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학살의 현장 증인은 눈을 부릅뜨고 있다.
저는 올해로 51살, 현재는 산적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며 전남 화순에 살고
있는 주정필입니다.
광주 학살이 벌어졌던 1980년도에는 24의 나이였습니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가 고향이었던 저는 당시 광주 경찰서 부근의
한 서점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만
을 토대로 이글을 쓰겠습니다. 27년전의 상황을 서술하는 것이니 만큼
시간적인 오차나 순서의 오차는 있을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직접
겪고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상황을 기술합니다.
1980년 5월 16일 금요일 밤.
당시 전남 도청앞 분수대에는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신군부 세력의 정치적인 행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성토를 했고 밤 10 시경 자진 해산하여
뿔뿔이 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폭력적인 그 무엇도 전혀
없었던 말 그대로 평화적인 시위였고 지키고 있던 경찰 진압대도 최류탄
한발 쏘지 않고 조용히 끝났습니다.
1980년 5월 17일 토요일 새벽 4시.
당시 고인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신군부는 공수
부대원을 광주에 급파합니다. 당시 조선대학교가 위치한 서석동 일대의
하숙방을 급습하고 전남대학교가 위치한 용봉동 일대의 하숙방 자취방을
뒤져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무조건 끌고 갔습니다.
당시 근무하던 서점은 바로 광주 경찰서에서 100 여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자세한 상황은 알수 없었으나 무언가 긴박한 상황이 돌아
가고 있는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서점에서 퇴근 하면서 시민관 4거리에 공수부대원들이 진압봉을 들고
차량 통행을 제한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당시 근무하던 서점이 학원가에 위치한 관계로 일요일이면 휴무였던 관계
로 자세한 상황은 알수 없었으나 무성한 소문들이 들려 오기 시작 했습니다.
KBS, MBC 방송국에서는 광주에 폭도가 나타났으며 치안 부재 상태임을
계속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9일
서점에 출근은 했으나 고객들은 전혀 보이질 않았고 근처의 경찰 진압대
들이 분주한 모습만을 목격했습니다.
오후 5시경 일찌기 퇴근해 걸어가는데 반대 방향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나오고 있는 광경을 목도 했습니다. 어떤이는 가로수 버팀목으로 사용되는
각목을 뽑아 들었고 어떤이는 삽을 가지고 있는 분도 계셨으나 대부분 빈손
비무장 상태였습니다.
당시 광주시 동구 궁동에 MBC 방송국이 있었고 시민들은 그앞에 모여 누군
가의 선창에 의해 애국가를 불러대기 시작 했습니다.
저녁 7시경 서서히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MBC 방송국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불길이 거세져 바로 옆건물인 모 병원에 번질까
우려해 입원 환자들이 대피했고 반대쪽의 전자제품 대리점에 불똥이 튈까봐
셔터문을 망가뜨려 내부의 냉장고며 세탁기들을 길가로 끌어 내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소방차는 출동하지 못했고 MBC 방송국은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채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방송국이 불탔는지 알지 못했고
다들 망연 자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둠을 뚫고 장갑차를 앞세운 향토 사단의 계엄군들이 진압
봉을 휘두르며 나타나 닥치는대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화재의 피해를
막기 위해 시민들이 끄집어 내었던 가전 제품들은 장갑차로 밀어 부치는 바람
에 다 망가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골목길로 튀기 시작 했습니다.
엉겹결에 당시 전남여고 부근의 골목길로 도망을 가다 앞사람이 넘어지는
바람에 저도 넘어 졌습니다. 바로 뒤따라 오던 진압군은 넘어진 제 무릎을
갈기고 사라졌습니다. 디옵터 -6.0의 시력이었던 저는 안경이 날아가 버려
애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계엄군이 소강 상태를 보이는가 싶더니 다시 시민
들이 모이기 시작 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당시 KBS 방송국이 있는 현재의 광주역으로 향합니다.
한참을 가는데 당시 대인동 소재의 광주 터미널 부근을 지날 즈음 서울에서
원정 왔다는 대학생들을 실은 버스 두대가 나타났고 그 버스를 앞장 세워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을 재촉하며 광주역을 향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캄캄한 어둠속에서 빗발치는 총성이 들렸고 여기 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총성이 그치자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는 어떤 사람을
인근 병원으로 옮기는 시민들을 볼수 있었습니다.
더이상 광주역으로 접근할수 없어 사람들은 다시 광주 중심지로 향합니다.
그사이 도청 인근에 있던 광주세무서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투석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새벽 두시경 너무 지친 나머지 자취방으로 가던 저는 헬기가 저공 비행을 하
며 서치라이트로 골목 구석 구석을 비추는 것을 목격하고 본능적으로 처마밑
에 숨었습니다. 조심 스럽게 자취방에 돌아온 저는 저녁을 굶었다는 사실도
잊은채 잠에 곯아 떨어졌습니다.
1980년 5월 20일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대로변으로 향하니 당시 방위산업체였던 아시아 자동
차에서 탈취한 군 트럭에 시민들이 잔뜩 타서 금남로로 가자고 외쳐댔습니다.
지난밤에 너무 지쳤던 탓에 저도 그차를 타고 금남로를 향했습니다.
금남로 2가의 현재의 우리 은행( 당시는 상업은행 ) 4거리에는 리어커에 실린
두구의 시체가 태극기에 싸인채 놓여 있었고 바로 앞에는 착검한 공수 부대원
들과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체들은 어제밤에 나타났
던 버스 기사들을 광주역에서 칼로 난도질한 사체라고 했습니다.
시민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밤새워 시위를 한 시민들을 위해 사과며 과일
들을 내어 놓고 음료수 박스, 김밥등이 즐비했지만 어느 누구도 목이 메어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서석동의 당시 기계 공고( 현재 동구청 ) 4거리에서 투석전이 벌어진다는 애기
를 듣고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계엄군들이 4거리를 다 막고 있었고 시민들은
유리창을 다 깨뜨린 버스를 앞장 세워 계엄군의 봉쇄로를 뚫고자 했습니다.
용감하게 운전을 한 사람이 봉쇄를 뚫어내자 계엄군은 조선대학교 정문쪽으로
후퇴를 했습니다.
갑작스런 총성에 놀라 다시 금남로를 가보니 시민들은 조금전의 금남로 2가 4거리
에서 당시 한국은행( 현재의 광주 은행 본점? )이 있었던 금남로 3가 4거리로 후
퇴한 상황이었고 애기를 들어 보니 금남로 2가의 대치 상황에서 갑작스레 발포를
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고 후퇴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 장갑차를 탈취해 윗뚜껑을 열고 어느 고등학생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있었습
니다. 장갑차는 서서히 계엄군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땅~!" 하는 총성에
그 고등학생은 피를 흘리고 쓰러졌습니다. 보고 있던 시민들은 비무장의 학생을
저격한 계엄군들에게 거센 항의를 하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켠에서는 탈취한 군 트럭 적재함에 휘발유 2 드럼을 싣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뚫는 다는 영화속의 한장면을 재현 했습니다. 하지만 운전자가 차에서 뛰어 내리자
액셀레이터가 놓여 차가 정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금 액셀레이터에 고무줄을 감아 돌진하며 운전자가 뛰어 내렸습니다.
조금 가는 가 싶더니 다시금 울려퍼지는 총성에 앞바퀴 하나가 펑크 나며 차는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비무장 민간인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 가는 상황을 볼수 없다며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러간 차량들이 속속 도착하고 칼빈총 수십자루와 LMG 30 기관총 두정이 금
남로 바닥에 내려졌습니다.
31사단 11 경비대 방위로 근무하며 LMG 30 기관총의 특수분해까지 배웠던 저는
마음 같아서는 총을 잡고 싶었지만 안경도 없는 상태에서 그럴수는 없었습니다.
마음 한켠에서는 불처럼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있었고 다른 한켠에서는 양쪽다
무기를 들었으므로 평화적인 해결이 없다는 허탈감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하루밤 사이에 공수부대와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후퇴하고 광주 시가지는 시민
군에 의한 자치도시로 변했습니다. 당시 전남도청 앞의 상무관에는 그때까지 사망
한 사체들을 태극기로 감싸 안치했습니다. 향불 연기로 가득찬 상무관에 즐비하게
늘어선 시체들은 모두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습니다. 그때 벌써 사망자는 160
여 명이었습니다.
그 이후 계엄군에 의해 진압되었던 5월 28일 까지는 안경을 맞출수 없어 행동에 지장
이 많아 자취방에서 은거 하고 있어서 직접 목격한 사실은 없습니다.
그 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상해가며 정권을 잡은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등 신군부
세력들은 지금도 한치의 반성이 없습니다.
지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들을 용서한다고 했지만 저는 제 눈앞에서 비무장 시민들
을 총으로 쏴서 시뻘건 선혈을 흘리며 죽음을 맞이하게 한 그네들을 절대로 용서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자치단체에서는 살인마 전두환 대통령의 치적을 기리는 뜻에서 "일해 공원"
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반성하지 못하는 사회, 과거를 단죄 하지 못하는 정치,
과거를 정확히 적시하지 못하는 사람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합천 군청 홈페이지 바로가기
첫댓글 합천군수같은 얼빠진 것들이 있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합천군청 홈페이지 다녀왔습니다. 할일하고 옵니다.
몆년전 정치 드라마에서<이덕화가 주연>전두환이가 정권 잡는 과정을 보고 기가막혔습니다..대통령 자리 차지하려고 그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단 말인가..분개를 하며 치를 떨었는데 일해공원을 조성하느니..뉴스를 보고 어이가 없더구만요..
살아 있는 자의 이름을 공공시설에 붙인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님니다. 동상이든 흉상이든 거리 이름이든 공원이든 특정 공공건물이든 ..... 꼭 붙이고 싶다면 당사자는 물론 친인척. 관계자 사후에 궁민이 평가하여 좋은 분 뿐만 아니라 나쁜 넘도 공.과를 새겨 붙여야 할 것입니다. 대감집 강아지 생일엔 축하객이 득실거리나 대감 초상날엔 조객이 없다는 말과 같이 권력자 또는 권력에 영향을 미치는 자가 살아 있을 땐 아부하는 넘들이 들끓게 마련이지요.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 ~~ 5월 그날이 다시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쏟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