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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EbXecMWtZyg
오늘 본문 마태복음 15:21~28절을 중심으로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이 이방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고 ‘큰 믿음’이라는 칭찬을 통해서 우리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는 여인입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바라보시면서 본문 2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8) 주님께서 한 여자를 바라보시면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여인은 주님이 인정하시는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작은 믿음’도 아니고, ‘죽은 믿음’도 아니었습니다. ‘살아서 역사하는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작은 믿음도, 죽은 믿음도 아닌 큰 믿음을 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이 주님께 칭찬받는 큰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큰 믿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께 나아오는 믿음입니다(21~22절).
본문 21절에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들어가십니다. 지중해 항구도시인 두로와 시돈은 활발한 무역으로 많은 부를 쌓고 우상을 숭배하던 곳입니다. 아합 시대의 그 유명했던 왕비 '이세벨'이 바로 이 시돈 지방의 출신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두 도시를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살던 여자 하나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주님께 나아옵니다. 본문 22절 상반절 말씀에는 더 구체적으로 이 여인을 표현합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 소리질러 이르되”라고 말씀합니니다. 여기에 예수님께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받았던 여인은 바로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이방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마가복음 7장은 이 여인을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소개합니다. 반면 마태는 고대 지명인 가나안 사람으로 이 여인을 지칭하면서 독자들에게 구약성경의 배경을 상기시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나안 사람은 이스라엘과 공존할 수 없고, 반드시 진멸시켜야 할 족속이었습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과 조금의 유익도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나안 여인’이라는 표현은 유대인과 날카롭게 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게다가 이 과부이며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사는 이 여인에겐 자신의 생명처럼 알고 키우는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습니다. 22절 말씀 전체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여인에게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귀신에 들렸습니다. 흉악히 귀신 들렸습니다. 참고로 가나안 민족은 함의 자손으로 노아에게 저주받은 민족입니다. 창세기 9:25에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로부터 칭찬받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문제를 모두 뛰어넘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비록 신분적으로는 구약의 율법적 저주 가운데 있었지만, 그녀는 주님께 나아가기만 된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이러한 믿음을 보시면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을 주님께서는 칭찬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역대상 4:9~10에는 이 한계를 뛰어넘은 믿음을 가진 소유자가 한 명 등장합니다. 그 이름은 바로 ‘야베스’입니다. 야베스는 유다지파이구요. 그 이름의 뜻은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베스는 태어날 때 부터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했습니다. “저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앙을 갖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오늘 가나안 여인의 기도처럼 응답하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함에서 오는 믿음의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여러 가지 부족한 탓에 생기는 상대적 열등감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또한 물질적으로 빈궁함으로 오는 좌절함이라고 하는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확고한 믿음이나 체험이 없는 미지근한 믿음의 한계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러한 한계로 인하여 낙심하거나 불평하거나 좌절하거나 단념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인처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주님께 담대하게 나아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문제 즉 한계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 자신이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문둥병자라는 사실을 모르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문둥병자였던 나아만 장군이 자신이 높은 지위의 장관인 줄만 알고 문둥병자인 줄을 모르면 병은 못 고칩니다. 지금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아만은 시종의 충고에 귀가 번쩍뜨입니다. '당신은 지금 장관이기 이전에 문둥병자인 것을 아십시오!' 그 말에 나아만은 자신의 현실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해결책을 찾기전에 자신의 문제와 형편을 밝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고칠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지금 이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 중에서 최우선 순위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흉악한 귀신에 들린 딸의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곳에도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래서 주님께 나아와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하고 매달립니다. 이 기도야말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모습의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나안 여인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보면 모든 인간은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할 수 있는 유일한 고백과 기도는 '주여 나를, 내 딸을, 우리 가정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는 고백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믿음을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큰 믿음’이라고 칭찬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기를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한계에 처한 문제를 가지고 주님앞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내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한계는 무엇인가요? 그 한계로 인해 내가 힘들어 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그로 인해 나를 어떤 방법으로 그 문제를 돌파하려고 하나요?
둘째, 큰 믿음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오는 믿음입니다(23~27절).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신분도, 문제도, 부끄러움도 무릎쓰고 주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지르며 나아왔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나아오면 되는 줄 알고 주님께 나아와 소리지릅니다. 너무도 간절하게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주님도 가나안 여인의 외침에 대해서는 침묵하셨고, 곁에서 보던 주님의 제자들도 귀찮다는 듯이 여인을 쫓아내려고 합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무반응하실까요? 우리들도 기도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수님은 응답을 안하시고 침묵한 하실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침묵의 이유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함입니다. 진정으로 말만 하는 믿음인가? 진짜 믿음인가를 테스트 해보시는 것이지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이 있는 것같지만 주님의 침묵속에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심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23절 말씀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여인은 주님의 제자들로부터도 외면당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소리지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를 보내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여인을 향한 거절의 뜻을 분명히 알리십니다.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차별’의 말씀입니다. ‘내가 온 것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이지, 이방인을 위해서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가나안 여인에게는 정말로 뼈때리는 말씀입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가 가장 슬플 때가 언제인가하면, 무시당할 때입니다. 차별대우를 받을 때입니다. 학생들은 왕따를 당할 때 너무 힘들어 합니다. 직장인들도 인격적으로 무시당하고 왕따 당하면 아무리 좋은 직장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간구에 한동안 대꾸도 없으시다가 민족차별적인 발언을 통해 가나안 여인을 무시합니다. 이정도가 되면 버럭 화를 내고 포기할만도 한데, 25절에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와서 주님께 절하며 도움을 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신앙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포기는 배추셀때나 쓰는 단어라는 말도 있지요. 나쁜 것이라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낫지만, 적어도 기도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포기하면 안됩니다. 1849년은 미국의 '골드 러쉬'가 있었던 해입니다. 서부 캘리포니아에 금광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갔습니다. 한 청년이 재산을 정리해 갖고 금광을 구입했습니다. 인부를 채용하고 열심히 굴착을 합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금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 금광을 자신으로 부터 인수한 인수자가 1미터 더 파 들어가니까 금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청년은 너무 너무 억울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팠더라면, 1미터만 더 팠더라면 하고 후회했지만, 그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청년은 그때부터 그 사건을 인생의 큰 교훈으로 삼고 소위 '1미터 더'라는 신념을 갖고 살았습니다. 때로는 어려움이 있어도 이 교훈을 생각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마침내 크게 성공했고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문제를 갖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면 응답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확신을 갖고 간절히, 그리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응답됩니다.
이제 주님이 응답할 만도 한데 26절에 가나안 여인에게 모욕을 선물로 줍니다. 26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위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보통 여인같았으면 화를 내고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을 듣고도 결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유명한 정치가 '링컨'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당신은 화가 나지 않습니까?' 그는 대답하기를 '나라고 왜 화날 때가 없겠습니까? 화나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지요. 그런데 나는 화가 날 때마다 휘파람을 불면서 화를 날려보내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자존심은 원죄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을 ‘개’취급하는 것은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입니다. 26절의 주님을 말씀은 ‘너는 내 백성의 떡을 먹을 자격이 없는 이방인 개야’라는 것이지요. 물론 주님은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음에도 하나님의 축복과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자존심도 지키고, 세상의 영광도 얻고, 부귀도 얻으며 그렇게 살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개’가 되겠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선택을 하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세겜에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별설교를 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 24:14,15 말씀입니다.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고 결단을 요청합니다. 저도 ‘혹시 네가 지옥갈 자가 아니냐’는 성령의 결단의 음성을 듣고 천국행을 결단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세상의 길이 아니라 목회자의 길을 결단할 선택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마치 귀신들린 것과 같이 도무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저마다 안고 살아갑니다. 지옥의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인생의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의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애굽의 영광을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포기와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그 문제의 해결함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개’가 될 수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포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다윗은 시편 84:10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84:10) 현대인의 성경 (KLB) “주의 성전에서 보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지내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악인들의 집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시편 84:10 새번역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시편 84:10 그는 악인과 함께 영광을 누리며 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더 기뻐했습니다. 비록 천박한 문지기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권세를 가진 군왕이 되는 것보다, 악인의 집에 거하며 세상의 부귀와 권세를 얻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개’를 선택하고, ‘하나님의 집의 문지기’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 믿음을 가나안 여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기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진가는 27절에서 드러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인의 고백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저는 이방 여인이요,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가나안 여인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과 거리가 먼 신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 천날을 살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개라도 시켜주시면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문지기로서라고 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의 개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으며 살겠습니다. 주님, 그렇게 라고 저는 받아주시고,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여인은 예수님 앞에 이렇게 자신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아까 살펴본 다윗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함을 알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부스러기만 한 은혜라도 자기를 살리기에 충분함을 알고 주님을 높이 여긴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낮음을 인정하고 높으신 주님께 기대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이런 이 여인의 고백을 들으시고 주님이 감동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칭찬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이런 고백을 들으시려고 지금까지 참고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귀신들린 딸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방 여인을 매몰차게 거절하셨던 이유는 그녀의 큰 믿음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거절을 통해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시면서 그 딸을 고쳐주십니다. 28절 “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것은 결코 부스러기의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가운데 토막의 축복이었습니다.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적용) 나의 간절한 기도가 거절당한 것 같아 낙심하고 포기한 적이 있습니까? 거절을 통해 인정해야 할 나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결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가나안 여인이 가진 큰 믿음을 소유하시고, 또한 이러한 큰 믿음으로 주님께 칭찬받고 가나안 여인처럼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응답되는 그런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도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께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침묵하는 순간에도, 제자들의 외면의 순간에도, 나의 자존심이 무너져 마치 개처럼 모욕받는 순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떠나지 마셔서 결국에는 주님께 칭찬받고 소원이 성취되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