 유럽 양식으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군산항 개항 이후의 모습과 군산세관의 옛 모습들이 전시되어 있다. 부잔교도 수탈의 상징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큰 배들이 부두에 정박할 수 없자 수위에 따라 높이를 자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부잔교를 설치하였다. 1934년에 200만석의 쌀이 이곳에서 실려갔다. 군산간호대학 근처의 이영춘 가옥은 ‘농촌보건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영춘 박사가 40여년을 살았던 집이다. 이 집은 본래 대농장주였던 구마모토의 별장으로 지어졌다. 한국과 일본, 서양식이 모두 가미된 것이 특징이다. 일제시대 최대 규모의 농장이었던 구마모토 농장은 1부 2도 26면에 걸쳐 있었는데, 땅의 규모는 여의도의 40배에 이르고 소작농만도 2만여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구마모토는 소작농의 진료를 위해 이영춘 박사를 불러왔다. 이 박사는 해방 후 구마모토가 물러간 뒤에도 이곳에 남아 농부들을 진료하다 1980년 세상을 떴다. 개정면 발산초교에도 아주 특별한 근대유산이 남아 있다. 이곳은 시마타니라는 일본인 소유의 쌀창고가 있던 자리로 시마타니는 문화재에도 관심이 많았다. 주변 지역에서 수집한 문화재를 금고에 보관했다. 탑이나 석등 같은 규모가 큰 석물들은 금고에 넣지 못하고 정원석으로 활용했다. 그가 수집했던 석등(보물 234호)과 5층 석탑(276호)을 비롯한 20여점의 석물은 발산초교 건물 뒤편에 지금도 남아 있다. 한 켠에는 1930년대에 콘크리트로 지은 3층 규모의 시마타니 금고가 있다. 이곳은 도자기나 서화 등을 보관하던 곳으로 당시 미국에서 수입한 이중 잠금장치가 된 쇠문을 달았다.
출처:(신택리지, 박용근, 경향신문)
2024-11-09 작성자 명사십리
적산가옥[敵産家屋]
정의
1945년 8·15해방 이후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남겨진 일본인 소유의 주택.
개설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인 소유의 주택을 비롯한 기업, 토지 등 각종 부동산과 동산류가 이에 포함되는데, 그중 주택은 ‘적산가옥’이라 칭한다.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났어도 현재까지 익산을 포함한 전라도 지역에는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치욕의 날이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의한 급속도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경험하였다. 1920년 200여 개에 불과하였던 공장과 기업이 일본 자본으로 인하여 1930년에 이르러 800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1945년 8월 15일 패망한 일본인들은 토지와 주택, 공장과 기업들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하였다. 이 적산 가운데에서 가장 가치가 크고 중요한 것은 기업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진주한 미군정은 애초 약속과 달리 일본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였다. 합자회사의 경우 한국인 주식의 소유권은 전면 부정되었다. 1945년 12월 6일에서야 적산에 대한 명확한 처리 방침을 정하였다. 남한 내 모든 일본인 소유의 공사(公私) 재산을 미군정이 접수한다는 법령 제33호를 공포하고 일본 기관이나 단체, 조합의 재산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인 소유 적산은 미군정 소유인 귀속재산이 되었다.
수는 많았지만 기업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고 매매가 쉬웠던 적산가옥(敵産家屋)은 그마저도 처리 방침에서 제외되었다. 과거 일본인과 연고가 있거나 미군정에 줄을 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쫓겨 가는 일본인들에게서 싼값에 인수하여 한몫을 잡으려는 자들이 먼저 적산가옥을 가로챘던 것도 한몫을 하였다. 심지어 일본인으로부터 집과 가구 등 재산을 매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위를 이용하여 적산가옥을 가로채는 경우도 많았다. 식민지 시절, 조선 땅에 있는 일본인들의 건물, 토지, 공장 등은 해방 이후 자연스럽게 주인을 잃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가 몇 안 되는 한국 기업가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이를 ‘적산불하(敵産拂下)’라고 한다.
익산의 적산가옥
적산가옥은 군산, 포항, 목포, 부산, 인천 등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였던 항구도시에 많이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교통의 요충지로 도시가 생겨나고 발달한 이리[현 익산] 지역에도 일본인의 거주가 늘어나면서 많은 건축물들이 생겨났다. 익산역 주변 10여 채를 비롯, 춘포 등에서도 적산가옥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중 2000년대 이후 가장 이슈가 되었던 것은, 1920년대인 일제 강점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2층 목조 여관 건축물이다. 2층 목조 여관 건축물은 현재 익산시 평화동 옛 이리극장 앞에 있던 순천여관[나루토여관]이다. 순천여관 주변은 근대 이리역을 중심으로 상권과 주거가 가장 활발하였던 지역으로, 지금도 많은 적산가옥이 남아 있다. 하지만 순천여관은 복원과 활용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익산시 평화지구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인하여 안타깝게 철거가 되었다. 반면, 같은 지역에 포함되어 있던 익옥수리조합은 보존되었다. 익산은 춘포역사[국가등록문화재 제210호], 익산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와 창고[국가등록문화재 제181호], 익산 주현동 구 일본인 농장 사무실[국가등록문화재 제209호],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211호],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국가등록문화재 제180호] 등의 근대 건축물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 중 익산 구 익옥수리조합 사무소와 창고는 익산왕도미래유산센터로,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은 익산근대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평가와 의의
전라북도 익산시에서는 적산가옥을 활용하여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확산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학술 조사 연구, 건축물 기록화, 문화재 보수 및 정비 등을 통해 지역의 관광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한편에서는 일제 강점기 적이 남기고 간 재산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고 국민 혈세로 보존하는 것은 국민 정서에 어울리지 않으며 문화재의 의미와 전혀 맞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좀 더 큰 시야로 볼 때 적산(敵産)은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수탈당한 재산을 되찾았다는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맞을 것이다.
참고문헌
『익산의 근대문화유산』(익산문화원, 2010)
정재형, 「적산(敵産) 불하와 농지 개혁」(한경신문 경제교육연구소, 2009. 12 .27.)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4-11-10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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