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사람들] 김해농민회 일꾼들
수출 일등 부채 일등 김해에서 첫날밤
김해.
김해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은미희 소설가는, “나는 김해하면 단편으로 떠오르는 구지가, 김수로왕, 김해평야, 비행기 추락, 그리고 작년인가 수해 피해 정도예요.” 나도 기껏 이정도일 거다. 하나를 덧붙이면 쫓기는 몸으로 창원에 숨어들었을 때, 한달에 한두 번 대동면에 있는 ‘동광원’이라는 보육시설에 찾아가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는 아이들과 공도 차고, 밥도 먹고, 노래 부르며 놀던 일이 있을까.
한 달 전쯤 인가, 나와 동갑내기고 ‘일과시’ 동인으로 함께하는 송경동(삶이보이는 창 대표)이 전화가 왔다. 전국농민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창작농활을 하는데 함께 하자고. 경동이에겐 늘 마음의 짐이 있다. 내가 해야 할 일마저 경동이에게만 짐을 지운 것 같은. 그래서 경동이에게 전화가 오면 하는 말이 있다. 선거 때 민주노동당 지지선언, 엘지정유 파업지지 성명서를 낼 때나 시 낭송을 부탁하면 나는, “내 생각이 니 생각이야. 니 생각은 내 생각이고. 니가 하라면 해야지. 니 생각대로 하면 돼.”
헌데 덜렁하겠노라고 약속을 해놓고 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오박 육일이면 공장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을 빠져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잖아도 잔업과 특근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로 휴가를 쓰는데, 며칠을 휴가을 낸다고 하면 밥줄 짤리는 것 아닌가. 어찌할까 망설이다 내가 휴가를 하루 이틀 얻고 나머지는 아내가 대신하지. 다행히 토요일 일요일이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십이월 칠일, 일을 마치자마자 딸까지 데리고 김해로 갔다.
김해로 가다
김해시 칠산 참외마을에 도착하니 내가 제일 먼저다. 구획정리가 되어 있고, 집들이 새로 지어져 여느 농촌마을과는 다르다. 김해와 부산이 가까워서 그런지 농촌보다는 도시마을에 가깝다. ‘엄청 잘 사는 농촌마을인가보다, 하필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지.’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조금 뒤 농민회와 창작 농활단이 모이고 시작된 인사자리에서 내 선입견은 무참히 깨지게 된다.
구획 정리된 곳은 인근 도시 사람들이 집을 지어 사는 곳이고, 길 건너 쪽이 이곳에서 나서 자라고 농사짓는 사람의 마을이란다. 마을회관은 구획정리 된 곳에 있다. 웰빙 바람을 타고 전원생활을 꿈꾸며 지은 으리으리한 집을 보고 ‘잘사는 농촌’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거다. 작년에는 도시에서 집을 짓고 들어 온 사람이 마을 방송을 하니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었단다. 농촌의 공동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도시 사람의 텃세가 이곳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꼴이다.
깨어진 선입견
김해에 대한 소개로 첫날 밤 첫 만남은 시작됐다. 김해는 가락국이 세워진 역사가 깃든 지역이다. 넓은 들은 이곳이 농경사회의 중심이었음을 말해 준다. 김해 평야에 나락이 익으면 황금벌판이 된다. 농촌이지만 공항이 가까이 있고, 부두가 있고, 낙동강이 흐르고, 가까이 대도시 부산과 마산 창원이 붙어 있어 농촌의 입지로는 만점이란다. 자연히 근교농이 발달하여 시설재배가 무척 활발한 지역이다.
김해의 인구는 45만 명으로 중소도시다. 동쪽으로는 대도시 부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공단이 있는 창원과 마산시를 끼고 있어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김해농업을 설명해 달라고 하니 농민회 김해지회장은 간단하고 정확하게 정리를 해주신다. “김해농업은 수출 일등, 부채 일등이야.” 시설 농업을 통하여 수출 농업을 주로 한단다. 시설을 짓자니 설비비용이 많이 들고 자연히 큰 부채를 안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업도 동서로 나눠진다. 김해시가지 동쪽은 대동면을 중심으로 화훼를 비롯한 시설농업이 팔십 퍼센트를 차지하고, 나락농사는 이십 퍼센트 정도다. 서쪽은 나락농사가 칠십 퍼센트를 차지하고 시설농업은 채소를 중심으로 삼십 퍼센트다.
나락농사의 어려움은 소득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락농사는 면적은 팔십 퍼센트, 종사자는 칠십 퍼센트이지만, 소득은 오십 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이런 실정이니 자연히 부채를 안고 시설농업에 종사 할 수밖에 없다.
도시를 끼고 있는 김해는 시장을 확보 할 수 있는 장점과 함께 커다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차세대 농업은 물이 좌우해. 예전엔 강물에 똥이 떠내려 오면 바가지로 휘 저어 떠먹었던 푸른 낙동강이 이젠 엉망이야. 상류인 대구부터 공단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니 이젠 썩은 물이야. 그리고 지금 이곳도 매립 한 곳이야. 지하수를 쓰기 힘들어. 지하수엔 염분과 철분이 많아. 농업은 물이 생명인데 말이야.”
그럼 물만 문제일까. 빠르게 이루어지는 도시화와 산업화는 물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단다. 사람이 도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도시가 사람을 끌어간단다. “마음이 메말라 가. 이게 안타깝지. 추수를 하고나면 모두 모여 한판 놀고먹으며 마을 사람들이 어울리기도 했는데 그게 사라졌어. 농촌도 도시를 쫓아가기 바빠.”
수출 일등 부채 일등
우리가 찾아온 칠산마을은 이백사십 가구가 농사를 짓는다. 칠산참외로 유명한데 수확량이 적어 전국의 6%정도다. 맛이 좋아 가격이 비싸지만 생산량이 적어 사먹기가 힘들단다. 참외농사는 수입이 괜찮을까.
“참외도 힘들어. 참외만 계속하니 땅도 지쳤어. 그래서 토마토, 여자같은 다른 작물을 찾아 윤작을 하며 바꾸지. 참외농사가 어려워. 요즘은 땅도 땅이지만 참외농사는 짓기가 어려워 다른 작물로 바꾸는 거야. 수입이 불안하거든. 수확 때 비라도 오면 물참외가 되어 망하거든. 융자는 받았는데 참외농사 망치면 망하는 거야. 돈이 되는 것 같지만 수입이 보장되지 않아. 아예 다른 걸 해. 돈은 안 되도 수확이 확실한 거로. 작목반 이름도 바꿔야지. 참외만 가지고는 안 되고, 참외 채소 작목반 이렇게.”
한때는 참외가 돈벌이가 되었지만 이젠 아니란다. 윤작을 하는 것도, 일년 열두 달 쉬지 않고 하우스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란다. 힘들어도 돈벌이가 되지 않아도 삼백예순날을 하우스에서 살아야 한단다.
“하우스를 하고는 하루도 쉰 적이 없어. 일요일도 없어. 가족끼리 휴가나 여행은 꿈도 못 꾸지.” 나락농사로는 먹고 살 수가 없고, 하우스는 당장 돈이 보이지만, 이자 갚기도 버겁단다. 자연히 부채는 늘어가고, 이자라도 갚으려고 이것저것 심어보지만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단다.
삼백예순날 하우스에 살지만
“여기 온지 십년도 넘었지. 내 고향은 전라도야. 내가 요즘 상추를 하는데, 상추 한 박스에 오백 원 받고 넘겨. 박스 값이 이백 원이야. 이것저것 떼면 내 손에 떨어지는 게 백 원이야. 마누라랑 하루 종일 상추 뜯어야 오십 박스도 안 되는데. 인건비도 안 돼. 그런데 왜 하냐고? 이거라도 벌어야 애들 버스비도 주고 학용품도 살 거 아니야.”
먹고 살기가 힘들다 보니 나쁜 생각도 든단다. “상주참외가 유명하잖아. 생산도 많이 하고. 힘들 덴 이런 생각도 해. 상주에는 비가 좀 많이 와라. 상주 참외가 물참외가 되어 망치면 우리 참외가 잘 팔릴 것 아냐. 이런 생각하면 안 되는데. 나도 잘 살고 너도 잘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남이 안 돼야 내가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이 말을 나쁜 말이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너무 착하지 않은가. 도시를 위해 지금껏 농촌은 버림받아 오지 않았는가. 세금을 내고도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묵묵히 경제 발전의 희생양이 되지 않았는가. 이제 그것도 모자라 아예 말살하려는 농업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돈 때문에 시작한 하우스 농사마저 더 큰 빚을 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누가 잘 된다면 너도 나도 달려드니 안 되지. 정책도 문제야. 너무 계획 없이 하고 있어. 지역특성에 맞게 해야 되는데 말이야. 기업농이니, 시설농이니 무작정 지원하고, 하라고만 하면 안 되지. 날씨가 따뜻한 남쪽은 화훼가 맞아. 위쪽으로는 채소를 해야지. 우리가 수출 길 열어 된다 싶으니 충청이북도 모두 화훼야. 조정을 해 줘야지. 서로 잘 되지도 않고 어려워지는 거지. 지역에 맞는 품종으로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데, 화훼가 돈이 된다 하니 지역마다 큰 돈 들여 온실을 짓고 난리야. 이젠 화훼도 끝이야. 돈 된다는 것은 옛말이지. 다른 길 찾아야 하는데….”
남이 안 돼야 내가 먹고 살지
김해 농민회는 김해지회와 대동지회로 나눠진다. 우리가 숙소로 정한 칠산마을은 김해지회에 속한다. 대동지회는 김해 시내 동쪽이며 부산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대동지회장은 수출농업의 선구자다. 화훼의 난관을 미리 내다보고 요즘은 파프리카를 재배하신다. 신지식인으로도 뽑히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해외에도 한해에 한두 번씩은 나간단다. 자신의 수입 가운데 오백만 원은 여기에 투자를 한단다.
“대동은 고등채소와 화훼의 발상지야. 날씨가 따뜻하잖아. 96년에 꽃 수출 길을 열었어. 아이엠에프 때 외화를 벌어들였지. 너도나도 하는 거야. 그런데 생각해 봐. 유리 온실 짓는데 몇 억이야. 천 평 기준으로 기름값이 이삼천만 원 들어. 모종 값도 만만찮고. 이젠 로얄티도 내야하고. 우리나라 종자 산업이 아이엠에프 때 다 없어졌어. 아무튼 큰 돈 들여 해보아도 남는 것이 없는 거야.”
대동지회장은 남들이 꽃에 달려들 때 다른 길을 찾았단다. “2000년부터 나는 카프리카를 시작했어. 모두 일본으로 수출 하고. 파프리카는 가지과고, 멕시코가 원산지 인데 유럽에서 소비가 되지. 한국에는 가격과 기호가 맞지 않아 아직은 소비가 되지 않아. 파프리카가 비타민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일본에서도 피자에 많이 들어가고, 고급 식당의 술안주, 호텔 요리로 소비가 되는 거야.”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나서는 거다. 하지만 이런 농민이 얼마나 될까. 농민이 해야 할 일일까. “정치인이고 관료고 외국에 나가 엉뚱한 짓만 하고 와. 볼 것은 보지도 않고 말이야. 관리자는 농촌 출신인데 농촌은 모르고. 이러니 제대로 된 농업정책이 나올 수 있나.”
농촌을 모르는 관리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비판과 대안 찾기로 이어진다. “우리 밀이 없잖아. 물론 요즘 조금 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수입이야. 우리 밀이 사라진 거지. 쌀 수입하면 밀 꼴 나는 거야. 기업농, 시설농으로 나가자고 하지만 열명 가운데 세 명만 살리고 일곱 명은 죽으라는 말이지. 나머지 일곱 명을 어떻게 살게 할 것인가가 나와야지. 시설원예도 지역에 맞는 품종으로 가야 해. 남이 돈이 되면 너도 나도 해서는 안 되고 농업도 구조조정을 해야 해. 서로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서. 영농조합법을 만들어 지원하고 있는데 안을 들여다보면 엉망이야. 지원이 끊기면 망해. 돈이 허투루만 자꾸 새어 나가지, 농업이 살 길은 아닌 거지. 상업농 장려한다는데 우리가 준비 되었는지도 살펴봐야 하고. 기업화 하자고 하지만, 우리는 기업화 할 땅이 없어. 우리 농업은 가족농이 맞는 거야. 여기서 길을 찾아야지. 농촌을 너무 모르는 사람이 관리자로 있으니 엉뚱한 길만 찾지.”
첫날밤은 새벽으로
첫 만남. 인사의 자리가 가볍지가 않다. 농민회와 창작단이 둥그렇게 앉은 자리 앞엔 술과 안주가 가득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의 첫 만남은 술로 쉽게 친해지기엔 현실이 너무 무거워서일까. 농민회 황수문 사무국장이 건배를 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밤새 무거운 이야기로 가슴을 짓누르기만 했을 것이다. 강화도에서 서울에서 남원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가까이 함안 창원에서 찾아든 농활단의 얼굴이 붉어진다. 아직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전국 농민회 경남도연맹 부의장의 말이 귀를 울린다. “농민이 왜 과격해 지는지 알아. 말할 통로가 없어서야. 누가 우리 이야기를 해 주나. 그러니 쎄게 나가는 거야.”
내가, 우리가 작은 통로라도 될 수 있을까? 첫날밤은 농촌활동의 첫새벽으로 이어진다.
첫댓글 긴 이야기 마음을 짓 눌러가며 읽었습니다. 삶의 방법이 문명화 될 수록 공생단위를 키워야하고 이는 스스로 사는 자생성을 훼손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속으로 문명의 도구와 지식이 깊이 들어 올 수록 '나'는 사라지고 '우리'가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 할 수 없는, 아니 우리 스스로 경쟁적으로 그 문명의
늪속으로 빠져들어가야 하는 우리 인간의 역사, 그 발전, 이 저주의 피리소리를 어떻게 피 할 수 있는가 하는 것, 이는 문명의 가치에 대한 반문명의 저항인 듯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질 생명의 본질은 행복을 그리고 자기 확장을 지향합니다. 이 확장, 발전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요즘 통 글들이 올라오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