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원(松石園)과 벽수산장(碧樹山莊)
시인묵객, 상업, 역관 등 서얼과 중인 중심에서 세도가와 친일 권력계층이 터 잡아
경복궁역 2번출구 서쪽 서촌은 글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중국과의 외교와 통상무역 일을 하는 이들, 궁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에서 조선중기 이후 서인이자 노론중심 안동(장동) 김씨 세도정치가들이, 근대에는 세도가 여흥 민씨 집안, 한말에는 급기야 무소불위(無所不爲) 대표적 친일권력자 해평 윤씨가 둥지를 틀었다.
송석원((松石園)은 정조 1786년 서촌 서얼과 위항시인(委巷詩人) 등 중인계층 문예운동 중심지로 시를 짓고 즐기며 시사회를 개최하는 모임(요즘으로 문학 동우회)인 송석원 시사(松石園 詩社) 혹은 옥계시사(玉溪詩社)의 리더 격인 시인이자 훈장 천수경(1758 ~ 1818)의 옥인동 집 이름이고 이 모임은 30여년간 지속(1786 ~ 1815)되었으며 송석원 각자는 통의동에 살던 소봉래가 1817년 5월(음 4월) 천수경의 회갑기념 시사회에 와서 예서로 바위에 새긴 글씨다.
송석원은 시대조류에 편승 서얼과 중인 시인묵객의 집에서 세도가와 친일 권력계층으로 집으로 변모했다.
천수경의 집에서 숙종 때 김수황(안동(장동) 김씨, 서인, 노론, 경신환국 집권-영의정), 김창업(장동 김씨) 그리고 순명효황후 여흥민씨 아버지 민태호(동생 민규호의 병 치료 목적으로 매입), 군물 조사위원 고제익, 무관 양성환 등을 거쳐 급기야 벽수산장의 집주인인 경술 8국적 벽수 윤덕영(순정효황후 윤비의 큰아버지, 조선귀족령 수자작 훈1등-조선총독부 관보 제38호, 경술국치 댓가로 1910년 10월 12일 자작 작위 일제로부터 받음-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소유(옥인동 3만 6천여평 중 1만 9천여평 소유, 53.5%, 경성부 북부 옥인동 토지조사서, 1927년)가 되었다.
벽수산장(碧樹山莊)은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에 소재한 일본의 은사금 약 30만원 이상(당시 1원이 오늘날 5만원, 약 150억원)으로 22년만에 완공한 프랑스풍 별장으로 1913년 공사를 시작 1935년 완공된 친일파 윤덕영(은사금 46만원)
오늘날 230억원), 동생 윤택영의 옥인동 3,000평의 집터에 222평으로 지은 지하 1층 지상 3층 벽수산장과 한옥 등 14동)의 집 이름이다.
*벽수산장/프랑스식 귀족별장, 민영찬의 설계도에 기초 독인이 감독 (1913 ~ 1935) 22년만 완공/월간중앙 이성우
벽수산장(碧樹山莊)은 2차 대전 때는 일본 미쓰이 재벌 소유로 해방 이후에는 덕수병원 자리로, 한국전쟁 때는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 청사로, 이후에는 UN군 장교 숙소, 유엔한국통일부흥워원회(UNCURK, 언커크)로 사용 되었으며 1966년 4월 5일 화재로 소실(지붕공사 중 2층, 3층이 전소), 건물의 기능을 상실하여 지은 지 50 ~ 60년만인 1973년 철거 되었다.
오늘날 옛적 한양 아방궁 벽수산장은 친일 댓가, 부동산 제테크에다 매관매직을 통해 부를 축척한 한 윤씨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정문 문설주 돌기둥 3기가 옥인동 모 빌라의 벽과 길에 덩그런히 남아있다.
* 참고문헌
- 월간중앙
- 서울역사박물관
- 조선일보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