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밤도 꼴딱 샜지만 퇴근한 예주를 4시간 남짓을 태워 수다를 떤다.
디자인을 어떻게 드로잉 북처럼 쓸 지로 생각해서 눈치 볼게 많은 일상의
불편함, 오르는 금리와 시대의 우울, 원인 불명의 공포에 대응하는 각자의
RE액션, 사랑해도 싸우는 관계, 여자 인생 얘기, 엄마 아빠 얘기.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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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우리의 예술 얘기 그렇게 서로 새롭게 써 논 비밀일기를 꺼내 해부
하고 조립하고 재해석한다. 말해보고 깨닫고 말하면서 정돈한다. 아 이건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되겠다. 이 말은 좋다. 같은 생각을 하게 되니 자매의
토크 시너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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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퀴 더 돌고 싶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겨우 그녀를 배웅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고요하다. 그녀가 와서 멈춰둔 남은 빨래를 마저 돌리고 기다리기
심심해서 냉장고를 열었다. 한 구석 정체불명의 소시지 볶음 요리와 계란
김밥을 꺼내 연다. 비린(부패한) 냄새에 찡그리던 시절도 있었는데,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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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히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꾹꾹 눌러 담아 버리고 오는데 엄마
말이 생각난다.(이상하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 엄마 생각이 종종 나곤
한다. 결혼을 하면 남편에게 이 일을 시키는 이유일까.)‘시기를 놓치다‘ ‘시기
가 적절하다’ 같은 말이 있다. 엄마가 살아보니 시기란 게 중요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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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근래에 정말 중요한 담론을 농담처럼 툭 던져 버린다. 시기란 시기는
다 놓쳐가며 늦깎이 대학생, 늦은 공부, 늦은 경제관념에 허덕이는 나에게
이제 와서 시기라니, 엄마는 아직도 나를 모르나 싶다가 혹 이게 엄마말대로
중요한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소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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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이 먼저다. 김밥은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거다. 그 시기란 게
가늠하기 쉽지 않고 종잡을 수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괜히 음식의 유통기한
을 살펴본다. 오래도록 상하지 않는 냉동식품도 있지만 한 순간에 상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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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이 있지 않은가. 상한 음식이야 버리면 그만이지만 새삼스럽게 상한
김밥생각을 해 보았다. 비단 결혼에 국한된 얘긴 아니고 예술가를 지망하는
딸내미는 확실히 오-노-다. (2022.11.5.sat.에스더)
2.
아비 생각해 자질구레한 일상을 보내온 큰 딸내미가 속 깊다는 생각을
했어요. 좋아요. 이런 유의 글. 이태원 참사로 스크래치를 받았을 동생을
살뜰히 챙기는 언니는 필시 예주 아비의 DNA를 가졌을 것입니다.
살아보니 기쁨은 그냥 넘겨도 되는데 슬픔은 반드시 누군가 후시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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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 주는 것이 필요하더이다. 아빠가 상경해서 꽃 한 송이 놓고 온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일상의 불편함, 오르는 금리와 시대의 우울, 불청
객처럼 습격해 오는 공포에 대응하는 방법, 사랑해도 싸우는 관계 등등
아빠도 동일하게 같은 하늘아래서 매일매일 부닥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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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줬으니 우리 공주들이 넉넉히 지지고 볶으면서
중년이 되어갈 것입니다. 아비가 볼 때 지금까지는 잘 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랑해도 싸우는 관계‘란 문장을 보면서 입이 해벌 죽 벌어집니다.
어데서 주서 들은 바로는 인디언들은 여성 한 명이 500명의 아이들을 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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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고 합디다. 무슨 말이냐면 여성은 원래 용량이 남성보다 커서 가족들만
케어 하는 것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고 이해했습니다. 가족사회인 우리
나라에서는 중년의 여성들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할 길이 없어 같은
소리를 반복하며 쓸데없는 오지랖(걱정과 잔소리)을 떤다는 것이니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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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않나요? 자녀 입장에서 효도하는 것은 어머니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서 내 인생은 내가 설계해서 사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혼을
하고도 씩씩하게 사는 이유 중에 두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는 직장을
지금도 다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잔소리를 해서 키운 딸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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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둘 다 명문대를 다니고 자신이 볼 때도 이 사회에 ‘핵 인 싸’가 될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 글을 쓰는 아비도 행복합니다. ‘때’와 관련해
아비의 의견도 밝힙니다. 세상에 늦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르고 빠른
것보다 늦더라도 방향이 맞아야 하고 느릿느릿 가더라도 과정이 행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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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다행히 두 딸내미들은 소신을 가지고 인생을 주관적으로 산다고
믿습니다. 해서 공부가 좋으면 공부를 할 것이고 결혼이 더 좋으면 결혼을
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데릴사위를 열열이 환영하는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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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은 딸내미들이 인생을 즐기며 행복해하는 것이
버킷리스트 1번 이기 때문에 지금 결혼을 한다고 해도 올 하트를 줄 것
이고 공부를 한다고 해도 동지애를 발휘할 것입니다. 진짜 솔직히 말하면
남자랑 행복하게 사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는 걸 깨달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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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일은 변수가 있고 역 기능과 순 기능이 함께 있다는 걸 기억
하시라. 예컨대 이놈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결혼을 했는데 설마
약속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건 바보입니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명리
학에서 나왔는데 우주의 기운이 움직이기 때문에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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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해요. 그걸 가지고 네가 그럴 줄 몰랐다는 둥 실망을 하면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믿지 말고
내 지성과 경험을 믿는 것이 옳다고 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결국 ‘지성의
사유'가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닐까?
2022.11.5.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