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역대하1장1-7절 말씀으로 먼저 어제 묵상한 데살로니가후서 3장1-18절 말씀 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말씀은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고 하거나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는 것이나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라고 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하는
바울의 안타깝고 조급한 마음을 이해 한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생이 아닌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고 하신 말씀과
창세기27장에서는 이삭이 야곱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고 한 말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뜻임을 잘 분별하여
목사들에게만 축복권이 있고 또 축복권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군림하며 하는 축도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라는 본분을 망각한 불의와 불법을 멈추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기를 바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제 증인인 모든 크리스천에게는 서로 발을 씻기듯이 복을 빌어주는 축복의 권리와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야곱의 진짜 복을 착각한 이삭의 착각처럼 복의 심판관이나 선생이 되기 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체의 개념을 생각하여 서로에게 빈 복이 바로 자신의 복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교세들은 바울을 증인이 아닌 선생으로 섬기며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은혜로 의인으로 인정하여 주신 것과 자유를 부정하고 죄 아래 있게 하는 이상한 모습으로 왜곡하여 살리는 젖으로 오히려 삶아 죽이고 있는 것이 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목교세들도 스스로 성직자란 착각 속에서 선생으로 군림하며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배를 채우며 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의 자격으로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폄훼하는 불의와 불법을 자행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드는 조건이나 모습이 아니라 오직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서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도 바울을 선생으로 보고 그를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증인임을 바로 알고 바울처럼 회개하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오직 예수로 온전해진 천제 증인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며 화목함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서로 발을 씻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증인과 선생의 모습이 비슷하여 분별하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생은 화가 있다고 경고 하시고 증인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여 그 대상이 바울이 아니라 누구라도 피조물을 본받기 위하여 달려가거나 또는 본 받으라고 강요하면 내가 그가 아니므로 결국 부족할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율법 같은 틀을 만들어 무례를 범하며 불가능에 도전하려고 발악을 하다가 결국 죽은 자가 되어 실족하게 됨과
또 이 세상의 증인은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의 생각대로 증언하는 것이지만 천제 증인은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스스로 증인으로 결단하여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피조물이 스스로 의로워져 구원을 받아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율법에 온전히 거하여 전지전능하고 천지 만물의 주인이시며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알아 온전하게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불가능의 도전임을 고백하자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언약인 당신을 우리 인생의 살수 있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주신 복음은 결국 구약은 우리 피조물로서 그림이 떡인 절대 불가능의 도전의 역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도구로 주신 부부나 혈연이나 재물이나 건강 등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을 복이라고 착각하여 실패한 것임을 고백하고 도구를 도구로 인정하는 회개로 도구가 아닌 진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복음 즉 오직 예수로 구원을 받아 천국과 영생을 소유하라는 것이다.
또한 이를 확인해 주기 위하여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그렇게 많이 나온 혈연이나 족보를 비롯하여 도구의 중요성이 살아질 뿐 아니라 오히려 모든 도구를 다 버려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세상의 이성과 감성으로 하나님의 뜻인 복을 평가하면 하나님의 뜻인 복을 두고 천국의 배설물이 하나님의 뜻인 복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세상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된 길인 복이 아닌 배설물을 갈망하는 헛된 삶에 도전하게 된다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분별하라고 주신 이성과 서로 사랑하려고 주신 감성의 조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으로 의롭고 순결하고 착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모습이 되신 후 그것을 믿음과 은혜로 받아 누리면 그것을 우리의 의와 순결로 인정해 주겠다고 하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그 고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사역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함으로 온 땅에 사랑이 넘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죽여 그저 온 땅에 사랑의 시체들로 인하여 악취와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만 진동을 하고 있으며
정말 말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죄의 권세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어 최후 승리를 소유할 수 있도록 주신 지침서인 요한 계시록의 말씀까지 이런 저런 이유로 금기하던지 아니면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할 뿐 아니라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우리 스스로 통과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도구로 주셨지만 이제는 이미 빈 껍질이 되어버린 제사(형식적인 예배), 성전(교회), 제사장(목사), 십일조, 율법(착하고, 구별된 순결한 삶)을 비롯하여 이 세상이 요구하는 섬김과 나눔과 사랑에 매달리는 고난을 요구하는 삶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역을 폄하하는 것으로
에베소서 4장에 말하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절대로 갈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 말세의 기간을 견디어 승리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불가능의 도전으로 이를 극복하는 비밀이 바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천국과 이 세상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기 위하여 성령님의 도우심과 이끄심에 따라 서로 사랑하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이를 위하여 오늘 묵상 할 말씀 중에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이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하는 말씀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자
데살로니가 전 후서에 이어 주신 구약의 역대하서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모드를 구약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전환을 해야 하는데
구약은 율법을 따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스스로 도전하여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도 기적과 이적의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들이 체험하여 확인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고
신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도전하여 통과해야 할 과정이 불가능의 도전임을 고백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통과 하신 후 우리들이 우리 자신과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그 사역을 믿음으로 그것을 우리의 승리로 인정해 주시고 또 그 것을 믿은 우리의 믿음을 성령님께서 도와 주시고 있는 것임을 명심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하며
또 묵상하는 이유와 목적은 구약의 방법대로 다시 도전 하라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한계와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어 영접함으로 구원을 소유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후 말씀을 보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해 가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하사 심히 창대케 하자 이에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재판관과 온 이스라엘의 각 방백과 족장들을 명하여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마리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고 하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노력하여 지혜의 왕이 되고 이 세상 최고의 부귀와 명예를 소유했지만 그 결과는 그 자신이 고백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신기루처럼 살아질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각바람 지체들은 본질을 왜곡 변질하는 목교세들의 불의와 불법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빙자하여 이 세상과 자신을 위한 섬김과 꽹과리 소리의 사랑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쁨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감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여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도 다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고 서로 사랑함으로 사랑이고 생명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살아있는 사랑의 삶으로 영생과 천국의 소유를 확인하고 누리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살아있는 사랑의 삶이란 서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으로 이 모든 조건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연합하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 방법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이 천국을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확실하게 믿어 자신의 편의에 따라 말씀의 본질을 왜곡. 변질하여 미혹하고 있는 불의와 불법의 목교세들과 연합한 이 세상의 유혹과 위협이 아무리 사실과 현실처럼 그리고 태산처럼 밀려와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또 하나님을 알아가는 도구로 준 것이기에 아무리 진짜라고 큰소리 쳐도 죽음 앞에는 무용지물인 부부나 자식이나 부모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특별한 관계인 또 다른 나 인 지체들과 이미 혼인 잔치의 주인공으로 확정되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나를 바라보고
종말을 소망하며 담대하게 누리고 즐기는 천제증인의 삶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확인하고 감사하며 서로 사랑함으로 행복해 하는 신나는 오늘이 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