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17일,
제 1차 오일 쇼크(1973 Oil Crisis)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주축으로, 아랍산유국을
회원으로 둔 석유수출국기구(OPEC, 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가 유대교
명절인 1973년 10월 17일 욤 키푸르를 기해 석유금수조치를 발표했다.
The 1974 Opec conference in Vienna.
OPEC는 회원국의 산유량을 23% 줄이고 미국 등 이스라엘 지원국가에는 원유를 대주지 않기로 했다.
미국행 원유선적이 완전히 금지됐고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서 철수할
때까지 원유생산을 줄이고 판매제한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런 석유수출 금지는 아랍에
비우호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서유럽국가와 일본에까지 확대됐다.
원유 가격은 배럴당 3달러에서 1974년 1월에는 12달러까지 치솟았고 세계 경제는 유례없는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을 경험하게 된다. 이른바 제1차 오일쇼크였다.
미국은 자동차 제한속도를 80Km 이하로 낮췄고 영국은 주3일 근무제를 실시했다. 국내상황은 심각한
정치상황과 맞물려 더욱 암울했다.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1974년 24.8%로 수직 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다. 무역수지 적자폭도 크게 확대(10억 달러→24억 달러)됐다.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에너지 수요가 많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더 컸다. 1974년 3월 OPEC는 석유금수조치를 해제했지만 상처는 심했다.
1973년 발발한 오일 쇼크 사태는 일본인에게 큰 불안을 안겨주었다. 갑작스런 물가 상승을
두려워한 나머지 시장 거리마다 생필품을 미리 사재기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진은
1973년 11월 1일자 아사히 신문 보도 자료
그리고 1979년 또다시 원유 가격은 급격하게 상승하게 된다. 오일쇼크는 국가간 정치적 갈등이나 한
나라의 정치 변동이 세계 경제에 어떤 충격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이슬람혁명으로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와해되면서 이란은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섰고 배럴당 13달러 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돌파했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30달러 벽이 깨졌고,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한 1981년 1월 두바이유는 39달러의
정점에 도달했다. 이것이 2차 오일쇼크이다.
1차 오일쇼크로 아랍지역 국가는 제3차 중동전쟁으로 잃어버렸던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고, 상당기간
아랍 국가들은 넘쳐 나는 달러로 축제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원유수입국들은 비축 물량을
늘려 단기적 충격에 대비했고, 북해와 알래스카 등 지역에서 새로운 원유 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또한 더 나아가서는 대체에너지에 대한 관심과 투자도 늘려나갔다. 그 결과 2차 오일쇼크가
끝난 시점부터 2000년까지 20년 동안 원유가격은 60%가량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원유 수출 금지로 촉발된 원유가격 상승은 아랍국의 단결을 오히려 와해시키는 불씨
역할을 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라는 카르텔이 생산량을 성공적으로 통제할수록 이를 배반하려는
유인도 커졌다. 나만 몰래 생산량을 늘리면 높은 가격에 많은 양을 팔 수 있어서다. 1980년대
원유가가 하락하면서 부족한 수입을 메우기 위해 생산량을 늘릴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는
아랍국 간의 갈등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당시의 풍경. 우리나라는 석유위기가 닥치면 서민들의 고통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큰 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