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기적
전새벽
이브라고 해서 특별한 감상에 젖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광화문에 나갔다. 여자 친구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을 수 있는데도, ‘역사적인 순간을 너와 함께하고 싶다’라는 감언이설에 그녀는 흔쾌히 넘어가주었다.
시청역에서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오자마자 태극기를 들고 있는 인파를 마주친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간절하여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들이 지켜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태극기를 든 노인들은 촛불을 든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프레스센터에서 시작해 세종대왕상까지 걷는다. 여러 행진 중에 나는 광화문으로 직진하는 길을 택한다. 빈소에서 아이들에게 성탄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많은 인파에 넋을 놓고 있던 애인도 빈소에서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우리는 대림미술관 근처까지 행진에 합류했다가 발길을 돌려 명동성당까지 걸어 돌아와 버스를 탔다. 몸은 고단하고 목은 탔다. 그런데 그때서야 어디 근사한데서 밥이라도 한 끼 먹이려니 자리 남은 식당을 찾을 수가 있나. 둘이서 KFC에 들어가 치맥세트를 시켜 먹었다. 플라스틱 컵에 담긴 맥주를 빨대로 빨아먹으면서 맨손으로 닭고기를 찢는 애인을 보면서, 너무 무심했나 싶어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내일은 좀 더 제대로 된 것을 먹이리라.
성탄 당일인 오늘 아침에는 흰둥이와 불곡산에 올랐다. 거실에 트리도 켜두었는데 오늘도 성탄절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뭘까?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다룬 영화들을 더 이상 보지 않기에 그런 두근거림이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나만 그런 류의 창작물에서 눈을 돌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영화들이 개봉하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탄 당일 최고의 예매율을 자랑하는 영화가 ‘로맨틱 홀리데이’ 같은 영화였는데, 이번 크리스마스는 권력의 그림자와 싸우는 ‘마스터’ 같은 영화가 성행 중이지 않은가. 어째서인지 다들 그런 것들을 잃어버렸다. 특별해지는 기분, 용서할 수 기분, 새로워지는 기분, 매듭을 짓는 기분, 기적을 바라는 마음, 그런 것들을.
크리스마스 느낌을 내는 것은 흰둥이가 입은 빨간색 후드티가 전부였다. 귤 하나 달랑 주머니에 넣고 형제봉까지 오를 심산이었다. 등산로 초입에서 목줄을 풀어주자, 흰둥이는 겅중겅중 계단을 올라갔다. 등산객 거의 없는 이곳에서 나는 곧잘 목줄을 풀어준다. 볼 것도 들을 것도 맡을 것도 많은 이곳에서만큼은 각자의 속도로 걷는 것이 서로에게 좋겠다 싶어서다.
이어폰도 빼고 걷는다. 혼자서 뛰어다니는 흰둥이의 목에 달린 방울소리가 멀어지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도 해서지만, ‘엠씨스퀘어 자연의 소리’에서 들릴 법한 전형적인 새 울음소리나, 나무로 된 문 열리는 소리(이런 소리가 실제로 계속 들린다), 낙엽 밟히는 소리와 가지 떨어지는 소리. 마치 폭신하게 내려오려고 미리 잎사귀부터 잔뜩 내려 보내 쿠션을 만들었다는 듯, 가뿐하게 떨어지는 겨울산의 나뭇가지 하야하는 소리.
딱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래서 “딱따구린가봐, 흰둥아”라고 실제로 딱따구리일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이 내뱉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정말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고 있는 게 아닌가. 나무를 쪼고 있는 야생 딱따구리를 실제로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에 와서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됐는데 불곡산에서 늘 듣던 문 열리는 소리 같은 것은 딱따구리의 울음소리라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그 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나무로 된 문이 삐걱거리면서 열리는 소리, 그것은 새가 날아드는 소리였다. 복 날아드는 소리였다. 자연으로부터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뉴이어를 듣다니 이것만큼 큰 성탄의 기적이 어디 있는가. 올해도 충만하다.
첫댓글 감언이설이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여자친구가 감동을 했을 테니 다행이네.
올해의 마지막 날도 여자친구와 함께 광화문을 거닌다면 괜찮은 추억으로 남을 걸세.
나는 연인원 1천만 명을 채우기 위해 나갈까 말까 궁리 중이네.
다녀오길 참 잘했습니다.
마지막날도 가고 싶은데 좀 봐야겠네요.. 나가시게 되시면 든든히 껴입으세요 선생님~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이군요. 그 딱따구리 저도 한번 보고싶네요...
저도 이브날 광화문에 있었는데,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전작가 님의 글을 보며 저 또한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보게 됩니다.
작가님 이브에 서울오셨었군요~
평소에 듣는 일상적인 소리가 기적이군요.
그래서 지금(present)이 선물(present)입니다.
누군가 그랬죠.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라고~
님의 글에서 오늘 일상적 소리의 소중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