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역에서
노병철
우리가 알고 있던 안동역은 더는 안동역이 아니다. 안동역이 도청 인근에 새롭게 지어져 개통하였고 그동안 안동역이라고 불렸던 곳은 ’모디684‘로 새로 이름을 달았다. 안동시와 안동축제 관광재단은 문화특화지역 조성사업 일환으로 문화 플랫폼 ’모디684‘를 개관한 것이다. 아직은 많이 설렁한 모습이었지만 나름 전시공간에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고 거대한 소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은 광장 중앙에 자리 잡고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용트림하고 있었다. 당연히 안동역인 줄 알고 찾았다가 철로까지 파헤쳐진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휑하다. 아직 안동역 앞 안동 갈비와 불고기 식당은 그대로 있건만.
바람에 날려버린 허무한 맹세였나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녘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안타까운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기적 소리 끊어진 밤에.
‘안동역 앞에서’라는 가사는 1970년도 이전에 중.고등학교 다닌 사람들은 극히 공감하는 이야기를 노랫말로 만들었다. 예천 지보 출신인지 의성군 안사면 쌍호리 태생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동농고를 다녔던 김병걸은 당시 입대 전에 만났던 여학생과 첫눈이 오는 날에 안동 시청 분수대에서 만나자고 ‘흔히 멋 부린다고 하는’ 약속을 해 놓고선 첫눈만 오면 주야장천 하염없이 하얀 카라에 까만 스타킹 신은, 교복 입은 가스나를 기다린 추억을 노랫말 속에 되새겼다. 나중에 노래 가사화(歌詞化) 하면서 ‘안동시청 분수대’보다는 ‘안동역’이 깔끔해서 바꿨다고 한다. 암튼 얼마나 중년들 가슴을 후벼파는 노랫말이었으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흔히 듣던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한방에 무너트렸겠는가.
당시 휴대폰이 있었나 하다못해 삐삐라도 있었나. 어째 어째 공중전화로 저거 아버지 눈을 피해 경우 통화해서 잡은 약속인지라 연락은 안 되지. 가스나는 안 보이지. 갈려고 하니 곧 올 것도 같고 오줌은 누고 싶고 눈은 첫눈치고는 많이 와서 옷은 젖고 있고, 그렇다고 가스나들 처럼 본때없이 우산 쓰고 있기엔 남사스럽고, 그렇게 줄담배만 피우면서 기다렸던 김병걸의 모습에서 당시 연애했던 지금 중장년 남자들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으리라. 우습게도 안동역은 이사 가고 없는데 아직 노래비는 이사도 못 하고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래가 유행을 탔는지 노래비 옆에 또 하나의 노래비가 있다. 자그마한 돌에 악보랑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는 작은 돌비석도 보인다.
내가 안동역을 다시 찾은 이유는 신문 칼럼에 이상한 이야기가 하나 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내용도 아니고 탑의 위치도 칼럼 내용에 나온 위치와는 상이하다. 안동역 뒤에 가서 암만 찾아봐라. 탑이 보이지 않는다. 탑은 구 안동역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약 이백 미터를 걸어가 보면 유료주차장 모퉁이에 옛 법림사(法林寺) 절터가 나오고 그 옛날 7층 석탑이 무너져 지금은 5층 석탑이 된 모전탑이 나온다. 그 옆엔 어디서 옮겨온 듯한 당간지주가 위치한다. 당간지주는 본디 절 외곽인 일주문 밖에 위치해야 하기에 탑 바로 옆자리에 있는 것은 조금 이상하기에 하는 말이다. 그래도 누가 쓴 안내문인지는 몰라도 당간지주가 신라 시대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적고 있어 웃음이 나온다. 여기에 이미 잘려버려 그루터기만 남은 그 옛날 연리지였다는 나무 흔적이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한 사랑이 민족상잔인 한국 전쟁까지 이어진 사랑 이야기인데 너무 밋밋하고 재미도 없고 별로 와 닿지도 않은 것 같고 진성의 안동역 앞에서라는 노랫말보다 어설픈 사랑 이야기인듯해 재미가 없다. 그래서 재편성해 본다.
해방 전 안동역에서 어느 눈 오는 날 밤 한 어여쁜 여인네 하나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젊은 역무원은 급히 처자를 안아 역무실에 눕혀놓았고 이내 처자는 의식을 되찾는다. 한눈에 봐도 교복을 입은 처녀의 모습은 부잣집 여식임이 분명해 보였다. 밤에 젊은 역무원과 단둘이 방에 있는 게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상황을 인식한 여학생은 웃음으로 고마움을 표하게 되고 젊은 역무원은 신분의 차이를 망각한 체 사랑에 빠지고 만다.
안동역 인근 법림사라는 절이 있고 여학생과 역무원 총각은 칠층 모전석탑 아래에서 자주 만나게 되고 사랑이 무르익어 절정에 다다를 즈음 일본군으로 오라는 징집 영장을 받아들고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둘은 떠나는 날 밤 사랑의 징표로 벚나무 두 그루를 탑 주변에 심는다. 그리고는 멋지게 한마디 남긴다. 이 나무가 살아 있는 한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해방이 되었건만 떠나간 남자는 소식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심어놓은 벚나무는 불경스럽게도 비비 꼬여 연리지가 되어 서로를 탐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은 단숨에 안동을 점령해 버린다. 당시 부잣집이었던 그녀의 집은 지주 집안이 되어 몰살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때 만주서 독립운동하던 역무원은 해방되고 고향으로 오다가 만주군 전체가 북한군으로 편입되자 높은 장교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고, 마침 안동을 지나는 차 그녀의 집에 들렀다가 이 광경을 보고 그녀의 가족들을 구해주게 된다. 만남도 잠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내 아쉬운 이별을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국군들이 북진하게 된다. 패잔병 꼴로 북으로 도망가던 역무원은 그녀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그녀를 불러낸다. 하지만 국군이었던 그녀의 큰오빠는 그녀가 위급한 처지인 줄 알고 역무원을 쏘아 죽이고 만다. 이렇게 그들의 사람은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이다.
절도 없어지고 탑도 무너져 버려 옛 흔적을 찾기가 어려워 7층에서 5층 모전탑으로 대충 꾸며 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징표로 심어놓은 연리지도 시름시름 앓더니 죽어버려 베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밑동만 남아 그 흔적 정도는 찾을 수 있으나 이도 조금만 지나면 사라질 것 같다. 아쉬움에 발길을 돌리려는데 자그마한 수박이 고개를 내민다. 그래서 또 한동안 머물게 만든다.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인가보다.
첫댓글 ㅎㅎ~
노국장님,
재밌는 소설 한 편 잘 읽고 갑니다.
글쟁이는 역시 무엇이든 다 되는군요.~^^
아고...선생님 건강하시죠. 시국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뵙지 못하네요.ㅎ
살다보면 첫사랑이 어쩌고 하는 분들을 가끔 만나는데
본인이 굳이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만
사실은 그게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문득 어쩌다 첫사랑과 혼인한 남녀의 탄식이 들립니다.
어휴, 인생사가 겨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작 출가나 할 것을...
말하자면 아차 놓친 물고기가 다 월척인 거죠.
아~ 어디서 내게로 던지는 돌멩이 소리가 들린다.
쓩쓩쓩 쓩쓩
ㅎㅎㅎㅎㅎ 극도로 위험한 말씀이시옵니다. 요즘 내부고발자가 많은데 우짜실려고.....
노국장에게 역사학자 기질
이외에도 소설가 기질이
있는줄 몰랐네.
죄우당간 글이란 재미있게
읽히는게 첫째 조건인즉
엄지척!
감사합니다.남평 선생님.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