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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4일
말씀: 이43:21
제목: 찬송해야할 이유
이 말씀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나를 찬송하게 하려함’ 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 오늘 본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가 다 찬송은 아닙니다.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 중에 치유의 노래도 있고, 신자가 불신자에게 불러주는 복음송도 있습니다. 그리고 격려송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는 노래 중에 기도송도 있습니다마는 어떤 것이 찬송가냐 하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1-62장이 대부분 찬송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때는 일어나서 찬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분께 영광을 돌리고 그 분을 찬양하는 자세가 모두 서서 부르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찬송은 기뻐서 나오는 노래입니다. 감격해서 나오는 노래, 저번 주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두려워한다는 뜻이고, 또 놀라 감탄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찬송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기뻐해라, 내가 너희를 기쁨으로 삶을 살도록 창조했다는 의미입니다.
시집간 딸이 어느 날 어머니께 전화를 해서 통곡을 하며 못살겠다고, 그 인간 죽여 버리고 싶다고, 빨리 이혼하고 싶다고, 그러면 어머니가 그 전화를 받고 그래 잘 생각했다 정리하고 빨리 와라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지요. 어떻게 하든지 설득하려고 애를 쓰다가 전화를 끊고 나면 어머니는 그 때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잠도 못잡니다. 전화소리만 나도 가슴이 떨립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심정이지요. 그래서 어머니가 딸에게 ‘딸아 나를 위해서 잘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것이 본문 말씀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기쁨과 감탄이 우리의 기쁨과 감탄과 하나입니다. 로마서 14:17-1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여기서 ‘이로써’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둘째로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다고 합니다. ‘칭찬’을 영어성경에서는 ‘approved’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요, 이것은 ‘찬성하다, 승인하다, 좋다고 인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진짜 천국의 사람이구나 이 사람 진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승인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사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고 승인받는 자들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사람들이 깨닫고 흩어져 있는 하나님백성들이 모이는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정말 구원을 누리고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살아야합니다. 복음 안에서 감격하며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라’고 그것도 명령어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쁨의 소재를 주시고 기뻐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전쟁에서 무기도 주지 않고 돌격 앞으로의 명령을 소대장이 내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할 것을 주셨기에, 그 기뻐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뻐할 것을 주셨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의 삶을 찾아 살아갈 때 누가 기뻐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 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로 더불어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내가 즐거워하는 것은 손바닥과 손등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를 위해서라도 즐거워해라 잘 살아라 복되게 살아라는 것이고 또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전혀 기쁨이 없는데 기뻐하라고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소재를 우리에게 주신 후에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이사야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는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곱을 불렀던 분이 누구십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이 땅을 지금도 선함으로 이끄시는 분이시며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까지 보내신 그 분이 우리를 불렀고 구속했고 지명했으니 너희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분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 하리니’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여기시느냐하면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라고 했습니다. 그 만큼 우리를 귀하게 여기신 다는 말입니다. 얼마만큼 귀하게 여기시느냐 독생자를 보내어서 그 독생자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사실적인 말씀입니다. 시편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기막힌 내용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았답니다. 이것은 나와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말은 왕과 제사장이 겸직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우기 전에 사사들은 다 왕이며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은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왕 같은 제사장의 실상은 예수그리스도요 그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아 그 분의 사역을 감당하고 살아가야할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은 너는 나의 동역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라는 왕권을 우리에게 주었지요, 이것이 구속으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 때문에 지성소에 나갈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하는 역할이 중보기도요,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열쇄며, 그러니까 내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권세로 너희 기도가 수많은 사람들이 복이 임하게 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12장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은 너희는 내 몸이란 말입니다. 질병가운데 고통 하는 자들이 병상에 누워 ‘너는 네 몸이 네 몸이 아니고 내 몸이야’ 이런 진리의 말씀을 깨닫기 원하며 듣기를 바랍니다. 제가 몸무게를 12Kg이나 뺀 것도 기도 중에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정체성입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내가 있고, 내가 인정하는 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체성은 변할 수 있습니다. 정말 나의 정체성을 정하시는 분은 바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너 정체가 이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온에게 나타나서 ‘너는 큰 용사다’ 그러면 큰 용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용사로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란 말입니다.
정체성은 세월이 흘러도 사정이 변해도 환경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은 내가 누구냐? 내 정체가 무엇이냐,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말씀 안에 바른 정체성이 확립이 되어 있으면 태도와 자세가 달라지고 태도와 자세가 달라지면 미래가 달라집니다. 세월이 흘러도 환경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은 나는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가치 면에서 너는 보화다, 관계 면에서는 너는 내 몸이야, 영향력에서 너는 복의 권원이야,’ 이게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사건을 맞이해도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너는 내 아들이다’ 이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 사랑으로 이끄시는 분이 내 삶의 주인이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알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을 볼 것입니다. 바울이 ‘네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이 그 분이 내 안에 계시는 한, 환경과 여건과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 분이 결국 협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를 가든 어떤 일을 하던 어떤 상황에 부딪히든 우리를 사랑으로,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이끌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속에 체험되어지기를 원합니다.
평안으로 감사와 기쁨의 삶의 근거는 이사야43:18-19에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으나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18절, 이전 일을 기억하면 그것에 발목이 묶여 있게 됩니다. 암환자의 대부분이 이전 일에 묶여서 고통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살아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19절, 이들에게 펼쳐진 현실은 광야이고 사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광야에서 길을 내고 사막에서 강을 내시는 분이랍니다. 출애굽시대에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마는 그 곳이 사람 살 곳이었습니까? 절대로 사람 살 곳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들은 자손을 낳으며 필요한 것을 다 채우며 살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광야에서 길을 내며 사막에서 샘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느보산에서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는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과 함께했던 광야가 바로 가나안이었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억울해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광야에서 길을 보고 사막에서 강을 보며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야곱의 품에 있다가 형제들에게 팔려서 보디발의 집에 갔지만 그 곳에서 길을 내시고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게 되고 그것을 뿌리치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갔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이 꿈을 통해 샘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길을 내고 사막에서 강물을 내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추가설명) 여러분 보이는 실상을 따르는 자는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실상을 따르는 자들은 믿음의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존재이기에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행16:25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런 상황에서 찬송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세상,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세상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세상을 우리는 보고 이해하고 살고 있기에 기도하고 찬송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고 살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다 도망 간 것으로 알고 간수가 자살하려고 하자, 바울이 크게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이 사실을 알고 ‘내가 어떻게 해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어보게 되지요, 그 때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간수가 생각할 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옥문이 열렸는데 왜 도망가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간수가 생각할 때 죄수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이제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절망했을 때, 자신보다 더 큰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인 죄수들이 문이 열렸는데도 안 도망가고 앉아 있더란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간 것으로 여기고 이제 이런 상황 현신 조건 속에서 탈출구가 없다고 판단되어서 자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나보다 더 한 좋은 사람들이, 즉 손발이 묶여있었고 매도 맞고 언제 풀러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감옥살이였는데 도망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간수가 ‘구원’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이 얘기 속에는 ‘네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간수의 지식, 경험, 기대, 가능성 모든 것을 고려해도 결과는 죽음으로 끝나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네가 알고 있는 방법이 전부가 아니다 네가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다는 말이 주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모르는 세계, 네가 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답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우리의 인생을 돌보시는 그 분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행전6:15에서 다시 확인 해 봅시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것이 하나의 증거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을 본 것입니다. 주님을 보았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벤자민 스몰크라는 신실한 독일 루터파교회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32살 때 교회에 부임하여 한참 열심히 목회하던 어느 날 심방을 갔다 오는데 저 멀리서 보니까 자기 집이 완전히 불타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튀어와 보니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두 아들이 꼭 껴안고 타 죽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우리 목사님은 목회를 그만 둘 것이라고, 어떤 분은 목회는 고사하고 신앙생활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모든 동네사람들이 목사님을 안타까워합니다. 아들장례식 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목사님은 한 편의 시를 지어 성도들에게 낭독합니다. 그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이 아픔과 고통이 찬송이 되어 그의 신앙적 간증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왜요? 우리는 세상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박국3:17-18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환경과 여건과 상황에도 불구하고 누구 때문에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까? 여호와로 인해서입니다. 왜요? 그 분이 있으면 현상적인 것을 초월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이끄시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이 자체가 하나님나라의 삶입니다. )
오늘 본문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불안해 할 일도, 염려할 일도, 낙심할 일도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정체성을 찾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과 권세를 누리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셔야합니다. ‘너는 내 아들이야’ 이 정체성에서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들의 개념은 우리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넘지 못할 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아버지의 개념은 아버지 것이 바로 내 것입니다. 아버지의 권세가 바로 내 것입니다. 아버지의 지위가 바로 내 것이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동격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특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늘나라의 엄청난 신비임을 아셔야할 것입니다. 언제나 찬송하며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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