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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수원] 비판의 피해자는 자신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탈출 11, 10 - 12. 14
† 복음 : 마태 12, 1 - 8
★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고자 하셨지만, 파라오는 순순히 이들을
내보내지 않고 고집을 부린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를 치시고자 양이나 염소를 사용하신다
(제1독서).
★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픈 나머지 안식일임에도 밀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지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법을 비롯한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남의 곡식에 손을 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에
따르면, 추수 행위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노동으로, 밀
이삭을 뜯는 행동은 바로 수확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나친 율법주의로 말미암아 율법의
근본정신을 소홀히 여기는 이들의 태도를 나무라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법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왜 하필 안식일 법의 근본정신이 자비인지는, 안식일의 기원을
전하는 ‘천지 창조’의 이야기(창세 2,1-3 참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뒤
이렛날에 쉬십니다. 그런데 사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굳이
휴식이 필요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휴식하신
것을 창세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2,3).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축복하시고자 쉬신 것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생활이나 노예 생활 때문에 쉬고 싶어도
강제적으로 노동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만이라도 쉬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을 갖자는
데에서 생겨난 것이 안식일 법입니다. 곧 이 법은 약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자비의 법인 것입니다.
어제 복음을 묵상하면서도 보았듯이 ‘사랑’은 모든 법의
근본정신입니다.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법을 지키고
있는지에만 집착한 나머지 사랑의 마음을 담은 삶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 매일 미사 -
◈ [청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우리의 신앙은 과연 몇 번째 단계일까요?
2013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제가 전에 본당신부로 있었던 곳은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
단지로 새롭게 조성된 구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개발 과정 안에서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나 봅니다.
즉, 더 많은 보상을 받으려는 측과 재개발 조합 측에 서서
보상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측의 심한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정방문을 하다 보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더군요.
“저는 이제 성당에 안 나갑니다. 재개발 문제로 인해서
가톨릭 신자들 때문에 얼마나 아픔을 많이 겪었는지 몰라요.
돈 앞에서는 신자도 소용없더라고요. 아니 오히려 신자들이
더 열심히 욕하면서 싸웁니다. 가톨릭의 교리와 그 밖의
교육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그때 신앙의 회의가
들어서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닌 의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성당 안에 더 많은 죄인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신앙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음의 세 가지 단계까지 나아가야만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앎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첫째
단계입니다. 다음 두 번째 단계는 이해입니다. 주님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사랑의 일을 본받아 나의 이웃들에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표현의 단계입니다.
바로 이 세 번째 단계까지 가야지만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삼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지요. 어쩌면 일 단계인
앎에도 제대로 도달하지 못해서 주님께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예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배고파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 발단이 된 것이었지요. 밀 이삭을
뜯었으니 추수이고, 밀을 먹기 위해 손으로 비볐을 테니
이것이 타작의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든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생각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율법을 공부하고 외우면서
하느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그 모든 행동에
대해 깊은 이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앎과 이해까지만
도달했을 뿐,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없었기에
오히려 하느님의 아드님을 고발하는 커다란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우리의 신앙은 과연 몇 번째 단계까지 도달했나요? 마지막
사랑의 표현 단계까지 도달해서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스피노자)
CBCK(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전국 성소국장 회의 왔습니다.
모기 퇴치법
여름에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더위만이 아니지요. 어쩌면
더위보다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모기의 활동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모기 퇴치제라는 것도 많이 판매가 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모기에게 많이 잘 물리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름만 되면 모기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인터넷에서 ‘모기 퇴치법’이라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최고의 모기퇴치법은 선풍기를 틀어 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모기가 들끓는 곳에 선풍기를 틀어 놓으니 모기들이 더
이상 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조리기계업체 스위프푸드이퀴프먼트의 프랭크 스위프 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자가 어떻게 이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느냐는
E-Mail을 보내었습니다. 그러자 스위프 사장은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면 모기처럼 생각하면 된다. 내가 모기라면 시속 24km로
불어오는 바람 속으로 뛰어들고 싶진 않을 것이다.”라고 답변한
것입니다.
이 방법은 실제로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고 하더군요. 미국
뉴저지주에 소재한 비영리법인 미국모기관리협회(AMCA)
에서는 “모기들은 빠르게 날지 못한다. 기껏해야 시속
1.6~2.4km이다. 따라서 선풍기를 틀어놓는 대단치 않은
기술(low-tech)이 모기를 퇴치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밝힙니다.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면 모기처럼 생각하면 된다는 말. 이 말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입장 바꿔 생각하라는 옛 말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들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
- 인천 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테오 신부 -
◈ [기타]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2013년 다해 7월19일
어제는 하루가 참 길었습니다. 수련장에서 새벽미사를 하고,
7시 16분 지하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내려, 1호선으로 갈아타고,
신도림역에서 내려, 마을버스 타고 신도림동 성당엘 갔습니다.
후배신부님의 부친께서 선종하셨고, 장례미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례미사 후에는 명동으로 가서 복음화학교
후원회 미사를 했습니다. 복음화 학교 미사를 마치고 신촌에
있는 연세대학교 병원엘 갔습니다. 아는 분이 아프셔서 입원했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은 참
일이 많았구나.’ 어떤 일은 꼭 해야 하는 일이고, 어떤 일은
도의상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런 일들 때문에 몸이 피곤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본당 신부님들 중에는 사목의 스타일이 서로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한주만 늦어도 예비자 교리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3번만 빠지면 교리반에서 제명하시기도 합니다. 엄격한
법 적용은 가끔 원망을 듣기도 하지만 본당의 모든 일에 질서가
잡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친하다는 이유로
법과 원칙을 무시하면 지금 당장은 좋을지라도 나중에는 더 큰
혼란이 야기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한두 달 늦게 와도
교리반에 받아 주기도 합니다. 결석을 많이 했어도 나중에 사정을
하면 세례를 주기도 합니다. 신부님께서 편하다고 좋아하기도
합니다. 신부님께서 자상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뒤에서는
원리와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을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 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아주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엄격하고
원칙적이셨습니다. 박사학위도 3개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곧 법이였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당의
모든 단체는 질서를 잘 지켰습니다. 본당의 모든 시설물도 관리가
잘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생활이 시계추와 같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존경하였지만 신부님께서 엄하셨기 때문에 무척
어려웠습니다. 전임 보좌신부님은 신부님으로부터 많은 질책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법과 원칙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비판의 피해자는 자신
2013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복음 : 마태오 12,1-8
< 비판의 피해자는 자신 >
영국에 있는 대형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신사가 이 박물관에 들어와 그곳에 진열된
작품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그 작품들을 한참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열심히
적으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습니다. 처음부터 이
청년의 수상한 거동을 지켜보던 수위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그 젊은 신사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은 작품들 앞에서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설명 태도는 너무나 진지했고
어린이들은 아주 잘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관림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그 신사에게 수위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어제는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작품을
보셨습니까?”
그러자 그 선생은 “바로 이 아이들의 작은 키로 이들이 볼
수 있는 눈높이에서 작품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죠.”
우리는 우리 판단에 대해 너무 자신 있어 할 때가 많고,
혹은 그것 때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한 자매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 해 준 것인데 재미있습니다.
자신이 길을 가는데 버버리 코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뒤쫓아
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 했는데 그 사람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뒤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막 뛰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의 버버리로 이 자매를 가리면서 귀에
이렇게 속삭이더라는 것입니다.
“치마가 엉덩이에 끼였어요!”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 대부분은 크나 작으나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병원 봉성체 때 안수를 해 주려고 하면 누워서 침을 뱉고
욕설을 하는 아주머니가 생각납니다. 이 분은 침대에 손이
묶여 있는데 손을 머리 쪽으로 가져가면 머리를 이리 저리로
흔들며 괴로워합니다. 아프게 하려는 것이 아닌데 이전의
기억 때문에 그러는지 복을 주려는 사람도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 안에서 상대를 보면
자기 기준을 벗어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서양 속담에 ‘저녁에 의자를 사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저녁 때 일을 하고 피곤한 상태가 되면 모든 의자가
다 편해 보이게 돼서 아무 것이나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는 ‘배고플 때 식료품을 사러가지 말라’고 하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다 맛있어 보이니 과소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는 남자를 다시 고를 때
시간을 좀 두고 골라야지 그 안에 절망과 화가 남아있다면
올바로 남자를 고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마음엔 율법의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미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대로 보이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 눈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는 관점을 ‘주관’이라고 하고, 제3자가 보는 관점을
‘객관’이라고 합니다. 주관이란 말 안에는 나의 생각이
개입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이미 나의 판단은 할
때서부터 내 자신의 생각에 의해 오염되어 인식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인식의 순간부터 오류에 빠지는 것이니 그
인식을 통한 판단이야 어떻겠습니까?
사람이 완전히 순결하고 깨끗하고 악한 마음이 하나도
없기 전까지는 누구를 완전히 판단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 들여야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그 믿음에
반하는 것들은 다 틀려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하여도 베드로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예수님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옳게 보고 판단하실 수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람을 판단하는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Gibson 박사와 Fink 박사는
다음과 같은 발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
도시에서 잘 알려진 큰 사업가이며 유명인사 한 사람이
이 병원을 찾아와서 핑크 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주 안절부절 하고 긴장 중에 있습니다. 푹 쉬어서
마음에 안정을 찾으려고 애를 써도 잘 되지 않습니다. 나의
건강상태는 양호합니다. 또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편안히 쉴 수 있는지 좀 알려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핑크 박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근래에 그런 문제를 다룬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미 한 두 권의 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무 해답도 주지 못했고, 그 사람은 그렇게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 그의 말은 핑크 박사에게 큰 도전거리를
주었고 또 자기들이 어떤 중요한 포인트를 놓친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브손 박사와 함께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장장 두
시간의 회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과거 2년 동안의 모든 기록을 조사해서 그 사람처럼 긴장과
불안에 싸여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적인 요소나
특징이 혹시 없는가를 찾아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작업에 착수했고, 오랜 작업 끝에 드디어 한 가지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내려는 태도,
즉 남을 비판하는 정신이나 태도였습니다. 무슨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남에게서 찾아내어 책망하고 비판하려는
자세, 남의 잘못을 언제나 말하고 생각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그런 증상의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직원들은 스스로 놀라서 한 두 시간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남의 결점이나 잘못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세는 심적인 불안, 고통과 심지어 정신병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판단 받지 않으려면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기준으로 너희도 판단
받게 될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은 의학적으로 규명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면 자신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두려움도
커진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잘못하다가는 바리사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비판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긴다면 항상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아픔이든 기쁨이든 함께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마태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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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 곳곳에 수 많은 강이 흐른다
길고 깊게 흐르는 강 우리를 가른다
서로 물 건너 마주 바라보지만
아~ 만나지 못한 채 그 눈길은 불신으로 가득 차.
어찌 강 위로 다리를 우리 놓지 않는가
어찌 강 위로 다리를 놓지 않는가
어찌 강 위로 다리를 놓아 서로 만나지 않는가
어찌 다리를 놓지 않나 (다리를 놓지 않나)
강은 장벽을 쌓는다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양편 언덕을 갈라선 부자와 가난한 이들
흑인들은 건너편 둑 위에 있는
아~ 백인 형제들을 멀리서 바라다 본다.”
20대 때 통기타와 함께 많이 불렀던 ‘다리’라는 노래의 가사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사 내용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이다. 아니 오히려 보다 복잡한 종류의 아픔들이 산재해
있는 세상이다.
왜 사람들 사이에는 미움의 강이 항상 존재해야 하는가?
왜 사람들은 이기심이라는 벽을 부수기가 힘든 것일까?
배고파서 밀이삭을 까먹는 이들의 배고픔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법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악법이 아니라 한다면, 그것이 만들어진 데에는 반드시 옳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정신이 아닌 활자에 묶여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어제 뉴스에서 구급차들이 지나갈 때 다른 차들이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기심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뉴스에서 좀 신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 되는 그런
날을 희망하고 있지만, 늘 스트레스와 분노를 느끼고 만다.
대안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이러한 세상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세상이 늘 악과 싸워야 하는 현실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항상 존재해왔고 그들의 희생적인
싸움 때문에 세상이 유진 된다고 말이다.
세상이 아픈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의 결과다.
그 상처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 역시 모르는 사이에 선을 그어놓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이들을 멀리하는 모습이 있음을 인정하자.
밀어낸다는 것, 쫓아낸다는 것이 악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더욱 양산해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품어야 한다.
그래야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허기져 밀알을 까먹는 이들의 마음이 되어보지 않는다면,
그저 모두가 옳지 못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움을 비롯한 온갖 부정적 감정들은 치유되어야 할 무엇이지,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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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 복음에 대해 묵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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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130430.&type=3&theater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사랑법
2013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 12,1-8
<사랑법>
하느님께서 지니신 속성, 본질적인 측면들을 꼽으라면 어떤
항목들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저는 이런 점이 정말
마음에 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그분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그윽한 눈길, 항상 거기 계심, 변함없음, 한결같음, 언제라도
우리를 받아주고 용서하심, 대자대비하심, 우리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 끝도 없는 증여, 전적인 내어줌....
결국 하느님의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다면 ‘자비’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자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자비의 하느님이시기에 당신의 모상인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지 우리와
완전히 하나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들어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와 완전히 일치하길 원하시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의지 표현이 바로 성체성사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잘 되기만을, 우리 인생길이
활짝 펴기만을, 늘 용기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것을
바라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적극적인 의지 표현이 바로
화해성사가 아닐까요?
정기석 시인의 ‘사랑법’이란 시를 한번 보십시오. 이런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랑’ ‘바보 같은
사랑’을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당신이 들어와서 내 안에 사는 일
당신이 나를 지우는 일
나를 지워서 당신이 되는 일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지우는 일
지워서 주는 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주어
당신의 가슴에 꽃을 심는 일
꽃을 가꾸는 일
꽃으로 살아
당신의 영혼 속에 고이 눕는 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24시간 내내 사십니다.
우리 안에 향기롭고 화사한 꽃으로 피어나십니다. 이보다
더 큰 자비와 은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헤아릴 길 없는 크신 하느님 자비 앞에 우리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을 생각하며 나를
지우는 일입니다. 쓸 데 없는 자존심과 완고한 마음,
지독한 불신과 증오의 마음을 지우는 일입니다.
내 안에 꽃피어난 꽃 한 송이를 정성껏 잘 가꾸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단 한번 우리에게 주신 이 소중한 삶 열심히
살아 아름답게 활짝 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으로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일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되어주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서울] 사람들 간에 물질 거래
2013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사람의 마음을 금전으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느껴집니다. 그러니 뇌물이니 선물이니 쉽게 꿔주느니 등
신경 쓰며 사나봅니다. 과연 그런 생활에 날이 갈수록 점점
깊이 물들어 가는 가 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그런 게 전혀 통하지 않는 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의 물질이 아니라 사람 마음의 근원인
영을 보실 겁니다. 사람들 간에 물질 거래를 자비로운 사랑으로
할 때 체크하실 겁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오 12,7)”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광주] 사랑이 있는 주일 지키기
밀 이삭을 뜯어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니,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먹거리가 오늘날처럼 풍부하지 않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보리나 밀에 낟알이 맺히면 동네 아이들은 보리와
밀을 서리하여 그것을 불에 살짝 구워서 손바닥에 비벼 먹고
새까맣게 변한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웃던 시절이 생각난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서른아홉 가지 노동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추수 작업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탈무드와 같은
책에는 밀 이삭을 자르는 것도 추수 작업에 해당된다고 보는
법해석이 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항의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먹었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따진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 이삭을 뜯어먹었겠는가?
바리사이들 눈에는 제자들의 가엾은 처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식일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옭아매어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법규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번제나 속죄의 제사가 아니라 자비의
실천이다. 타인의 딱한 처지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휘와 무관한 채 법규나 계명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인 삶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허위의식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법의 준수 유무를 들어 타인을 평가하고 단죄하는 습관에
빠지게 한다. 사랑을 담아내지 못한 계명이나 주일 지킴은 하느님
눈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 중국 서주 시대 말기에 당시 사회질서와
규범을 의미했던 예禮가 본래의 취지를 상실하고 변질되자 공자는
예禮에 인仁을 결합시켜 예禮의 참된 의미를 제시한다. 예禮가
인仁(도덕성)에 근거하여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 참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 복음에 등장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한다.
- 김권일 신부(광주대교구 월곡동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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