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를 당하면 개인은 패가망신,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국민 여러분! 6.25를 북침으로, 김현희의 KAL기 폭파도 남쪽의 자작극이라고 오리발을 내밀던 북한이 6.25 남침직전까지 은밀하게 진행했던 ‘김일성 특사’의 대남공작을 극찬하며 홍보했던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음을 아시는지요?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 렬사”라는 제목아래 “인민 공화국 영웅 1호”, 성시백의 대남공작 활동이 북한 노동신문에 대서특필되었던 것은 김대중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97년 5월 26일이었으나 18대 대선을 앞둔 오늘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공론화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5년 전에,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한 저는 “10년 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라는 제목으로 여러 인터넷에 기록으로 남겼기에 Google이나 네이버 등의 포탈에서 제목을 탐색하면 나타나니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6.25 남침 직전까지 진행됐던 북한 대남공작 실태를 오늘의 사회현상에 투영, 성시백 2세 혹은 3세가 활약할 가능성에도 큰 눈을 떠 주십시오. 모르는 과거는 다시 반복될 수 있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기억하실 것은 이 보도에 앞서 김영삼 대통령은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북송했고 이 보도 후에 대통령 김대중은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송환조차도 요구하지 않은 채 무려 63명의 비전향 간첩들을 북송해 주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는 막말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사실입니다. 1997년 5월 26일 이후, 우리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어 왔다고 보십니까?
국가 대공기구의 조직과 인력은 대폭 해체, 축소 혹은 감소되는 가운데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수많은 과거사 위원회가 생겨나 국군과 경찰이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몰렸으며 인류역사에 유례가 없는 북한의 인권부재와 3대 세습독재까지도 눈감고 관용하면서 오히려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산업화의 거목, 박정희 대통령을 부정하고 공격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 독재집단의 도전 앞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는 최대효율의 필수 국가 안보장치인 한미연합사의 해체를 2012.4.17일 12:00시부로 해체하도록 예정했던 사실입니다. 이 날이 김일성의 생일 100주기 이틀 후였고 조선공산당 창설 기념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연합사 해체반대 1,000만 서명운동과 이명박 대통령의 노력으로 이 계획이 2015년 12월 1일까지 일단 연장될 수 있었음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방부 위촉의 ‘4.3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4.3 사건과 관련한 대통령 노무현의 정부차원 사과에 대한 항의로 사퇴할 할 수 밖에 없었던 필자는 이 노동신문 특집보도의 존재를 세상에 공론화하는 것이 대한민국 국방의 새 출발이라는 믿음에서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와 천안함 격침”, “대한민국의 위기시작은 1997년 5월 26일”. “침묵은 망국을 부릅니다”, “김, 노 전임 대통령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것”, “10년을 넘기는 예비역 장교의 고뇌” 등을 인터넷에 올려왔으나 주요언론은 계속 침묵하고 있으며, 금번 18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조차도 이 사실에 대하여는 전혀 무관심함을 묵과할 수 없어 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위 제목”을 탐색하면 보입니다.)
성시백의 실체를 아셔야만 문제의 심각성이 보입니다. 성시백은 상해 임시정부시절 중국 공산당의 골수당원으로 모택동 심복이었으나 실제로는 장개석 휘하 주요사령관의 참모로 활동하며 소문이 났던 관계로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도 그를 장개석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1975발행, 태윤기저, 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 “回想의 黃河”, 갑신출판사)
그러나 김일성은 그가 모택동 사람임을 알고 주은래에게 “성시백을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 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부탁을 했고 주은래가 그를 ‘조선 공작조직’에 인계했던 것이며 김일성으로부터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특사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일본을 거쳐 서울로 진입, 대북 무역상을 차려 ‘조선중앙일보’를 비롯한 10개 신문사를 운영하며 국군와해공작을 하다가 50년 5월에 검거되어 전쟁발발 이틀 후에 처형되었던 것이며 이 간첩활동공로로 사후에 공화국 영웅 1호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무사 자료)
한 가지만 더 부언합니다. 8.15 광복 후, 미소군 점령하의 남과 북에서는 동일화폐인 조선은행권이 통용되다가, 북한은 ‘조선 인민위원회’명으로 토지개혁(46.3.6)과 화폐개혁(47.12.1)을 일방적으로 단행한 바, 북쪽의 화폐개혁을 몰랐던 남쪽은 5개월 후에야 구화폐사용을 금지(48.4.25, 과도정부 법령 182호) 함으로서 대북 무역상이었던 성시백은 휴지로 바뀐 엄청난 공작금을 제공받는 무소불위의 영향력으로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를 배후에서 원격조정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성시백 2세 혹은 3세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경로로 자금제공을 받으며 국군의 와해공작과 한미연합사의 해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 것인지? 한번은 상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4.3사건’을 연구했던 제 자신의 눈에는 1997년 5월의 노동신문 특집보도가 성시백의 모범을 따라 공작을 강화하라는 김정일의 총동원령으로 보였으며, 이 사실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시절부터 오늘까지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끈임 없이 한탄해야 했습니다.
우리 언론들이 이 사실을 정상적으로만 세상에 알렸더라도 국군과 경찰을 양민학살 혹은 인권탄압의 주범처럼 교육하는 전교조의 합법화도 어려웠고 대한민국의 과거사를 뒤집는 ‘4.3위원회’와 같은 각종 과거사위원회의 활동여건도 마련될 수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혈맹의 동맹국인 미합중국의 맥아더 장군 동상철거운동과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반대, 그리고 휘날려야 할 대형 태극기를 맨발로 짓밟고 섰던 정당대표의 모습 등은 군번 1번의 이형근 대장이 그의 자서전에서 언급하신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에 버금가는 현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벌어지는 정치판의 불가사의 현상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금번 18대 대선을 앞두고는 이미 많이 늦었지만 15년 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사건이 반드시 공론화되어 모든 후보들이 오랜 동안의 침묵을 깨고 각자의 명확한 입장과 의지 등을 발표케 한 후에 대한민국 국민들의 투표권이 행사될 것을 필사즉생의 각오로 호소합니다.
국민들의 투표권은 개표과정을 통해서도 철저히 지켜지는 것이 애국이기에 싸이버 테러와 공작의 가능성이 있는 전자개표기 개표도 완전한 수개표로 전환하고 정확한 검표가 어려워지는 투표시간의 연장도 불허할 것을 아울러 호소합니다.
서강대 총장을 역임하신 박흥 신부님께서는 최근, “궁지에 몰린 북한이 마지막 발악으로 대선후보를 암살하려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셨습니다만 4.3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저는 대소규모의 파업과 폭동까지도 발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김정일의 15년 전 대남공작 총동원령의 존재와 그 내용만 알려지더라도 국군과 경찰은 다시금 국민들의 사랑과 성원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철통같은 경계의 눈을 뜸으로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떠한 도전도 극복하면서 한반도의 자유통일을 향한 발전을 계속하리라고 확신합니다.
2012.11. 23일 15:00
(예) 육소장 한광덕
(전 국방대학원 원장
www.rokfv.com 인강칼럼
jajulbo@gmail.com
추신 :
** 15년 전의 노동신문 보도는 아래 영문을 인터넷 주소창에 옮기시면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특집보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성시백을 만나서 김일성의 남북연석회의 초대장을 받는 장면도 묘사되어 있으니 눈여겨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http://rokfv.com/jboard/view.php?code=23&uid=306&page=1&key=&keyfield=
** 앞서 언급한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와 천안함 격침”, “대한민국의 위기시작은 1997년 5월 26일”, “침묵은 망국을 부릅니다” “김, 노 전임 대통령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것” “10년을 넘기는 예비역 장교의 고뇌” 등은 베트남 참전 전우들의 홈페이지인 rokfv.com에 있으며 2010년 8월 이전에 인터넷에 올렸던 글들은 인터넷 포탈의 검색창에서 한광덕을 탐색하면 많이 나타납니다. 젊은이들에게 읽도록 권유해 주시면 생애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 그동안의 제 글을 읽어 주신 동기생들의 인내에 감사합니다. 제 이름만 보면 아아 또 그거! 하는 목소리를 들어왔기에 앞으로 ‘4.3’에 관련된 더 이상의 반복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1997년 5월26일의 특별보도만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더라면 4.3무장 폭동 진압 당시에 현지에서 희생을 당하셨던 피해자의 가족들도 오늘 날 국군과 경찰을 그분들의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 때 우리들 베트남 참전 전우들까지도 월남 양민의 학살범으로 몰았던 현지의 취재활동도 없었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의 제 글은 설명하기 어려운 사실을 알리기 위한 제 나름의 한탄과 하소연이었음을 이해해 주실 줄 믿습니다.
** 18대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이 1997년 5월 26일의 김정일의 대남공작 총동원령에 관심을 갖고 그들의 입장을 밝히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저는 4.3위원회에서 사퇴를 했던 책임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하고 가끔 여행도 하면서 쉬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첫댓글 항상 애쓰는 모습 존경합니다.건투를 송년회는 웃으며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모두들 나름대로 나라걱정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내산 형께서 늦은 시간에 다녀 가셨네요. 분당 동기생 모임과 어제 평북 출신의 성우회 모임에서도 발표를 한 후 많은 의견을 받아 오늘 새벽까지 보완을 하였습니다.
한잠 자고 일어나 맑은 정신에서 한번 더 점검하고 외부에도 게재를 할 것입니다. 시내산형의 발동으로 이 글을 또 쓰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이글을 끝으로
좀 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총총
동기생 여러분! 그간의 인내에 감사합니다. 반복되는 내용으로 여러분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오늘 15:00시 부로 이 글을 몇 곳에 옮기면서 지난 10여년간 밎혔던 한탄과 하소연을 잊으려 합니다.
이번 대선이 끝나면 더 호소할 기회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더 읽어주셔서 젊은이들이 눈을 뜨게하는 기회로 삼아주시면 저에게는 그 이상의 보람은 없을 것입니다. 총총
인강님의 굳굳한 안보 정신과 사상 이념에 대하여 존경하는 바입니다.
TV 조선, 쾌도난마에 출연했으면 합니다.
큰 산은 변하지도 흔들지도 않으며 유구함을 알려주는 군요.
참, 금번 11월 북극성 테니스 시합에서 우승하는 건강한 체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진창업
진형께서 마음의 일단을 읽어 주시니 그래도 이해해 주는 친구가 있었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저도 저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던 4.3위원회에서 활동만 하지 않았더라면 여행도 하고 golf도 즐기는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4.3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1997년 5월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내용을 알았더라면 더 크게 저항하며 반론을 펼 수 있었는데 ----사퇴후 4년 후에 접하게 되면서 그 때부터 그것을 알리려고 노력 해 왔으나 ----아직 까지도 모든 언론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부기관도 그 당시에 침묵했던 탓으로 누가 나서주지를 않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여러 제목을 붙여 사실의 전파를 위해 노력했으나 무위로 끝나곤 했답니다. 어디든 불러만 주면 뛰어가서 하소연을 할 생각이지만 누가 불러 주겠오? !
그러니 동기생들이 입이서 입으로 전달만 해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선이 끝나면 더 주장할 기회도 없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썼던 글이었는데 ----
인정을 해 주시니 더 이상의 보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앞으론 테니스도 더 열심히 하면서 살아 갈 것입니다. 거듭 감사합니다.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