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3. 주일예배설교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올가을에 맺었으면 하는 믿음의 결실들
■ 가을을 표현하는 대명사들이 있습니다. 독서의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 성숙의 계절, 결실의 계절, 등등의 대명사로 가을이 표현됩니다. 이런 표현 중 단연 으뜸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을 거쳐 가을에 기대하는 것이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가을의 결실은 그 어느 계절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기에 더욱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씨앗을 뿌리면서 또는 비료를 주면서 갖기 시작한 기대만큼 결실이 안 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연의 역습? 그럴 수 있습니다. 농부의 게으름?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삶에서의 결실은 어떨까요? 믿음의 삶에도 요구되는 결실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본문 22~23절에서 설명하는 결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도 기대한 만큼 결실이 안 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와 반대로, 기대한 만큼 결실이 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런 결실을 계속 얻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은 이런 질문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나눔의 희망은, 올가을에는 기대한바 믿음의 결실이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 믿음의 삶도 인생의 성장/성숙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성장/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태어난 아이가 그대로가 아닌 것처럼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중생한) 이후의 믿음의 삶도 그대로여서는 안 됩니다.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자라야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성숙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표징으로서 눈에 보이는 결실을 기대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위 ‘성령님의 9가지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이러한 성령님의 열매를 보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열매들이 맺히지 않는 일이 일어납니다. 맺혀도 기대에 못 미치거나 훨씬 못 미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원하면, 육신의 문제는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물론 육체의 욕심/소욕이 성령님을 이기려고 애쓰는 것은 사실입니다. 17절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보셨다시피, 그리고 경험하다시피, 육체의 욕심/소욕이 성령님을 이기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자 하는 마음을 우선 갖고, 믿음의 결단을 하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의 지배를 당하지 못합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18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는 단언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그렇죠? 분명하죠?
그렇다면 결단을 통해 성령님의 지배하에 놓여야 할 육체의 소욕은 무엇인가요? 19~21절상반절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열거된 육체의 소욕을 <메시지> 번역본으로 좀 더 현실감 있게 풀어보겠습니다: 음행-사랑 없이 되풀이되는 값싼 섹스 / 더러운 것-악취를 풍기며 쌓이는 정신과 감정의 쓰레기 / 호색-과도하게 집착하지만 기쁨 없는 행복 / 우상 숭배-껍데기 우상들 / 주술-마술쇼 같은 종교 / 원수 맺는 것-편집증적 외로움 / 분쟁-살벌한 경쟁 / 시기-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만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 / 분냄-잔인한 기질 / 당 짓는 것-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받을 줄도 모르는 무력감 / 분열함-찢겨진 가정과 찢어진 삶 / 이단-편협한 마음과 왜곡된 추구 / 투기-모든 이를 경쟁자로 여기는 악한 습관 / 술 취함-통제되지도 않고 통제할 수도 없는 중독 / 방탕함-이름뿐인 꼴사나운 공동체
우리 안에는 이런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자 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 성령님과 부딪칩니다. 이를 본문은 “거스른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영어로 이해하자면, “fighting each other”입니다. 성령님께 대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의 열매를 맺고자 하면, 이렇게 대드는 삶에서 항복의 삶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삶이란, 성령님이 이끄시는 삶입니다. 단순히 안내하시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시는 것입니다. 이 끌어당기심에 반항하거나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기는 내 믿음이 단순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을 하도록 이끌림을 받은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택은 내가 한 것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선택은 내 수고가 아닌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 이렇게 은혜가 나를 생명의 길로 묶어냈습니다. 그렇지만 은혜는 반드시 내 믿음의 고백으로 역사하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22~24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4절에서 보듯, 성령님의 열매는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맺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열매들은 반드시 내 믿음의 고백으로 역사하는 하늘의 선물입니다. 내 믿음의 고백이 없이는 결코 열리지 않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고백으로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러한 열거된 성령님의 열매를 <메시지> 번역본으로 좀 더 현실감 있게 풀어보겠습니다: 사랑-다른 사람들에 대한 호의 / 희락-풍성한 삶 / 화평-고요함 / 오래 참음-끝까지 견디는 마음 / 자비-긍휼히 여기는 마음 / 양선-사물과 사람들 속에 기본적인 거룩함이 스며들어 있다는 확신 / 충성-몸과 마음을 다하는 헌신 / 온유-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강요하지 않는 태도 / 절제-우리의 에너지를 슬기롭게 모으고 관리하는 태도
이처럼 성령님이 맺게 해주시는 9가지 열매는 그 누구도 ‘맺지 마시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23절의 표현입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렇기에 더욱더 이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기 위한, 그리고 더 풍성히 맺기 위한 거룩한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계속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수고입니다.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렇다면 여기서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을 끝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못 박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아가 작동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남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을 끝내는 것입니다. 남의 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풍조에 휘둘리는 것을 완전히 끊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삶을 냉정하게 끝내고, 남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것을 단호하게 끝낼 때, 이것이 25절의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기에, 성령님의 지도를 따라 살아가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님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기 위한, 그리고 더 풍성히 맺기 위한 거룩한 수고가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이 수고를 그저 머릿속 사상이나 마음속 감정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 구석구석에 힘써 적용해야 합니다. 내가/우리가 선택한 거룩한 선택에 대한 책무를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의 부족한 부분은 성령님의 힘주시고 인도하시는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다 잘 못 하는 경우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열매를 지속적으로 맺기 위한 수고에 더 해지는 본문의 마지막 권고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26절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공동번역개정판>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마지막 권고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비교하지 말라!’입니다. 비교하는 순간부터, 잘난 체와 시비와 질투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비교를 멈추고 버리는 순간, 더 이상 이 바보같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저마다 하나님의 독특한 작품입니다. 그러니 비교는 불필요한 일이요, 더 나아가 불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와도 무엇과도 비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비교의식을 버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님의 9가지 열매는 결실을 나타낼 것입니다. 그리고 갈수록 더욱 풍성한 결실을 낼 것입니다.
■ 바라기는, 오늘 본문의 권고를 따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머릿속 사상이나 마음속 감정이 아닌, 여러분의 삶 구석구석에 힘써 적용하는 거룩한 수고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올가을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어느 때보다 더 풍성하게 맺히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