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하느님을 만나셨습니까?
-우리 마음에 따뜻한 점을 찍어 놓으신 박기현 신부님을 그리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 곁에 계시는
성모 마리아여 묵주에 기도드릴 때에……”
가톨릭 성가를 271번 ‘로사리오기도 드릴 때’를 부를 때면 공연히 울컥 마음이 복받쳐 눈물이 핑 돌아 성가를 잘못 부르고 마음을 가다듬고는 한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정말 눈물을 보이게 생겼다.
지난해 10월 13일 안개가 잔뜩 낀 흐릿한 아침 9시30분. 오지영 신부님을 모시고 청주성모병원에서 간암으로 투병하고 계신 박기현 신부님께로 문병 갔다.
“오 신부 왔어? 고마워. 나 강복 좀 해 줘.”
누운 체 인사 말 몇 마디 나누시고 강복을 해 달라고, 몸을 힘들게 움직여 동기동창인 오 신부님 쪽으로 머리를 대는 신부님 모습은 천진난만한 어린이 모습이었다.
10월 8일 상태가 좋지 않은 신부님을 진찰한 담당의사는 곧 돌아가실 거라고 했단다. 그래서 부랴사랴 교구청에 연락해 신부님들이 오셔 임종 준비를 했단다. 그런데 갑자기 산소마스크를 떼어 달라고 하셔 떼었더니 말짱하셔 다시 병실로 옮겼단다.
성가 ‘로사리오기도 드릴 때’ 작사․곡자로 널리 알려진 박기현 신부님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음악을 전공하셨다.
25여 년 전 ‘어린이 미사’ 개정 위원으로 함께하며, 일을 마치면 으레 소주를 나누며 가까이 뵙게 되었다. 부산 어느 수녀회에서 일을 마치고는 신부님과 광안리 허름한 선술집으로 갔다. 신부님께서 술을 코가 삐뚤어지도록 사신다고 했다.
단 술자리에서 신부님이라 부르지 말라는 거였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벌금으로 500원씩을 내라는 거였다. 그 날 저녁 술값은 내가 낸 샘이 되었다. 아마도 신부님은 하느님 다음으로 약주를 사랑하신 것 같았다.
10월 26일 아침 6시 45분 무늬만 가을이지 겨울이었다. 갑자기 추워진 가을 아침 두툼한 겨울옷을 입고 오지영 신부님과 박기현 신부님 하늘나라로 이사 가시는 길을 환송하러 청주 내덕동 주교좌성당으로 갔다. 계절은 가을인데 춥기는 겨울이고, 자욱한 안개는 한여름 이른 아침 같았다. 세 계절을 함께하는 박기현 신부님 환송 길.
빛이 어두움과 안개를 내 몰자 길가 나무들이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같은 길인데 양옆 나무들 가운데 볕을 좀 많이 받는 쪽은 단풍이 시작되어 가을의 온갖 자태를 뽐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볕이 덜 미치는 나무는 언뜻 보아서는 여름나무 그대로였다. 볕이 얼마만큼 나무에 와서 머무느냐에 따라 나무 자태는 그렇게도 달랐다. 그렇다면 박 신부님은……?
영결미사 30분 전인데도 성당 안이 꼭 차 뒷자리에 의자를 놓느라 부산했다. 미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성당 안이 넘쳐 소성당과 식당 문을 열어 놓아도 가득 가득 박 신부님이 이끌었던 교우들로 가득했다.
“……주님의 품안에 받아 위로해 주소서.”
헤어짐의 아쉬움을 꾹꾹 눌러 담은 성가가 성당 안을 구슬프게 울려 퍼지며 미사가 시작되었다. 안충석 신부님은 강론 중에 박기현 신부님 동생 마리아 분께 들었다며, 박 신부님은 병상에서 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가고 싶다.”고 하셨단다. 신부님은 주님 만나러 가실 준비를 차곡차곡 해 놓으셨던 것이다. 지금 쯤 신부님은 예수님을 만나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실까?
바람도 추운지 옷 속을 파고든다.
두터운 외투를 입고 종종 걸음을 걷는 아침.
가슴 따뜻한 신부님이 이 세상 자리를 비우시자, 추위가 얼씨구나 하고 밀려 온 모양이다. 가을 속 겨울인 아침. 신부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훈훈한 점을 찍어놓고 우리 곁을 잠시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