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케묵은 골방 서고에나 지내고 있는 게 나을 법한 이야기를 굳이 지금 꺼내고자 하는 이유는 최근 들어 정상적으로 사용치 않는 용어가 난무하고(NL우파, 교조주의, 등등..) 월드컵과 광화문 대규모 촛불시위등 기존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굵직한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 저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부족하나마 제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혹시 짧은 소견이나마 도움이 되는 분들이 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1. 광주항쟁(광주학살), 미문화원 방화사건, 그리고 C.N.P 논쟁
1980년 광주학살이 있기 전에 미국에 대한 대부분 국민들의 인식은 '북괴군에 의한 6.25 남침으로부터 우리 대한민국을 지켜준 고마운 국가, 우리의 우방, 영원한 맹방, 존경해 마지 않는 강대국' 이었습니다. 하지만 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내부가 혼란했던 과정에서 12.12 군사쿠데타에 이은 80년 5월 광주학살을 계기로 해서 국민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것은 대한민국 군인의 군사작전권을 쥐고 있는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이 전두환, 노태우등 군부 강경파의 군사쿠데타를 묵인한 미국에 대한 책임을 묻고 거기에 관련성 문제를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80년 5월 광주학살 시기에 광주로 가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어 고립되어 있던 광주 민중들은 주한미군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도 했지만 학살 전야에 이미 광주시내에 있던 주한미군과 그 가족들, 군속들은 전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고 백주 대낮에 누구하나 말릴 사람없이 버젓이 임산부의 배를 총검으로 찔러 태아를 난자하고, 여고생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초등학생 어린 아이의 머리를 총알이 관통하는 희대의 학살극이 자행된 것입니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은 반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심지어는 김종필조차)과 함께 폭압적인 통치가 시작하며 대한민국은 마치 숨을 쉬고 밥을 먹으니까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이지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 어떤 반대 의견도 용인되지 않는 공포정치의 시기였습니다. 이 때 이 침묵을 깨고 전두환 군사독재의 양민 학살을 묵과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최초의 사건이 있었으니 그 것은 바로 김현장, 문부식의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빨갱이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으나 숨죽여 조용히 지내던 이 땅의 양심세력들을 깨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학이라는 열린 공간을 이용해 먼저 자각한 학생들은 교내에 사복경찰이 상주하던 그 시절에 밧줄로 몸을 감고 옥상에서 매달려 유인물을 배포하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잔인성과 미국의 책임을 묻는 시위를 벌여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전국적으로 투쟁 열기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85년 2.12 총선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전면에 내걸었던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 : 공동대표 김대중 김영삼)가 중심이 된 신민당이 약진하면서 군사독재정당인 민정당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야당이 출현하였으며 이에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85년 대학내의 시위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학원안정법이라는 악법을 입법하려 하였으나 야당 및 재야 단체등의 거국적인 반발에 부딪혀 무산되기도 하였다.
이 당시 운동권 내부에서는 현 단계 한국사회 변혁 운동의 논리에 대해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 것이 이른바 C.N.P 논쟁이고 그 논리의 대가가 바로 지금 개혁국민정당 대표를 맡고 있는 유시민씨었다.
이 논리는 매우 복잡한 이론으로 여기서 논쟁을 벌이자는 차원이 아니므로 요점만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겠다. 당시 현 단계 한국사회의 규정과 변혁운동의 대상과 동력과 주체를 무엇으로 봐야하는가라는 논쟁의 접점은 세 가지 였는데 크게 CDR(시민민주주의혁명론Cvilization Democratic Revolution) NDR(민족민주주의혁명론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PDR(민중민주주의혁명론 People Democratic Revolution) 즉 CNP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운동권 내부의 치열한 사상투쟁 끝에 전두환 군사독재의 학살책임을 묻는 동시에 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된 미국에 대한 책임도 더불어 묻는 것이 이 논쟁의 핵심이며 결국 NDR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이 시기는 대략 1980년 광주학살 직후부터 1985년까지이다.
2. 강철과 최민, 건대사건, 그리고 AINDR AFNDR
젊음을 무기로 정의감에 불타고 새로운 것에 민감하며 학습효과가 뛰어난 특성은 학생운동을 변혁운동의 주요한 주체로 떠올리게 된다. 당시 대학생들의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항해 스크럼을 짜거나 짱돌을 던지는 행위는 곧 학교의 퇴학, 구속까지 각오한 굉장히 결연한 의지였다. 상대적 시위의 자유가 보장된 상태에서 시위 한 번 했다고 감옥에 가는 일이 거의 없어진 지금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당시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현 단계 민족민주혁명의 주 타겟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반제(반미)민족민주혁명(Anti-Imperior NDR)이냐, 반파쇼민족민주혁명(Anti-Fascio NDR)이냐로 갈리게 되며 그 것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같은 서울대 법학과 출신인 김영환(강철)씨와 최민씨였다.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AINDR론자와 일부 AFNDR론 자들이 학생운동 내부의 사상통일을 이루는 전국대회 형식의 집회를 1986년 건국대학교에서 열게 되었는데 일명 애학투련(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결성식 사건으로 불리는 건대 사건이다.
사전에 미리 정보를 입수한 전두환 정권은 헬기까지 이용하는 등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집회를 열고 해산하려고 한 학생들 약 2,000여명을 쥐몰듯이 몰아서 결국 건국대학교 안에 10월 28일부터 10월 31일까지 3박 4일간 갖혀지내게 만들었으며 언론을 통해 연일 빨갱이로 몰아가다가 결국 강제진압하였고 단일 사건으로는 건국 이래 최대의 구속자인 약 1,283명의 학생을 일시에 구속하여 학생운동을 궤멸시키려 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로 인해 나라 안팎으로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학생들이 대부분 집행유예 등으로 나오게 되며 학생운동 내부에서 선도투쟁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대중투쟁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게 되었다.
3. 전대협과 6월 항쟁, 대통령 선거 NLPDR CA(PP PD)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강철은 "강철서신"이라는 팜플렛 형식의 문건형 책자를 제작하였는데 그에 대한 반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학생운동 내부에서도 혼란스러웠던 미국에 대한 인식, 북한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매우 영향력이 컸던 그 책의 확산을 계기로 대부분의 학생운동권에서는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National Liberation of People Democratic Revolution)이 대세를 이뤘고 AFNDR론자의 일부가 더욱 급진적인 이론인 CA(제헌의회 Constitutional Assembly)를 주장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및 입법, 사법체계를 전부 부정하고 민중혁명으로 정권을 타도하여 민중이 주도하는 제헌의회를 소집하자는 현실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 매우 급진적이고 과격한 논리였다. NLPDR론자들이 선도투쟁을 대중투쟁으로 전환해야한다는 고민을 하던 시점에 CA론자들은 관공서 방화, 습격등을 주로하는 등 학생운동의 과격성에 대해 크게 부각시키는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86년 건대 사건의 교훈을 통해 현실과 괴리된 선도투쟁보다는 소수 운동권 학생들만의 투쟁이 아닌 다수 학생들이 함께 하는 투쟁, 국민과 함께 하는 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NL론자들은 이후 각 지열별로 총학생회의 협의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그 것의 이름이 바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였던 것이다. 전대협은 "한 사람의 열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을"이라는 캐치프레이드로 보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학생회, 국민들의 정서와 괴리되지 않는 학생운동을 기존에 운동권 학생과 일반학생으로 분리되었던 정서를 상당히 많이 완화시키며 6월 항쟁을 이끌어내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당시 6월 항쟁은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 전체 학생의 과반수 이상이 투쟁에 참석할 정도로 호응을 이끌었으며 30대 직장인 넥타이부대, 농민회, 노동단체등도 함께 결합하여 4.19 혁명 이후 최대의 시민항쟁으로 발전하여 결국 대통령 간선제인 호헌을 고수하던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을 굴복시키고 당시 민정당 차기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의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켜내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직선제로 치뤄진 87년 12.16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화세력의 양대 축이었던 양김씨의 후보단일화 실패로 결국 노태우 군사정권의 연장을 갖고 오게 하였으며 6월 항쟁은 미완의 시민 항쟁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4. 3당 야합, 조국통일투쟁과 임수경 방북, 강경대 사건, NL과 PD의 정체성의 혼란
87년의 대선 패배와 88년 총선에서의 지역 구도의 정착으로 운동 세력은 패배주의가 팽배하며 무기력해지기 시작하였으나 88년 남북학생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조국통일투쟁으로 그 활로를 다시 개척하였다. 뒤 이어 89년 외대생이었던 임수경양이 평양에서 열렸던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한의 학생대표자격으로 방문하였고 북한 주민들에게 엄청난 쇼크를 안겨주었다. 이에 여소야대 정국으로 고전하던 집권당인 민정당과 차기 대선을 노리는 김영삼, 그리고 영원한 2인자 김종필의 이해 관계에 입각한 3당 야합으로 거대 여당인 민자당이 출현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인 소련 체제가 붕괴되고 잇따라 동구사회주의 내부에 민주화의 요구가 확산되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축을 이루던 냉전 체제가 붕괴되고 미국이 견줄자 없는 세계 초강대국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소련의 마지막 연방대통령이었던 고르바쵸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을 표방하며 보다 발전된 사회주의를 주장하였으나 내부 체제가 먼저 붕괴됨으로써 보다 연구할 과제가 많이 남아있지만 현상적으로는 체제의 우수성에서 양립하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패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소련의 붕괴와 동구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개편으로 일대 혼란을 겪게 되는 운동권 내부에서는 사회주의와 맑스-레닌주의(Marx-Lenin)주의를 다시 보기 시작하였고, 운동권 내부의 사상적, 이론적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91년 3당 야합 정당인 반민자당 투쟁으로 초점이 모아지면서 국민투쟁을 다시 이끌어냈으나 강경대의 죽음과 이에 항의하는 박승희의 분신사건, 잇다른 제2, 제3, 제4의 분신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반민자당 투쟁은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이라는 희대의 이미지 조작사건으로 급속히 냉각되게 되었고 이어 92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며 30년 군사정부가 청산되고 문민정부가 수립되게 되었다.
5.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그리고 월드컵, 광화문 촛불시위
김영삼은 초기에 군사정권의 재집권 쿠데타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군부 인맥인 하나회를 해체시키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등 의미있는 일들도 하였으나 경제적 무능함, 외교적 무능함에 기인하여 94년 북핵사태 때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북한과 미국의 뒷꽁무늬만 쳐다보는 신세가 되었으며 97년 국가부도 위기를 초래 IMF 구제금융을 받게 하였다.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특유의 경제적 식견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세계의 경제전문가들이 향후 20년 이내에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제위기를 무난히 타개하였으나 이 과정에 많은 실업자들이 양산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원인은 부실 기업과 이전 정권의 부정부패, 정경(정권과 재벌)유착, 권언(권력과 언론)유착에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동구체제의 개편과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를 지나오는 10여년 동안 운동세력 내부에서는 정체성에 일대 혼란을 가져오며 80년대와 같은 치열한 논쟁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 간혹 나오는 민노당은 NL우파에 의해 장악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겠다.
80년대 NL론자들, PD론자들이 지금도 그 때의 방식을 고수한다면 역시 문제가 많다고 본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역동적인 사건이 바로 2002년 6월의 월드컵과 12월의 광화문 촛불시위이다. 운동권의 관점에서 봤을 때 여지껏 운동의 대상이었던 일반대중들이 주체로 나서서 자발성에 근거하여 역동적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광장 문화가 표출된 것이다. 과거 구속은 물론 목숨까지 거는 결연한 각오를 한 소수 운동권 세력에 의해서 주도하는 투쟁이 아닌 자신의 뜻과 의지를 촛불 하나에 빨간 티셔츠에, 태극기에 담아 표현하기 시작한 일반시민들이 바로 21세기 변혁운동의 주체가 된 것이며 그 배경에는 바로 인터넷과 네티즌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20세기의 마지막 대통령인 김대중 대통령의 시대가 가고, 21세기의 첫 번째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가 오고 있다. 국제정세는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세계 유일의 패권국가인 미국은 호전적인 공화당 강경파들과 군산복합경제의 미국경제발전논리에 의해 반대국가인 이라크, 이란, 북한, 쿠바, 리비아등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여 호시탐탐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에 맞서 세계 평화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영국은 미국의 충실한 동맹자 노릇만 할 뿐 전혀 견제를 하지 못하며 독일, 프랑스등은 힘이 미약하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핵무장을 꾀하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원죄로 많은 국가들의 견제를 받고 있고, 러시아 또한 국내 문제 해결에만 급급하여 미국을 견제할만한 형편이 못된다. 거의 유일하게 중국만이 등소평, 강택민,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개혁개방형 사회주의체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켜 미국에게 위협적일 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등 4대 강국에 둘러쌓인 한반도는 남과 북이 55년 분단체제가 유지되며 서로 변화하였으나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의 북한 선수단 및 응원단 파견등으로 화해 무드 및 상호간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제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통일의 기운이 조성되고 있다.
21세기는 중국, 일본을 비롯한 통일 한반도의 동북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은 전문가들이 앞다퉈 예견하고 있으나 그 과정에서 터진 북핵문제, 미국의 위협이 큰 변수가 되고 있으며 이를 주변 강국이 아닌 우리 민족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로 인식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북한정부가 힘을 합쳐 풀어나갈 때 대외 의존적인 정치, 경제, 국방등 모든 면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주권국가 대한민국을 넘어서 남과 북이 하나로 합치는 통일 한반도가 될 것이다.
21세기는 영원한 적성국가도 영원한 우호국가도 없다. 그만큼 국제사회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국제외교문제를 풀어나간다. 여기에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으며 과거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반외세를 주장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가장 현명하게 가장 영리하게 가장 현실적인 것을 기반으로 국민의 뜻을 모아 함께 나가는 자주적인 대한민국, 나아가 통일한국이 되길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자주적인 대한민국 만세, 위대한 통일한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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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정말 대단한 글이군요. 정리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01/0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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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 햐..오랬만에 옛날 생각나네요.. -[01/0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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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씨: 움.....좋습니다. 일목요연......몰랐던사실들도 알게 되엇네요...산맥처럼님 펜이 되어가는중..ㅋㅋ -[01/0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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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사소한 몇 가지에 대한 보충>>
부산미문화원방화는 화염병투척이 아니라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지른 겁니다.
최민은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임
86년 건국대사건은 AIPDR론의 세력확대에 의한 반제론에 의해 주도된 집회였고
NDR론자들은 "민민학련"이라는 별도의 조직으로 존해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대학별 연합조직은 민민학련뿐이었는데 반제론의 확대로 애학투련이라는 조직이 새로 생긴 것이다.
건국대사건의 구속자는 1283명으로 알고 있다.
예속과 함성은 강철(김영환)이 아니라 김성만,양동화 - 소위 유학생간첩단사건 관계자-에 의해 제작된 것임.. 강철이 제작한 것은 "강철서신"임
반제론이 대세를 이룬 것은 강철서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철서신의 강력한 문제제기에 의해 서울대 ,숙대등에서 반제론이 대세를 이룬 것이고 ...전 대학에서 반제론이 대세를 이룬 것은 오히려 고대등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학생운동, 정확히 말하면 전대협의 결성과 성장에서 서울대의 퇴조와 고대 , 한양대의 성장과 연관되어 있다.
나머지는 나중에....... -[01/0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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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씨: 앞으로 이런글들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용어나..잘 모르는사건에 대한 설명들요... -[01/0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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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처럼: 거시기님 감사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의도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님의 조언에 따라 몇 자 수정합니다. -[01/0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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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 감사드립니다. 너무 멋지세요..산맥엉아...^^ -[01/0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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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꽃돼지: 80년대를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글이네요... -[01/0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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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정말 저역시도 산맥처럼님께서 범상치않은 분인줄은 알았지만. 이정도로 박학하신줄은 몰랐네요.. 와우~ 완전 논문한편을보는듯.. +_+ -[01/0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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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보충2>>
AIPDR론과 NDR론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가능하겟는데..NDR론은 이론 자체만 보면 과격한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AIPDR론이 더 급진적인 이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당대에도 초기에는 반제투쟁론이 전술적으로 더 과격한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든 미군부대습격과 같은 경우가 다수 존재하였다.
이것은 86년의 상황을 이야기한 것이고 이후에 양자의 전술변화는 정세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당면의 정세가 혁명적 상황이냐 아니면 주체역량을 강화할 준비기이냐에 따라 전략적 목표의 선전이냐 대중성 확보를 통한 주체역량의 준비기 이냐로 나뉘는 것이다.
87년과 88년은 학생운동을 넘어선 새로운 운동이 대중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한 획기적인 시기이고 이것은 87년 대선에서 노태우의 당선과는 다른 각도에서 역사적인 사건이다.
여기서 한국에서의 운동은 학생운동을 넘어선 새로운 운동단계로 접어들게 되며 학생운동은 정확히 부문운동으로 새로운 위치를 갖게 된다.
예를 들면 통일운동과 같은 것이 대표적인데 다른 부문운동이 당장 수행하기 힘든 운동의 영역을 담당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당대에서 학생운동이 노동운동등에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역시 다음에 조금 더....... -[01/0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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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원: 거시기님.... 보충으로 글 달지마시고...정리해서 한번 올려보시고 하셨으면 어떨까요? 댓글로 지나가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들이 보이길래..... 건투를 빕니다. -[01/04-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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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 정리할려면 시간이 걸리고 또 다른 문제로 논란이 일까봐 그렇게는 못하겠고요
다른 장소에서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죠...
다른 방식으로 글을 전달하겠습니다.... 지금 남의 개업식에 왔다가 ....기다리면서 쓰는 거라 좀 불안정합니다... -[01/04-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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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원: ....아쉽네요..그렇다면야..머.... 예를들어 학생운동의 자리매김...역활론 같은것은 사실 건드리긴 예민한 부분이긴 하지요. 논의를 해봐야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도 봅니다. 노동운동과의 결합,또는 관계설정 등에서도..... 그런데 저는 지금의 시기가 그런 문제들을 되돌아보는 좋은 시점이라고 생각되어 지거든요..... 아 저는 운동권출신도 아니고 그냥 같은 시기를 지나친 40대초반의 사람일 뿐이랍니다. 산맥님은 그 중심에 계셨던 분인듯 하고.....산맥님을 안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전혀 나눈적이 없죠. 거시기님 또 뵙기를 바랍니다. -[01/04-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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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 한쪽 편향으로 정리하셨네... 현실위주로.. 어쨌튼 잘 봤습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