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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교육과 민주주의의 위기-기로에 선 한국교육 / 김상봉(전남대)
1. 공교육의 위기
한국교육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 한국은 세계에서 달리 유례가 없을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나라이고 그런 까닭에 국민 대다수가 교육에 대해서는 높은 관심과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교육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왜곡된 관심은 없느니만 못하다.
학자들의 경우에는 교육 현실과 유리된 이론의 굴레에 갇혀 있다. 절대 다수의 교육학자들은 그들이 유학지에서 배워온 이론의 창을 통해 교육을 보려 한다. 한국의 교육현실은 서양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왜곡되어 있는 까닭에 서양의 교육이론은 한국의 교육문제를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서양의 교육이론에 준거하여 한국의 교육을 재단하려는 학자들은 한국교육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읽어내지 못한다.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등 교육의 직·간접적 주체들은 한갓 개인의 욕망과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교육을 바라볼 뿐, 그것을 보편적 공공성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현실을 총체성 속에서 생각해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학자들은 현실과 유리된 이론의 성에 갇혀 이론의 이름으로 현실을 오도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육은 급기야 조타수 없는 배처럼 표류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2. 교육이념이 없는 한국교육
한국교육의 위기는 합의된 교육이념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교육이념이 없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교육이라는 배가 어디를 향해 나아갈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배가 좌초하고 난파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물론 한국교육에 이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이념이라는 것들이 현실과 유리된 한갓 구호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명목상으로 한국교육의 이념은 홍익인간이다. 누구도 홍익인간이라는 이상을 나쁘다 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교육의 이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제정당시부터 충분한 논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까닭에 현실적으로 이 이념은 교육을 이끌어가는 지도원리가 되지 못하고 한갓 종이위의 이념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처럼 보편적으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교육의 이념이 없는 까닭에 사사로운 욕망이 실제로 교육을 이끌어가는 원리가 된다.
먼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 등 직접적 교육주체들은 교육이 한갓 출세의 수단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 나라에서 교육의 목적은 좋은 학벌집단에 진입함으로써 남보다 더 큰 권력과 부를 얻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서울대 출신은 한국의 왕족이며 연·고대 출신이 귀족이라면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은 천민이나 마찬가지이다. 학벌은 사회적 신분의 재생산장치이며, 교육은 그런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정당화하는 장치이다. 이런 사회에서 학생과 학부모는 교육을 출세를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으며, 학교와 교사는 그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육은 이런 개인적인 출세욕에 더하여 전 사회적인 경쟁력 이데올로기에 의해 다시 왜곡된다. 하지만 경쟁력이란 무엇인가? 진실을 말하자면 경쟁력이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런 한에서 경쟁력은 교육받는 학생 자신의 탁월한 자기실현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을 위한 도구적 경쟁력이다.
이런 오도된 경쟁력 이데올로기는 학교를 시장과 구별하지 않으려 한다. 교육은 자본이 지배하는 무제약적 지평인 시장의 일부가 됨으로써 비로소 자본축적의 온전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요구나 학교 역시 기업과 같은 방식을 경영될 때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생각들은 이 나라에서 교육이 시장원리에 종속됨으로써 제 고유성을 잃고 표류하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3. 인간의 자기실현의 기관인 교육
교육은 인간의 자기실현의 기관이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만 인간이 된다.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로서 세계에 온다. 가능태로서의 인간을 현실태로서 실현하는 활동이 바로 교육이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된다. 첫째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만 다른 종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유성에 도달한다. 즉 모든 사람이 사람인 한에서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지성적, 도덕적, 정서적 능력은 교육을 통해서만 계발된다. 교육은 보편적 인간성의 실현의 기관이다. 또한 교육은 개인의 개성적 인간성의 실현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조건이다. 한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도 교육의 일이지만, 그가 어떤 인간이 되느냐 하는 것도 교육의 일이다. 한 사람의 성격을 가장 크게 결정하는 것도 교육이며, 그의 기능적 소질을 계발해주는 것도 교육이다. 물론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학교교육이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는 유일한 결정요인은 아니지만, 성격의 면에서나 기능적 소질의 면에서 좋은 교육이 더 좋은 사람을 낳고 나쁜 교육이 더 나쁜 사람을 낳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한에서 우리의 교육이 보다 좋은 교육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모든 교육자들에게 맡겨진 과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좋은 교육이며 무엇이 나쁜 교육인가?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이 자기의 본래성과 일치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자기를 거스르는 것이 나쁜 것이다. 교육이 인간성의 자기실현의 기관이라면, 그것이 인간의 자기실현에 이바지할 때 좋은 것이 되고 그렇지 않을 때 나쁜 것이 된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은 좋은 것이지만 인간 아닌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 그리하여 인간을 그 다른 것의 도구로 만들기 위한 교육은 나쁜 교육이다. 이것이 좋은 교육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규정이다. 이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교육은 본래적인 인간성의 실현이 아니라 왜곡된 시장주의와 출세욕에 의해 도구로 전락했다는 의미에서 교육의 참 길에서 이탈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4. 교육의 이념
하지만 인간을 위한 교육이 좋은 교육이라는 규정은 아직 내용 없는 원론적 규정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성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까닭에 인간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명목상 똑같이 인간을 위한 교육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대단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바람직한 인간성을 근면한 노동자의 모습에서 찾는다면,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교육은 유능한 노동자를 양성하는 일일 것이다. 또는 유교적 전통사회에서처럼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 그를 금수와 구별해주는 결정적 징표라 생각한다면, 교육이란 다른 무엇보다 인간의 도덕성을 함양하는 데 존립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사회가 인간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교육 역시 그 추상적 이념에서는 똑같이 인간성 실현의 기관이라 하더라도 그 구체적 내용에서 현저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고정되어 주어진 답은 없다.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로서 일정한 한계 속에서나마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우리들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이다. 교육이 인간성의 실현의 기관인 한에서, 우리가 스스로 정립하는 인간의 이상은 또한 교육의 이념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성의 이상은 과연 무엇인가? 만약 여기서 우리가 이런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성의 이상이라고 고정시켜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교육의 이념으로 주어진다면, 우리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들이 무엇이 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 것이 된다. 그 경우 우리는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성의 소질 곧 능동적인 자기실현의 능력을 침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성의 이상이나 교육의 이념이 한 가지 방식으로 고정되어 주어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교육은 어떤 이념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이념 없는 교육은 방향 없는 교육과도 같아서 맹목적이다. 그러나 교육에 방향이 있어야 하지만, 교육의 이념이 한 가지 방식으로 고정되어서는 안 된다면 이는 일종의 모순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성의 이상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요, 교육의 이념과 방향이 없으면서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꼭 하나밖에 없다. 즉, 교육이 추구해야 할 인간성의 이상은 자기를 스스로 실현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교육이 추구해야 할 이념과 목표는 인간의 자기실현의 능력 그 자체를 극대화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자기실현의 능력 역시 계발되지 않을 때에는 다른 구체적 능력들과 마찬가지로 사장된다. 이 능력을 계발하는 것은 인간성의 자기실현을 위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과제인 바, 교육은 이 능력 자체를 계발하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아야 한다. 오직 이런 경우에만 우리는 인간이 이러저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미리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교육을 방향 없는 맹목에서 구출하여 합목적적인 행위가 되도록 할 수가 있다.
5. 주체성과 자유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 행위를 가리켜 우리는 자유라 부른다. 자유는 소극적인 차원에서는 외적 강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만, 적극적 의미에서는 자기를 형성하는 것에 존립한다. 강제로부터의 해방이 중요한 것도 능동적인 형성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렇게 자유롭게 존재하는 자를 가리켜 주체라 한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가리켜 주체성이라 한다. 교육의 이념이 능동적인 자기실현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그 이념은 이제 참된 주체성과 자유의 실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자유와 주체성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적 주체에게서 실현된다. 하지만 개인의 삶이 자기 속에 고립된 것이 아닌 한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사회적 지평에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자신의 주체성을 사회 속에서 실현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 곧 타자적 주체와 더불어 자기가 사는 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회적 삶 속에서 남과 함께 자신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존재를 가리켜 우리는 시민적 주체라 부른다. 그 시민적 주체성이 교육을 통해서만 계발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자유와 주체성은 교육의 본질로부터 연역되는 이념이기도 하지만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요구이기도 하다. 개항 이래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온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은 자유의 실현이었다. 지난 세기의 처음 절반을 우리는 식민통치로부터 민족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웠으며, 그 뒤의 절반을 우리는 독재정권 아래서 시민적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누리는 이 정도의 민족적, 시민적 자유라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왜곡된 교육열임에도 불구하고 배움은 한국인들을 계몽 이전의 문맹상태에서 해방시켜,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역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서도 밝혀질 수 있겠지만, 주체성과 교육의 관계에 대해 철학적으로 성찰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은 물건처럼 고정된 것으로 주어지거나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오직 생각하는 한에서 참된 나로서, 곧 주체로서 존재한다. 올바르게 생각할 줄 모를 때에는 인간의 행위는 무엇을 하든 맹목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직 반성적 성찰이 동반된 행위만이 참된 의미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행위일 수 있다. 그런데 바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거저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바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움으로써만 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자유와 주체성의 전제이다.
그러나 자유와 주체성은 고정된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자라기도 하고 퇴화하기도 한다. 자유와 주체성을 살아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 자체가 이를 위해 깨어 있어야 하며 같이 자라야 한다. 즉 한 사회의 자유로운 제도와 정신의 성장에 대응하여 교육 역시 보다 높은 단계의 자유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때, 교육은 자유의 실현을 위한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어 버린다.
6. 노예교육
오늘날 한국의 교육의 위기는 인간성과 교육의 본질로부터 생각하든 우리시대의 시대정신으로부터 생각하든, 피할 수 없는 자유와 주체성의 이념을 저버린 데서 온 결과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도구적 훈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교육이야말로 이런 당연한 이치를 거역한다.
한국교육이 더 이상 자유로운 정신의 요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 수준의 퇴보가 증명한다.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4·19혁명까지만 하더라도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선두에 중·고등학생들이 있었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교사와 학생들이 정부의 정책에 맞서 같이 시위를 벌이는 유럽 여러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시절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지금에 비하면 개인의 일은 물론이고 자기가 사는 사회의 일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개입할 만큼 삶에 대해 능동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은 철저히 단절되었다. 오늘날 한국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조차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세대이다.
한국의 학교교육이 자유와 주체성을 기르지 못하는 첫째 이유는 한국의 학교가 거의 병영이나 감옥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파시즘적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듯이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 학생에게는 인권이 없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일상은 집단적 규율에 의해 통제되어 자기 자신의 의지와 욕구가 분출될 여지가 극소화된다. 이런 사정은 학교 밖이라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온통 입시경쟁에 종속된 학생들의 삶은 직접적인 강제가 없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구속 가운데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또한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너무도 권위적이어서 학생들은 교사에 대해 노예적 예속관계에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가 급속하게 민주화되어 온 것에 비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적 지체이다. 학교 내에서도 교장·교감과 평교사의 관계가 예전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평등해져가는 추세에 있으며, 이즈음에 와서 교장선출보직제까지 진지하게 논의되는 단계에 이른 것에 비하면, 학생에 대한 교사의 권력은 여전히 전제적 권력이라 할 정도로 막강하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교육을 통해 학생들의 자율적 주체성이 신장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7. 학벌사회와 공교육의 붕괴
한국의 교육을 뿌리에서부터 부패시키는 또다른 요인은 학벌사회와 입시위주 교육이다. 학벌사회의 문제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출신대학에 따라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 자체가 불의한 일이다. 어떤 사회나 교육에 따른 차별이 있을 수 있지만 한국사회처럼 극단적인 나라는 없다. 둘째, 학벌은 현대판 문중으로서 사람들 사이의 건강한 의사소통과 사회적 통합을 치명적으로 해친다. 같은 학교 출신들 사이에서는 맹목적인 친밀감 때문에 다른 학교 출신들 사이에서는 맹목적인 거리감 때문에 합리적 의사소통이 방해받는다. 일과 뜻에 따라 사람들이 모이거나 헤어지지 않고 학벌에 따라 뭉치고 반목하는 나라는 병든 나라이다. 셋째, 입시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교육의 실질적 목적이 됨으로써 교육이 본래성에서 이탈하고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된다. 특히 일류대 합격이 교육의 절대적 목적이 되어버리면 공교육은 장기적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공교육은 모두를 위한 교육이다. 하지만 공교육이 아무리 좋아져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학습능력이 아무리 향상된다 하더라도 서울대학은 그 가운데서 3000명만을 선발하려 한다. 그 3000명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두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한 교육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것이 사교육이다. 사교육이 창궐하는 것은 학벌사회의 필연적 결과로서 공교육은 사교육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리하여 학교는 학원의 부속물로 전락한다. 공부는 학원에서 이루어지며 학교는 평가의 기능만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넷째, 학벌사회는 교육의 경쟁력을 치명적으로 떨어뜨린다. 학생들은 학문에 대한 관심과 소질이 아니라 단지 출세를 위해 대학에 온다. 그 결과 온전한 대학 강의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재 절대다수 한국 대학의 현실이다. 서울대 학생들은 고시에 목을 매고 수많은 연·고대 입학생들은 반수의 길을 선택하며, 보다 서열이 낮은 대학의 학생들은 보다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편입시험을 준비하는 나라에서 대학경쟁력을 말하는 것은 사치이다. 게다가 국가의 경쟁력은 단순히 대학의 경쟁력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력은 대학이라는 울타리에 가둘 수 없는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그러나 한국의 학교교육은 획일적인 대학입시에 짓눌려 학생들의 다양한 개성적 소질을 억압하고 사장시킨다.
8. 맺음말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은 이상적인 나라의 형태를 고민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가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처음으로 고민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교육이 잘못된 곳에 나라가 온전할 수 없다. 지금 한국교육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내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과 같다. 더 늦기 전에 한국의 교육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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