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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가 조선과 일본에 소개된 것은 오로지 이들이 중국 청나라로 가는
사절단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조선은 조정에서 실각한 남인들에 의해서 알려지게 되는데
중국 청나라로 간 사절단이 구해온 서적을 보고 이를 주어사에서
선비들이 모여서 토론 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한후에 순조가 등극하자
천주교의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으니 4대박해중의 하나인 신유박해인데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인 시파.벽파간의 정치 투쟁에서
지지하는 시파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그후에도 여러 박해가 일어났지만 이들도 조정에서 세력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를 탄압한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조정에서 무사계급이 집권하고 있었고 그들하에 있는 막부들이
전쟁을 통해서 충성을 다하는 상황이었다.
통일한 풍신수길은 영지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예수회를 지지하는 세력의 위협을
알고 그들이 일본에서 그리스도인을 마구 모으고 불교를 탄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일본내에 선교를 억제할것을 명령하였다고 하고 잘 수습이 안된다고 판단하자
외국선교사의 추방을 결정하고 선교활동하는 26인을 나가사키에서 처형했으니 이들이
일본에서의 첫순교자인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본당이 지역관할 체제이고 본당신부가 중심인 관계로
대체적으로 성서를 열심히 읽거나 아니면 거리에 나가서 포교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개신교회에 비해서 거부감이 덜 하였다.
1980년대 선교이백주년과 세계성체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서
개신교회에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비신자들의 호응을 받게되었는데
이들은 천주교회에서 수많은 예비자들이 밀려들어도 그들의 교회운영방식은 변화되지 않았다.
천주교역사를 보면 1960년대 제2차바티칸공의회로 교황청이 갖고 있는
많은 권한을 지역의 교구에 위임하였지만 이들은 거의 한국교구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사 전례도 로마에서 하는 전례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전통천주교회가 하던 제대를 벽을 보게 한다든지 아니면 미사전례를 라틴어로 하는 일이
지속되었으며 지금도 오래된 성당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오늘날 미사해설자가 있는 이유중에는
옛미사 전례시 라틴어로 했기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로 한것이다. 오늘날은 그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다.
도시와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서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인구대비 10%수준이어서
외인들과 사는 일들이 점차 늘어만 갔지만 본당에서의 운영방식은 전혀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큰본당은 5년마다 오는 본당신부와 2년마다 임명되는 보좌신부는 대체적으로 평신도를 돌볼 정도의
전문성을 띨수가 없는데도 신앙지도를 떠나 많은 부분을 관여할려고 했던 것인데, 교회운영에 속하는 부분은
평신도지도자를 양성하여서 그들로 신자들을 관리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결정을 본당신부가
결정하였다.본당조직에는 사목협의회나 평협이 있지만 이들은 의결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당신부에게
건의 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오늘날 본당에서 할일을 많은데 여기에 동참하는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런일은 평신도를
그 역할에 맞게 양성하지 않는 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일을 타개하기 위해서
1990년에 서울교구서부터 일어난 소공동체운동도 구역에서 자발적인 운동으로 일어나야만 했지만
여전히 본당신부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것이다.
교구장과 본당신부의 권한은 차츰강화되었고 이분들의 권위에 잘 적응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봉사자로
임명되고 활동한다는 것이다.이로 인해서 본당에서 특히 신심단체는 점차로 위축되어가고 있었고
주일학교나 청년들의 모임에는 경험이 없고 2년이 지나면 다른 본당으로 가는 보좌신부에게
맡기게 됨으로서 전문성이나 장기계획을 꾸리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이런 인식에 불편해한 청년층에서부터
교회를 이탈하기 시작한것입니다
이런조짐은 청년들이 자신이 속한
본당보다. 서울등 대도시 큰본당에
서 주일미사도 드리고 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명동성당이나
대학로에 있는 혜화동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혜화동에서 돈암동
사이에 있는 여러 수녀원에서
청년들의 모임이 있었던 것도
큰사례인 것이다.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제가 다니는 본당에서는 주일학교미사는 토요일 특전미사시간에 하게되고
주일저녁에 하는 청년미사는 참여하는 청년의 수는 아주 소수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모양새는 점차로 악화될 조짐이 보이는데요주일에는 오전이나 낮동안에는 전혀 청소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들이 어디로 갔을까인데요 대구에서는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이
있는데요 주일저녁5시미사에 가게되면 많은 청년들이 모이게됩니다
계산지역의 관할지역은 서울 명동성당처럼 주택가가 드물고 대부분 상가로 되어있다는 것인데
이들은 시설이 잘되어있는 편리한 본당을 원하기에 이근처에서 소일하다가 미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구 계산성당은 대구 중심가인 반월당이나 중앙통 그리고 동성로도 조금만 걸어가면 갈수있는
구심가에 있기에 더욱 더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시내에 가까운 불교사찰에서는 주일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것을
가르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함꼐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찰의 행사를 가정방문해서 알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찰내에는 조그만 도서관과 찻집이 마련되어있고요 여러가지 기도모임을 통해서
불교신도가 아니더라도 이용할수가 있기에 요즈음은 천주교보다는 불교가 더 호응도가 높다고 합니다
그 어려운 불경은 우리말로 번역되어서 법당에 비치되어 누구나 볼수있게 하는데
그 한글불경책도 보시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법당에 열심히 나오는 신자들중에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자비로 한글불경책을 여러권 구입해서 사찰에 기증한다는 것입니다
저의 부모가 불교신자여서 절에서 49제를 드렸지요거기에서 제사상을 차리고
그리고 여러가지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게되는데요 그날 모르는 분이 여러분 오셔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흡사 동네에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집으로 찾아가거나
장례식장외에본당에 모여서 연도기도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지금 시내사찰에서도
그리스도교회의 좋은점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볼때에는 본당미사외에는 본당에서 할수있는 일이 거의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성체조배를 할려고 해도 따로 조배실이 없는 본당이 많고요 간단히 기도할수있는 기도방이
마련되어있는 것도 아니기에 단체에 가입하고 그 날에만 회합을 하고 뒷풀이를 한다고 하면서
음주를 한다는 것입니다.노인대학의 성격으로 여러교육을 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신앙교육부분은 극히 한정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본당에서 신자들을 위해서 신앙강좌나 성서교육이나 기도에 대한 것을 전혀 배려하지 않으면서
이단에 노출되는 것만 염려되어서 본당신부의 허락받지 않고 본당외에서 신앙관련 모임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서형제회는 성서를 많이 읽게하기 위해서 태어난 단체인데도 불구하고 헌장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하지 않는다기 보다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떤분은 우리단체는 성서를 공부하는 단체가 아니라고만 말할뿐입니다
개신교나 천주교나 지금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성서말씀대로 살지 않기 떄문이고 성서를 가까이
하지 않기 떄문이라는 것이다.성서는 집에서 장식용으로 보관하고 열심히 갖고 다니는 것은
매일미사책이라는 것입니다 몇년전부터 매일미사책에는 묵상글이 제공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옳은 일입니다. 묵상이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나 어떤 소모임을 통해서 해야하기에
적절한 조치이라 여기지만 이런일을 아무런 대안마련없이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저의 본당에서는 일년에 10여명정도 교리반에 참여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일을
보좌신부 한분이 하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도 다 받을 준비도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처럼 성서형제회 회원이 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여깁니다 왜냐하면 제생각에는
지금 회원들마저도 아니면 봉사자들도 교본에 정하진데로 하지 않거나 할 준비가 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이런 조직은 특별히 이병호주교님이나 병중에 계시는 지도신부나 천안의 정신부님이나
데레시아수녀님같이 헌신적인 분이 안계신다면 전혀 나아가지 않을것이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몇몇 곳에서 새로운 팀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늘어간다고 해도 과연 그들이 기존팀도 지키지 않는 성서형제회정신을
따를수가 있겠느냐입니다.
요즘은 다 살펴보지 못해서 단언하기 어렵지만 제가 활동할때나 각종행사를 통해서나
본당에서의 모습을 보게되면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레지오나 성령기도회 파티마성모회 그리고 ME나
꾸료실요 주말피정을 거친
울뜨리아등 신심단체는
분명히 이들 나름대로의 카리시마등 영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교리를 도입할려는
것입니다.
한때 성거산큰모임때에 하는
일반음악을 틀어놓고 전체가 하는
율동등은 코이노니아라는 친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이는 가벼운주제를 가진 토론보다는 약간의 여흥에 치중하는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사도들의
행적을 통해 초기공동체를 설명하는 곳에 들어있는 단어이지만 우리말로 친교로
번역되었는지 다들 약간의 여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데
성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코이노니아 즉 친교라고 했는데
그 의미를 생각해봐야 할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42절은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친교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것을 헬라어 즉 그리이스어로
코이노니아인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빵을 떼어나누고 기도하는일에 전념하였다.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예수님의 말씀이고 빵을 떼어나누는 것은 공동식사를 의미하고 기도하는일은 기도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묵상가운데에서 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금년에 들어서는 성거산에서 매번
하는 십자가의 길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화장실 문제라면서 파견미사를 행사장에 있는 야외미사대신 짧은거리이지만
이동해서 기념성당에서 파견미사를 드리고
그동안 큰모임에서 연수회로
하는 단원선서를 특별한 설명없이
했다는 것도 큰모임의 의미를 이해하는것인가? 교본에서는
지구별로 한해 2회정도 하는것을
권장하지만 몇시간의 이동을 하여서 하는 전국단위의 큰모임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성지에서 한다는 의미이상이
그안에 있겠느냐 있는가?
어떻게보면 성서형제회를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리했겠지만
버스를 대절해서 온
사람들이
기존팀에서보다 비회원들이
참여하였는데 이는 큰모임의
성격을 잘못 해석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나온다.
저는 이글을 통해서 우리들이 무엇을 익히는 것보다는 그정신을 되찾는 일이 더소중하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행사를 하기전에 하는 9일기도 마저 안내하지도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일이 지속되면 우리는 아마도 좋은 친목단체가 되고 취미가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이 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