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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파는 가게》
14부 — 마지막 독자
아침은 이상할 만큼 천천히 밝아왔다.
해주와 인호가 걷는 만큼 길이 생겼고, 길이 생기는 만큼 세상도 모습을 갖추었다. 처음에는 흰 여백뿐이던 곳에 풀잎이 돋고 나무가 서고, 멀리 낮은 지붕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누군가 그리는 풍경 같았다.
그러나 붓을 든 사람은 없었다.
“저기 마을이 있네요.”
해주가 말했다.
“아까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까이 오니까 생겼나?”
“그런 것 같습니다.”
“신기하네.”
해주는 노트를 가슴에 안았다.
기억은 거의 없었다.
박지은도.
수연도.
저녁상점도.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희미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서인호라는 남자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만은 편안했다.
“인호 씨.”
“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어요?”
인호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왜 묻습니까?”
“당신은 나를 알았던 것 같아서.”
“조금.”
“좋은 사람이었어요?”
인호는 생각했다.
“까다로웠습니다.”
해주가 웃었다.
“그건 지금도 그런 것 같은데.”
“고집도 셌고.”
“또?”
“말도 안 들었습니다.”
“좋은 점은 없었어요?”
“있었습니다.”
“뭔데?”
인호가 해주를 바라보았다.
“끝까지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해주의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내가요?”
“네.”
“왜?”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사람이었네.”
“많이.”
해주는 다시 걸었다.
몇 걸음 뒤 말했다.
“그런 사람이라면.”
“네?”
“나쁘지 않네요.”
인호가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마을에 도착했다.
⸻
마을 입구에는 표지판이 하나 있었다.
첫 문장 마을
해주가 읽었다.
“첫 문장?”
“이름이 이상하군요.”
마을은 조용했다.
사람들이 있었다.
빵집 주인.
자전거를 타는 아이.
꽃에 물을 주는 노인.
버스정류장에 앉은 여자.
모두 평범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빵집 주인도.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아이도.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노인도.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해주가 인호를 바라보았다.
“좀 무서운데.”
“나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말했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해주가 물었다.
“왜 좋은 날인데요?”
주인이 멈췄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그러니까 왜요?”
“오늘은…….”
주인의 얼굴이 흔들렸다.
“좋은…….”
입이 더 움직이지 않았다.
인호가 해주의 팔을 잡았다.
“나갑시다.”
밖으로 나왔다.
해주가 말했다.
“저 사람들 이상해.”
“한 문장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첫 문장만 쓰인 사람들.”
해주의 얼굴이 굳었다.
마을 이름.
첫 문장 마을.
“누군가 시작만 하고 다음 문장을 안 쓴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해주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보였다.
빵집에는 빵이 없었다.
아이는 자전거를 타지만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았다.
노인은 계속 같은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모두 시작만 있었다.
다음이 없었다.
해주의 마음이 이상하게 아팠다.
“누가 이 사람들을 썼을까요?”
인호가 물었다.
해주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노트가 뜨거워졌다.
“왜 이러지?”
노트를 펼쳤다.
마지막 장.
자신이 쓴 적 없는 문장들이 있었다.
독자 여러분, 이제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윤해주도, 박지은도, 서인호도 아닙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모든 사람을 살려낸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해주가 읽었다.
“이게 뭐야?”
인호가 노트를 받아 들었다.
얼굴이 굳었다.
“누가 썼습니까?”
“몰라요.”
“당신 글씨가 아닙니다.”
“당신도 아니고?”
“네.”
그 순간 한 문장이 더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숨을 죽였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첫 문장을 찾아오십시오.
해주가 말했다.
“첫 문장?”
인호가 마을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첫 문장 마을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뜻 같습니다.”
“뭐가?”
“이 이야기의 첫 문장.”
해주는 노트를 덮었다.
“찾아보죠.”
⸻
두 사람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빵집.
학교.
우체국.
공원.
모든 곳에 문장이 있었다.
빵집 벽.
어느 날 빵집에 이상한 손님이 찾아왔다.
학교 칠판.
그해 봄, 아이는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우체국.
주소 없는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공원 벤치.
노인은 매일 오후 네 시에 같은 사람을 기다렸다.
모두 첫 문장이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없었다.
해주가 말했다.
“세상에 시작된 이야기가 이렇게 많네요.”
인호가 말했다.
“끝난 이야기보다 많을지도 모르죠.”
“왜?”
“시작은 쉽고 끝은 어려우니까.”
해주는 그 말을 마음에 담았다.
그러다 작은 도서관을 발견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책장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모든 책이 얇았다.
한 페이지.
한 문장.
해주는 한 권을 꺼냈다.
나는 오늘 아버지를 죽이기로 했다.
“강하네.”
인호가 말했다.
“다음이 궁금합니다.”
해주가 페이지를 넘겼다.
없었다.
“여기서 끝.”
“잔인하군요.”
“누가 더 잔인할까?”
“뭐가요?”
“아버지를 죽이려는 사람?”
해주는 책을 덮었다.
“아니면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작가?”
인호가 웃었다.
“작가가 더 잔인합니다.”
“역시 작가 싫어하네.”
“경험이 안 좋았습니다.”
해주는 웃었다.
도서관 가장 안쪽으로 갔다.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다른 책들과 달랐다.
낡았다.
표지에는 제목이 없었다.
해주가 펼쳤다.
첫 페이지.
한 문장.
해질녘이면 사람들은 지나간 것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
해주의 숨이 멎었다.
“이 문장…….”
“기억납니까?”
“아니.”
그런데 가슴이 아팠다.
처음 보는 문장인데 너무 그리웠다.
마치 오래전에 자신이 했던 말처럼.
인호가 말했다.
“이게 첫 문장 같습니다.”
해주가 책을 들었다.
그 순간 도서관의 모든 책장이 흔들렸다.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쾅.
문이 저절로 닫혔다.
그리고 누군가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두 사람이 돌아보았다.
도서관 입구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젊은지 늙은지도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얼굴이 기억되지 않았다.
보는 순간에는 분명 보이는데 시선을 돌리면 어떤 얼굴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축하합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찾으셨군요.”
해주가 물었다.
“누구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냐고요.”
그 사람은 웃었다.
“독자입니다.”
해주와 인호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독자?”
“네.”
“무슨 독자?”
그 사람은 해주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당신 이야기의.”
해주의 얼굴이 굳었다.
“내 이야기를 읽었어요?”
“처음부터.”
“저녁상점도?”
“네.”
“박지은도?”
“네.”
“서인호도?”
“물론.”
인호가 앞으로 나섰다.
“당신이 노트에 문장을 썼습니까?”
“일부는.”
“왜?”
독자가 웃었다.
“이야기가 멈출까 봐.”
해주가 물었다.
“당신이 우리를 움직였어요?”
“아니요.”
“그럼?”
“읽었을 뿐입니다.”
“읽는 게 뭐가 달라?”
독자가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이야기는 누군가 읽는 순간 달라집니다.”
“어떻게?”
“인물이 혼자 있을 때는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는 첫 문장만 있는 책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군가 읽으면.”
해주를 바라보았다.
“살기 시작하죠.”
해주의 가슴이 뛰었다.
“그러니까…….”
“박지은이 당신을 만들었습니다.”
“…….”
“하지만 내가 당신을 살렸습니다.”
인호가 물었다.
“당신이 누구길래?”
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주가 물었다.
“이름은?”
“없습니다.”
“사람인데 이름이 없어요?”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독자가 말했다.
“읽는 사람입니다.”
해주는 웃었다.
“그게 사람이지.”
독자도 웃었다.
“당신답군요.”
“나를 안다며.”
“아주 잘 압니다.”
“그럼 하나 물어볼게요.”
“물으세요.”
“왜 내가 이렇게 오래 헤매게 놔뒀어요?”
독자가 잠시 침묵했다.
“내가 결정하면 이야기가 아니니까.”
“뭐가 되는데?”
“명령.”
해주는 그 말을 생각했다.
“그래서 보기만 했어요?”
“아니요.”
“그럼?”
“궁금해했습니다.”
“뭘?”
“당신이 다음에 무엇을 선택할지.”
“그게 전부?”
“그게 독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입니다.”
해주는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누군가 자신을 끝까지 궁금해했다.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살아남을지.
사랑할지.
그 궁금함 때문에 자신이 계속 존재했다면.
“그럼 이제 왜 나타났어요?”
독자가 대답했다.
“끝이 가까우니까.”
해주의 표정이 굳었다.
“끝?”
“네.”
“누구 마음대로?”
독자가 웃었다.
“그 질문도 당신답군요.”
“나는 아직 끝낼 생각 없는데.”
“압니다.”
“그럼?”
독자는 첫 문장이 적힌 책을 가리켰다.
“그래서 당신에게 마지막 선택을 주러 왔습니다.”
해주가 한숨을 쉬었다.
“또 선택.”
“이번에는 두 개가 아닙니다.”
“몇 개인데?”
“하나.”
“그건 선택이 아니잖아.”
“맞습니다.”
독자는 말했다.
“부탁입니다.”
해주의 표정이 달라졌다.
“뭔데요?”
독자는 도서관 창문을 가리켰다.
밖.
첫 문장 마을.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에게 다음 문장을 써주세요.”
해주의 눈이 커졌다.
“내가?”
“네.”
“왜?”
“당신은 끝까지 살아본 인물이니까.”
“작가도 아닌데.”
“그래서입니다.”
해주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몇 명인데요?”
“정확히 모릅니다.”
“대충.”
“수십억.”
해주가 독자를 돌아보았다.
“미쳤어요?”
인호가 웃음을 참았다.
독자가 말했다.
“한 명씩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한 문장이면 됩니다.”
“어떤?”
“그건 당신이 정해야죠.”
해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첫 문장만 가진 사람들.
모두 누군가에게 만들어졌지만 다음을 받지 못했다.
자신과 같았다.
박지은에게 만들어지고 버려졌던 윤해주.
서인호.
보미.
해원.
317명의 인물들.
해주는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노트를 펼쳤다.
펜을 들었다.
“이렇게 쓰면 될까요?”
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주는 첫 문장을 썼다.
그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
종이가 붉게 변했다.
오류
해주가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인호가 말했다.
“너무 성의 없습니다.”
“알아.”
문장을 지웠다.
다시.
그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
오류
“이것도 아니고.”
독자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해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행복.
성공.
사랑.
그런 걸 정해주는 것은 또 다른 작가의 폭력이 될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었다.
다음.
딱 그것.
해주는 썼다.
그리고 다음 날이 왔다.
아무 오류도 없었다.
도서관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처음이었다.
빵집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자전거를 멈췄다.
노인이 물뿌리개를 내려놓았다.
버스정류장으로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해주의 눈이 커졌다.
“됐어.”
인호가 웃었다.
“됐습니다.”
첫 문장 마을에 처음으로 두 번째 문장이 생겼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빵집 주인은 반죽을 시작했다.
아이는 자전거에서 내려 친구에게 달려갔다.
노인은 화분을 옮겼다.
버스정류장의 여자는 버스에 타지 않았다.
대신 걸어갔다.
자기가 선택한 방향으로.
해주는 웃었다.
“좋네.”
독자가 말했다.
“이제 알겠습니까?”
“뭘?”
“왜 당신이 필요했는지.”
“왜?”
“작가는 첫 문장을 줄 수 있습니다.”
독자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결국 인물이 살아내야 하니까.”
해주는 노트를 덮었다.
“그럼 끝났네요.”
“아직.”
“또 뭐가 있어요?”
독자가 웃었다.
“당신 이야기.”
해주의 웃음이 멈췄다.
“내 이야기는 내가 쓴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럼 됐잖아.”
“마지막 문장이 없습니다.”
“안 쓸 건데.”
“왜?”
“마지막이라고 쓰는 순간 끝나잖아.”
독자가 고개를 저었다.
“모든 마지막 문장이 끝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어떤 마지막 문장은.”
그가 해주의 노트를 바라보았다.
“책에서 사람을 풀어줍니다.”
해주의 심장이 뛰었다.
“어디로?”
독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윤해주 씨.”
“네.”
“당신은 이제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해주는 생각했다.
작가?
아니었다.
인물?
그것도 아니었다.
엄마?
수연의 엄마는 박지은이었다.
연인?
아직 모르겠다.
그냥 윤해주.
그것이면 충분했다.
“사람.”
독자가 웃었다.
“이미 사람입니다.”
“그럼.”
해주도 웃었다.
“그냥 살고 싶어요.”
“어디에서?”
“어디든.”
“누구의 이야기 안에서도?”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잠시 침묵.
“아무도 나를 쓰지 않는 곳에서.”
독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슬퍼졌다.
“그곳에 가면 나는 당신을 읽을 수 없습니다.”
“왜?”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럼 당신도 나를 잊어요?”
“아마도.”
해주는 조금 서운했다.
“처음부터 읽었다면서.”
“네.”
“다 잊는다고?”
“책 밖으로 나간 인물은 독자에게도 보이지 않습니다.”
해주는 한참 독자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보내줄 거예요?”
독자가 웃었다.
“그래서 왔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붙잡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보내주기 위해 온 독자.
해주는 처음으로 그 사람에게 물었다.
“내 이야기 재미있었어요?”
독자가 웃었다.
“아주.”
“어디가?”
“당신이 계속 틀려서.”
해주가 어이없어 웃었다.
“칭찬 맞아요?”
“네.”
“또?”
“계속 틀리면서도 다음 선택을 했으니까.”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됐다.
“마지막 문장 쓰면 돼요?”
“네.”
해주는 노트를 펼쳤다.
펜을 들었다.
그런데 손이 멈췄다.
“인호 씨는?”
인호가 말했다.
“나도 갑니다.”
독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왜?”
“서인호 씨에게는 자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호의 얼굴이 굳었다.
“어디에?”
독자가 책장 하나를 가리켰다.
책 한 권.
《비가 그친 역에서》
인호가 다가갔다.
책을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
서인호는 역을 떠났다.
그리고 빈칸.
독자가 말했다.
“당신도 마지막 문장을 써야 합니다.”
인호가 해주를 바라보았다.
“같은 곳으로 갈 수 있습니까?”
“모릅니다.”
“왜?”
“책 밖에는 내가 볼 수 없으니까.”
해주가 웃었다.
“좋네.”
인호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뭐가 좋습니까?”
“모르잖아.”
“그래서?”
“우리가 같은 곳에서 만날지 아닐지 아무도 모르는 거.”
해주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진짜 우연일 수 있잖아.”
인호가 웃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각자의 책 앞에 앉았다.
해주.
인호.
펜을 들었다.
독자가 말했다.
“준비됐습니까?”
해주가 말했다.
“아니요.”
인호도 말했다.
“나도.”
세 사람은 웃었다.
해주가 물었다.
“꼭 준비돼야 해요?”
독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그럼 갑시다.”
해주는 노트에 마지막 문장을 썼다.
윤해주는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 곳으로 걸어갔다.
인호도 썼다.
서인호는 처음으로 작가가 없는 세상을 선택했다.
두 책이 동시에 빛났다.
해주가 인호를 바라보았다.
“또 만나요.”
인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 하지 맙시다.”
“왜?”
“약속이 되니까.”
“그럼?”
인호가 웃었다.
“잘 가요.”
해주도 웃었다.
“잘 가요.”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해주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죽는 것이 아니었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책장을 나가는 것이었다.
해주는 마지막 순간 독자를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독자가 물었다.
“뭐가요?”
“끝까지 읽어줘서.”
독자의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고였다.
“나도 고맙습니다.”
“왜?”
독자가 말했다.
“끝까지 살아줘서.”
해주가 웃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인호도 사라졌다.
두 권의 책이 조용히 덮였다.
⸻
도서관에는 독자만 남았다.
첫 문장 마을은 더 이상 첫 문장 마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으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사랑했고.
누군가는 헤어졌고.
누군가는 성공했고.
누군가는 실패했다.
누군가는 아주 평범하게 살았다.
그러나 모두에게 다음 날이 왔다.
독자는 해주의 노트를 집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윤해주는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아래에 빈 공간이 있었다.
독자는 펜을 들었다.
한참 망설였다.
그리고 내려놓았다.
“아니지.”
이제 자신이 쓸 차례가 아니었다.
책을 덮었다.
표지에는 제목이 있었다.
《저녁을 파는 가게》
독자는 책을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 도서관 불을 껐다.
⸻
어느 도시.
어느 저녁.
작은 카페.
한 여자가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예순쯤.
노트를 펼쳐놓고 있었다.
커피 한 잔.
창밖으로 노을.
여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그저 저녁을 바라보았다.
직원이 물었다.
“손님, 주문 더 하실까요?”
여자가 웃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글 쓰세요?”
“아니요.”
“그런데 노트는 왜?”
여자는 잠시 생각했다.
“혹시 쓰고 싶은 게 생길까 봐.”
직원이 웃으며 돌아갔다.
잠시 뒤 카페 문이 열렸다.
딸랑.
한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셔츠.
회색 바지.
남자는 빈자리를 찾았다.
한 자리뿐이었다.
여자의 맞은편.
“실례합니다.”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잠시 멈췄다.
어디서 본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았다.
남자가 물었다.
“여기 앉아도 됩니까?”
여자가 말했다.
“네.”
남자가 앉았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지 않았다.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이 좋네요.”
여자가 웃었다.
“그러게요.”
“저녁 좋아하세요?”
여자는 잠시 생각했다.
“예전에는 싫어했던 것 같아요.”
“왜요?”
“지나간 게 많이 생각나서.”
“지금은?”
여자는 노을을 바라보았다.
“좋아요.”
“왜?”
“지나간 것도 내 것이니까.”
남자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좋은 말이네요.”
“써먹지 마세요.”
남자가 웃었다.
“내가 글 쓰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여자도 웃었다.
“아니요.”
두 사람은 다시 저녁을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하루를 잘 보냈고.
누군가는 망쳤고.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했고.
누군가는 사랑을 끝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같은 저녁이 왔다.
남자가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여자가 대답하려다 멈췄다.
이상했다.
입안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낯설면서도 오래된 이름.
그녀는 웃었다.
“윤해주예요.”
남자의 표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성함은요?”
남자는 대답했다.
“서인호입니다.”
이번에는 여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동시에 웃었다.
“이상하네요.”
해주가 말했다.
“그러게요.”
“처음 만난 것 같지가 않아서.”
인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처음이라고 합시다.”
“왜요?”
“그래야 다음이 생기니까.”
해주는 그 말을 좋아했다.
노트를 펼쳤다.
“갑자기 쓰고 싶은 게 생겼어요.”
“뭡니까?”
“한 문장.”
“써보세요.”
해주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적었다.
해질녘이면 사람들은 지나간 것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된다.
손이 멈췄다.
어디선가 썼던 것 같았다.
하지만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인호가 물었다.
“다음 문장은요?”
해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저녁은 끝이 아니었다.
아침과 밤 사이.
하루가 자기 삶을 돌아보는 시간.
그제야 해주는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을 썼다.
그러나 지나간 것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호가 읽었다.
“좋네요.”
“그렇죠?”
“다음은?”
해주는 펜을 내려놓았다.
“내일 쓰죠.”
“왜?”
“오늘은 여기까지 살았으니까.”
두 사람은 웃었다.
⸻
그날 밤.
아무도 없는 도서관.
《저녁을 파는 가게》가 꽂힌 책장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툭.
책이 혼자 바닥으로 떨어졌다.
표지가 열렸다.
마지막 페이지.
원래 없던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이 이야기는 끝났다.
잠시 뒤 그 문장에 줄이 그어졌다.
그리고 새로운 문장.
아니, 이야기는 끝났지만 사람은 계속 살았다.
그 아래.
누군가 마지막 한 줄을 썼다.
그러므로 이것은 끝이 아니라, 더 이상 기록하지 않기로 한 지점이다.
책이 조용히 덮였다.
이번에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종결은 아니었다.
책 밖에서 윤해주는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
그리고 아주 먼 곳.
처음의 저녁상점.
문은 닫혀 있었다.
간판도 내려갔다.
유리병도 사라졌다.
벽의 시계들은 모두 멈췄다.
그런데 카운터 위에 장부 하나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 손님.
윤해주.
구입한 것.
다른 삶.
반품한 것.
후회.
그리고 정산란.
완료.
그 아래 작은 글씨.
손님은 자신이 살아낸 삶을 가지고 돌아감.
누군가 장부를 덮었다.
이번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저녁상점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간판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뒷면에 오래 숨겨져 있던 문구가 드러났다.
이곳에서는 저녁을 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당신이 이미 가진 저녁을 돌려드립니다.
⸻
카페에서 해주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있었다.
“인호 씨.”
“네.”
“내일도 여기 올 거예요?”
인호가 웃었다.
“모르겠습니다.”
해주도 웃었다.
“나도.”
그 대답이 좋았다.
약속하지 않았다.
운명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만날 거라고 쓰지도 않았다.
내일 두 사람이 같은 카페에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것이 삶이었다.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볼 수 있는 것.
해주는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다른 삶을 꿈꾼다.
그러나 끝내 돌아와야 하는 곳은 완벽한 삶이 아니다.
자기가 실제로 걸어온 삶이다.
상처가 있고.
후회가 있고.
지워버리고 싶은 페이지도 있고.
다시 읽고 싶은 문장도 있는 삶.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나서야 사람은 비로소 자기 이름으로 다음 장을 시작한다.
해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갈게요.”
인호가 물었다.
“어디로요?”
해주는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저녁바람이 들어왔다.
“집으로.”
“어디가 집입니까?”
해주는 잠시 멈췄다.
그러다 웃었다.
“가다 보면 알겠죠.”
문밖으로 나갔다.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해주는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아무도 그녀가 소설 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무도 그녀가 몇 번의 삶을 살았는지 몰랐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이제 윤해주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하루를 살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가장 특별한 삶이었다.
해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저녁은 지나간 하루의 끝이었지만,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아침의 가장 가까운 자리였으므로.
그리고 그날,
윤해주는 마침내 알았다.
삶은 잘 쓴 이야기여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직 다음 문장을 알 수 없어서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저녁 너머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 뒤를 쓰지 않았다.
— 14부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