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사회 입력 2016-09-21 03:00
[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수험생과 부모의 마지막 소통 기회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휴일 아침, 고3 아들은 오전 9시가 다 되어 가는 데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난 모의고사를 그렇게 망쳐놓고도 전혀 긴장감이 없다. 엄마는 참다못해 아이 방문을 거칠게 열면서 한 소리 한다. “너 도대체 대학 갈 생각은 있는 거니? 그 성적을 받고도 잠이 와? 지금 촌음을 아껴서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한데, 이 따위로 해서 되겠어?” 베개를 안고 자던 아이는 잠깐 일어나 “으이씨∼” 하면서 발로 방문을 쾅 닫아버린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하는 안타깝고 초조한 부모의 마음,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재수는 없어”, “지방대는 절대 안 돼”와 같은 말로 압박하는 것은 지금 시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그런 말로 자신을 채찍질할 줄 아는 아이는 이미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가 없고, 그게 안 되는 아이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자포자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든, 안 하든 지금 아이들은 모두 불안하다. 이런 아이들을 계속 압박하면 더 초조하고 불안해져 자기 능력을 더 발휘하지 못한다. 고3 아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채찍질이 아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육아는 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지금 지켜야 할 원칙은 ‘마음 편안하게 해주는 격려’다. “남은 시간이 짧다고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하지만 너무 초조해하면 오히려 공부가 잘 안 되니까 마음은 편안하게 먹어.”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아이가 “이번에 못 가면 어쩌죠?” 하면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자. 지금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열심히 하고, 그때 가서 결과를 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너한테 제일 도움이 될지 의논해 보자”라고 말해 주자.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그만큼 안 나와 초조해하면 “공부는 실력을 갖추는 거야. 열심히 한다는 전제하에서는 한 해가 더 필요하면 한 해를 더 할 수도 있고, 두 해가 더 필요하면 두 해를 더 할 수도 있어. 대학에 가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렴”이라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학자가 될 것이 아니면,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이 반드시 그 전공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위권 대학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인생의 행복을 판가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학은 가볼 만하기는 하다. 명문 대학을 나와야 취직이 잘되고, 좋은 곳에 취직해야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다. 대학이라는 곳에서 내가 선택한 강의도 들어보고, 보고서도 써보고, 동아리 활동도 해보고, 다양한 선배나 교수들과의 관계에서 생각도 넓혀 나가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여러 가지 봉사활동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부도 일종의 재능이다. 뭔가를 열심히 해서 성취감을 느껴 보는 경험,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나 머리가 좋아도 공부에 재능이 없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굳이 유일하게 없는 그 재능만 계속 강조해서, 그것만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아이는 이제 고작 열여덟 살이다. 육아는 길고 넓게 봐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경험을 통해 배우고 이해하고 살 수는 없긴 하다. 하지만 중요한 고비에는 잔소리보다 경험이 중요할 수 있다. 시험을 못 보는 경험도 긴 인생에서는 필요할 수 있다. ‘내가 많이 열심히 안 했더니 역시나 점수가 안 나오네. 수능은 3년이라는 시간이 꼬박 필요한 거였구나.’ 그것을 느껴 봐도 나쁘지 않다. 아이의 좌절에 부모가 “거 봐. 내가 더 열심히 하라고 했지?”라고 비난하지 말고, “이번에 굉장히 큰 것 배웠다”고 격려하고 지도해 주면 된다.
지금 아이는 성인의 문턱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어떻게 보면 대학 진학은, 부모가 아이에게 조언할 수 있고, 개입할 수 있고, 결과를 가지고 의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다음부터는 섣불리 개입을 못 한다. 이 시기를 잘 보내면, 아이는 부모로부터 굉장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또한 자신이 성인이 되었을 때 부모를 어떻게 대할지를 알게 된다. 부모를 의논할 대상으로 삼을지, 되도록 대화를 피해야 할 대상인지를 결정한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거쳐 가는 하나의 관문일 뿐이다. 물론 중요하지만 너무나 비장하게 절체절명인 것처럼 말하지 마라. 아이는 그것을 통해 발전도 하고, 그것을 통해 생각도 수정해 나간다. 그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 오늘의 묵상 (220807)
로마 제국에서 부유한 도시였던 폼페이의 어떤 프레스코화에는 주인과 세 명의 종이 나옵니다. 종들은 서서 허리를 숙이고 주인의 식탁에서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한편 동방 교회의 어떤 프레스코화에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맨발의 예수님께서 식탁의 맨 끝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맨발은 종의 신분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오히려 맨 끝자리에서 그들을 섬기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구도의 그림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현세를 살아가는 신자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어떤 주인이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고 자기 집을 종들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종들은 주인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언제 돌아올지는 몰랐습니다. 주인이 한밤중에 올지 새벽녘에 올지 몰랐기에 종들은 언제든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깨어 있어야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아들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주님을 만날 때를 준비하며 사는 것도 맞는 말이겠지만,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은 지금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종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만족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깨어 있을 수가 없고, 종이 아니라 주인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깨어 있는 삶을 위하여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으라는 비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한 삶을 위하여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요? 고해성사는 신자도 사제도 깨어 있게 하는 삶의 좋은 방식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으라는 말씀은 그분의 제자인 우리가 언제나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수없이 오셨지만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해서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깨어 삽시다.
(정용진 요셉 신부 청주교구복음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