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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조선 세종, 병조판서, 정숙공): ‘안평대군 이용’ 씀
| 8세조 諡 貞肅 號 松谷 諱 淵:(諱 鄭淵 兵曹判書 贈 左議政 諡 貞肅 墓誌銘) |
| 正統 九年 (1444 世宗26年) 甲子 夏 某月 正憲大夫 兵曹判書 鄭公 患 重疾, 上 軫慮 命 良醫治療 日夜 不離 側使人 問候日夜 至再三, 疾雖 傳劇 精神不亂 人有 令避方子, 公曰 脩短 有命 能避子 幾人 又 有巫言 親臨 禱祀則 疾自愈人以告, 公叱曰 平生不信 巫覡 汝輩所知, 余以 不才 濫夢 叡眷 位至宰相 年喩知命 乃金 臨死 反要 媚以 求生乎, 越七月 甲寅卒于 第 享年 五十六 上悼甚輟 朝遣禮官 致弔賻儀 有加致祭 如常儀 太常 諡曰 貞肅以 安平大君 外舅側 贈 大匡輔國崇祿大夫 左議政 領經筵 書雲觀事 越 九月 壬午 葬于 交河縣治 西學堂浦之原 夫人 禹氏慟 公之逝 悲泣 不輟 饘粥 不入口者 累日 哀毁 成疾 越明年 正月 卒以 例封 永春縣夫人 三月某甲 合窆于 公墓左之禮也 安平大君 請我 誌基 幽堂烏 敢以 不文辭. 謹按 公諱 淵 字 仲深 號 松谷 迎日望族, 曾祖 諱 侑 中顯大夫 宗簿署令, 祖 諱 思道 三重大匡 政堂文學 進賢館 大提學 烏川郡 諡 文貞, 考 諱 洪 資憲大夫 知義政府事 寶文閣 大提學 諡 恭簡 妣 吳氏 同福縣夫人以 洪武 高麗 恭讓王 元年 (1389) 己巳 某月某日生, 公 自幼 深黙寡言 好讀書中 (1405) 乙酉 司馬試 年十七 明年 (初仕)筮仕 僧都(葬署) 染 主簿承寧(府)直長宗簿 陞 宣務令北部至, 1409 己丑 以宣武 拜 監察時 公 年二十一, 處事精敏 人服老成.(1410) 庚寅 二月 丁外 艱廬墓 壬辰終制 拜 司直巡禁, (1414) 甲午 春 以通善 拜 持平時 有訟蓮 (河崙)首相 劾問甚嚴 命下巡禁 辨明切至事 問特末減 但 贖其罪 旋卽 還給, (1417) 丁酉 秋 加通德 都官正郎 戊戌 轉戶曹 冬 陞調奉(大夫) 少尹宗簿(寺)漢城尋 加朝散(大夫) 知通禮, 己亥 夏奉列(大夫) 掌令, 明年 春 太宗將出狩 司憲 揀語 殿下辭稍切 殿下以啓 太宗怒黜之于 外月餘 賜環, 夏 丁外 艱廬墓 盡禮, (1423) 癸卯 春 拜 內資(寺)少尹 轉 漢城 慶昌 兩府(府使), 甲辰 春 加奉正(大夫) 再拜 掌令 俄陞 中訓(大夫) 繕工監正 累遷 至司憲府執義 聲名益大時 憲府而 事擊 義禁府 公 卞詰 極精斷獄之日 擢公 同副代言 遷之 右代言 遂歷 吏兵 刑參判 累轉 工刑 兵判書.野人酋長 凡察 童昌 等 世居 北蕃 (1440) 歲 庚申 脫身 逃還 基部落 不肯從者 數百家 凡察 等以 我强執 不遣 累奏于 帝(明)至于再三 帝遣 錦衣衛 指揮 吳良 等 同 凡察手下人到 王京究問 野人居留地 狀擧 公爲擯 公周旋 其間 言溫氣和待之 各鎭 基宜 諸人 翕然敬服無感違異及良等 事完以還 上命 公偕 往回奏京師 兵禮 兩府詰問 精狀 公具 陳始末 卞釋 無遺兵禮部 官皆釋然 曰 凡察 等 奏果誣也 乃言曰 能專對 賢宰相也, 又 名爲 禁府宗府 司僕 尙衣(院) 四提調 其於 司僕射 請於 諸島 海中 島嶼 閑曠之地 列置 牧場 馬大蕃息 此 公之 曆官 行蹟大槩也. 公 稟性 溫以敏, 操心 耿而端, 早綴 鵷班華 聞夙彰, 栢府(司憲府)振 期紀綱, 銀臺(承政院) 允其 出納遂, 登宰府寵遇 日隆功績之輝煌 無愧於古人矣, 大抵 人之處 富貴 鮮不驕吝, 公之富貴尊榮 當世無比而, 戒懼之心 日加一日, 旣有其德宜享 其壽何奮之遽, 末究厥施信乎 天道杳冥 難知而爲, 聖上之震悼 士林之共惜也. 夫人 性 禹氏 高麗 恭讓王 駙馬 丹陽君 諱 成範之女, 奉翊大夫 知密直司事 兼 都評議使司 刑曹判書 進賢館 提學 諱 洪壽之孫, 特進 輔國崇祿大夫 丹陽伯 寶文閣 大提學 諡忠靖 諱 玄寶之 曾孫也, 妣 卽, (某官某之女也) 早修婦儀 夙成內範 四十年間 友于琴瑟, 子孫蕃衍 連婚皇室, 嗚呼成哉 及 公之卒恒而 末亡爲恨, 遂成疾 末幾而逝, 其賢貞之節 可續共姜而 敦 世俗之鄙簿也. 生 四男三女 自源 慶尙都事 次曰 自洋 刑曹佐郎 次曰 自齊 司憲府持平 次曰 自淑次曰 自淑幼女 長嫡 內贍(寺)判官 申仲舟 次適 同知敦寧府事 權聃, 卽 莪 太宗 第三駙馬 跬之 長子也, 次 卽 大君之室也, 封某夫人 孫 男女 十五人 曾孫 男 二十八人, 女 十八人 皆幼. 銘曰 惟公之性 英敏溫良 惟公之操 淸介端方, 業承箕表 早躡英躔, 名振烏臺(司憲府) 世推其賢 擢置銀臺(承政院) 驟陞宰府, 輝煌之績 無讓于古, 巨富與貴 或驕且吝, 公獨不然, 日加敬愼 胡畀其德 而嗇其年 欲問厥理 茫茫乎天 申極悼傷 士林嗟嘻 哀榮終始 其熟如斯 懿哉永春 歸于迎日 夙整閨則非矣, 琴瑟之和 室家之宜 祥凝寶樹 慶衍金之, 柏舟之風 千載以續, 堅貞之節 可敦簿俗, 生同其居 死同其穴, 有美川原 萬歲之室 工曹判書 皐隱 文靖公 安 止 (撰) 安平大君 李 瑢 (書) |
정숙공 정연 해설
세종 26년(정통9년: 1444년 갑자) 정헌대부 병조판서 정공이 피부병(종질)을 앓았다. 임금이 염려하여 의원을 보내 치료하며 밤낮으로 환자 곁을 지키도록 하고 여러번(하루종일) 사람을 보내 간병하도록 하였다. 병환이 깊게도 공의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고, 주위에서 피방을 권유하며 말하기를 ‘명이 길고 짧은 것은 하늘의 명이거늘 피할자 있는가’하였다. 무당이 ‘굿을 하면 낫는다’ 누가 권유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평생 믿지 않는 것을 잘 알 것인데 하고 꾸짖고 나는 재주도 없는데 임금님으로부터 분수 넘치는 은혜로 재상 지위에 이르고 나이 50이 넘었는데 무슨 환심을 사려고 살려고 하는 줄 아느냐’하였다. 이후 다음날 7월 갑인일 집에서 작고하니 향년 56세다. 임금님이 슬퍼하시며 조회를 멈추고 예관을 보내 조문하시며 특별히 부의를 하고 훌륭한 의식으로 치르도록 하였다.
태상(예를 주관)이 시회를 정숙이라 하고 안평대군 장인으로서 법에 따라 증직을 허락하여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령경연서운관사’라 하였다. 그해 9월 25일에 파주 교하현 서학당포 부근 언덕에 안장하였다. 우씨 부인은 공이 별세하니 슬퍼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더니 여러날 동안 죽도 못 먹으니 병이 나서 이듬해 작고하였다. 예법에 따라‘영춘현 부인’으로 봉하고 3월에 정숙 공묘의 좌편에 합장하였다. 안평대군이 나(안지)에게 묘지를 지으라 하시니 감히 거절할 수가 없어 나는 살피어 짓기로 하였다. 공의 휘는 ‘연淵’ 자는 ‘중심’ 호는 ‘송곡’으로 경상도 영일지방의 명성 있는 집안이다. 증조의 휘는‘사도’니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오천군 시‘문정’이고, 고의 휘는 ‘홍’이니 자헌대부 지의정부사 보문각 대제학 시 ‘공간’이요 비는 오씨로 정헌대부 삼사 좌복사 중화의 따님으로‘동복현부인’에 봉해졌다.
고려 공양왕 원년(홍무 기사년, 1389년 기사) 출생하였다. 어려서 말수가 적고 독서를 좋아하니, 1405년 을유 1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듬에 첫 벼슬로 도장서 승, 다음 승녕부 주부, 종부시 직장, 북부 선무려에 승진하고, 1409년 기사 21세에 선무로 감찰에 배명되어 시묘살이를 마친 임진년에 사직 순금으로, 1414년 갑오 봄에 통선으로 지평에 배명되어 일하던 그 때, 하륜 수상의 송사에 관하여 진상파악을 잘못하여 핵문을 엄하게 순금에 하명할 때, 공이 절지 있게 변명하니 임금이 들으시고 특별히 감직 없이 금전배상을 하였다.
1417년 정유 가을 통덕랑에 가자 되어 정랑, 무술년에 호조로 전임, 겨울에 조봉대부로 승진 종부시와 한성부 소윤이 되었다. 곧 조산대부로 가자되어 통례원으로, 기해년 여름에 봉열 대부 장령이 되었다. 이듬해 태종의 수렵에 간하는 언사가 강하여 태종이 노하여 외처에 내보냈으나, 월여가 지나 돌아오기도 했다. 그 해 여름에 아버님이 영면하여 시묘를 예법대로 마치고, 1423년 계묘 봄에 내자시 소윤에 부임, 한성 경창의 양부 부사로 전임되었다. 갑진년 여름에 봉정대부로 임명되어 다시 장령으로 얼마 안 가 중훈대부 선공감정에 승진되었다. 그 후 여러번 전임 사헌부집의로 이름을 날렸다. 사헌부 근무 할 때 의금부와 번쟁시 공이 변명하여 정밀하게 판결하자 이 날 공을 동부대언에 발탁하였다. 이후 고대언으로 이병의 형조참판으로 역임 공형의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동안 야인의 추장인 범찰과 동창 등이 대대로 북방에 살면서, 1440년 경신 만주로 도망시 수백호의 부락민이 따라가지 않았다. 범찰 등이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정부가 억류하여 재삼무고하니 명황제가 금의아지휘 및 오량등과 범찰의 수하인을 함께 조선 서울로 보내 야인의 거류에 관한 진상을 조사하게 되었다. 우리 조선에서 접빈사로 공을 보내 문책에 언사를 공손히 하며 온화하게 하여 적절히 대접하니, 모두가 감복 이의없이 오량 등이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 때 상감이 공과 동행하여 이들이 명나라에서 보고하고 병과예 양부에서 처결시, 사정에 대한 힐문에 공이 전말에 대하여 유감없이 해명하니, 양부관원이 잘 알아듣고는 과연 범찰등이 무고하였다 하면서 “능숙하게 대처를 하는 어진 재상이라”하였다. 또 한 이후 의금부 종부시 상의원의 4제조로 부임하여 사복시 제조로 일할 대, 공이 청원하여 도마다 바다의 모든 섬과 노는 땅에 모장을 설치하게 하여 말을 많이 생산토록 하였다. 지금까지 공직에서 근무한 이력이다.
공은 성품이 온순 공손하며 영민하고 지조가 굳고 단정하였다. 높은 벼슬로 명성을, 백부(사헌부)에서는 기강을 진작하고, 은대(승정원)에서는 왕명을 잘 받들어 제부에 올라 총우가 있으니 공적이 휘황찬란하여 부끄러비 아니하였다. 사람이 부귀하면 교만인색하지 않는 이가 드문 것인데, 부귀영달을 누린 것은 당세 견줄이가 없거늘 날마다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떠나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덕이 있으니 오래 사는 것이 타당할텐데 어찌된 일인지 빨리 돌아가시어 포부를 다 펴지 못하셨으니 참으로 천도를 알 수가 없다. 임금이 많이 슬퍼하시고 사림들도 모두가 아까워 하였다.
부인 성은 우씨로 고려 공양왕의 부마 단양군 휘 ‘성범’의 따님, 봉익대부 지 밀직사 겸 형조판서 진현관 제학 휘 홍수의 손녀, 특진 보국숭록대부 단양백 보문각 대제학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이다. 휘 ‘현보’의 증손녀이다. 부부간의 도리를 잘 알아 집안의 예절을 바르게 하고 40년에 부부금슬을 이루어 자손 번창하였다. 왕실과 연혼하고 창성하였으나 공이 돌아가심에 항상 죽지 못 하는 것을 애석해 하시더니 병이 나서 얼마 안되어 돌아가셨다. 어질고 깨끗한 절개는 가히 한결같이 강하다 할 수 있으니 세속의 나쁜 습속들을 바로 할 것이다.
자녀는 4남3녀로 장남은‘자원’으로 경상도사이고, 차자는 ‘자양’으로 형조좌랑이고, 삼자는 ‘자제’로 사헌부지평이고, 사자는 ‘자숙’으로 아직 어리다, 장녀는 수내첨시 판관 ‘신중단’에 출가하고, 차녀는 동지돈년부사 ‘권담’에 출가하니 이는 태종 3째부타 길창군 ‘규’의 장자이다. 삼녀는 곧 대군의 부인이다. 손은 15인으로 증순자 두명과 증손녀는 한명으로어리다.
비명에 새기니 공을 돌아보니 성품은 영민하며 온건하고 선량하다. 공을 생각하니 지조는 청렴과 단정⸱방정하다. 학업을 열심히하여 훌륭한 자리에 오르니, 사헌부에 올라 이름을 높이며 세상에 어질다 추앙까지 받았다. 승정원에 발탁되고 나라의 재부 중요한 자리에 곧바로 오르니, 그 찬란한 업적은 자고로 유래가 없었다. 부귀를 같이 누렸다고 하나 교만하지 아니하고 인색하지 아니했다. 공은 유독 자기만 내세우지 아니하며 날마다 선행하여 근신하였다. 덕을 크게 베풀어 평생에 자신을 돌보았다. 나라 다스리는 이치를 알고자 함에 저 하늘만큼이나 끝이 없었다. 공이 돌아갈 때, 나라에서는 아픔과 슬픔을 다했고 사림에선 탄식하여 부르짖었다. 누가 이렇게 임금으로부터 시호와 애책문과 부의를 받았는가. 오래도록 아름답도다, 집에 돌아와선 가지런히 하여 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니, 부부 간에도 금슬이 좋고 가내가 두루 평온하였다. 상서롭기는 극락정토에 보수나무요 젊음을 아끼는 존재요, 순풍에 돛 가듯이 천년토록 이어질 것이요, 굳건한 정조와 절개는 풍속에 잘 알리어 가히 두텁게 할 것이다. 삶에 같이 살고 어려운 때 같이 하니, 온 세상에 아름답도다, 오래 오래 잠 드세요!
공조판서 문정공 고은 안지 (찬)
필자: 안평대군 이용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