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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가슴에 묻다
정유제
"산을 보고 염송(念誦)하면 산이 부처 되고, 들을 보고 염송하면 산천초목들이 일어나 화답한다."
무공.
정진이 그를 처음 만난 뒤 헤어지면서 '무공'이라고 이름 지어 부르면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연유는 매사에 사람 분별하기를 좋아하고 제 나름대로 속단하며 규정해버리는 지나친 버릇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에게도 분명히 다른 이름이 있겠지만, 싹쓸바람의 습격처럼 더는 말도 못 붙이게 "이름 같은 것은 없다"고 잘라 말하는 그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정진은 '무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가 그렇듯이 정진도 내세울만한 직업이 없는 것은 매 한가지다. 그가 아무런 대가도 없는 산지기를 자청하고서는 산과 들에서 얻는 것으로 모든 생활을 하는 것이나, 자유기고가랍시고 건들거리며 변변찮은 수입도 없이 아내의 벌이로 목숨을 연명하는 정진의 처지는 거기서 거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정진이 살아가는 삶의 질에 있어서는, 찢어지면 남보다도 못한 부부의 인연처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출가와 가출의 의미 차이만큼이나…….
정진이 한 잡지사의 부탁으로 사이비단체를 찾아다니며 세기말적 현상들을 은밀히 취재하면서 무엇하나 마음먹었던 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사도(邪道)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정도(正道)를 가장한 사이비단체의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것처럼 ??이단자와 배신자에 대한 응징??의 대가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튼 제대로 일이 풀려나가질 않았다. 간혹 사이비단체의 은신처를 간신히 찾아들었다 하더라도 관계자들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힘들게 터득한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몸이 드러나지 않게 숨어서 지켜보며 현장을 르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수나롭지 않은 것은 행여 발각되는 순간 온갖 위협은 기본이고 감금에 폭행, 심지어 목숨까지도 담보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좀처럼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다는 일이다. 모르고 덤벼들었던 바는 아니었지만 근 6개월여 동안 건몸 달아 허둥대고 난 뒤에 알게 된 값진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정진은 그 순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금방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간담이 서늘해지고 오금까지 저려오는 것을 느낀다.
정진은 아침에 배달된 신문을 펼쳐들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가 있었다. 사건사고로 범벅이 된 신문 속에서 모처럼 읽을거리를 하나 찾아냈다는 기분에 마음이 달떠서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생전 처음 대하는 '매향비'라는 단어가 생경스러워 호기심도 발동됐다. 그렇지만 이내 곰살궂은 여인을 만난 것처럼 진작 알고 있은 듯 가슴이 두근거려 옴을 느꼈다. 처음부터 단숨에 기사를 읽어 내렸다. 어느 민속학자가 쓴 문화탐구 기사로 '바닷가 비처에 향 묻고 미륵세상 기원'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매향비에 관한 기사다. 정진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침 시간을 흥분시켰던, 매향비 기사가 게재된 신문 지면을 찢어서 네 번을 접고는 주머니 속에 쑤셔 넣은 채 집을 나섰다. 며칠 전부터 사이비단체의 위치를 파악해두고 주위를 살피기까지 해서 잠입하기로 했던 일은 언제, 어느 때 해도 그만이었다. 바쁠 것이 없었다. 정진은 마음이 동하는 대로 차를 몰아 달리는 중에도 매향비만 생각했다.
주로 해안가를 따라 발견되는 매향비는 현재까지 모두 15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발견된 것은 동해안지역 금강산 삼일포의 사선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섬에서 찾아진 것이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정진의 눈길을 끈 것은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산 48―2 남해 바닷가에서 발견됐다는 매향비다. 이 매향비는 6백여 년간 한 개의 자연석으로 방치돼 있었는데 지역 주민들의 향토사랑 정신에 의한 제보로 빛을 보게 됐다는 것이었다. 자연석에 글씨가 적혀있다는 제보를 받고 동아대학교 박물관과 지역 대학들의 관심 있는 교수들에 의해 두 차례 학술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매향비로 밝혀지면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진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 매향비는 높이가 1.6미터, 너비와 두께가 다같이 1.3미터에 달하는 화강암에 세로로 15행씩 음각된 글자 수만도 2백4자에 달한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많이 마모되기는 했지만 판독은 어느 정도 가능했던 것이다.
대강의 내용은 "고려 우왕 13년(1387)에 국운이 쇠퇴하자 승려들을 중심으로 신도 4천1백여 명이 향계(香契)를 조직해 나라의 안녕과 임금님의 만수를 기원하고 내세에 복 받기를 축원하며 향목을 묻고 돌에 글을 새겨 비를 세운다"는 것이다. 비문 판독에 따라 당시 매향의식의 특징은 거주 인구에 견주어 엄청난 군중 동원력에 있다. 4천1백여 명이 계를 모으고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은 의식의 장엄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록 팍팍한 민초들의 삶일지나 자신들의 안위를 포함해 나라의 안녕과 임금의 만수무강을 함께 생각하는 우국충정의 푯대도 된다. 땅에 묻은 희망은 향나무지만, 그 향나무가 침향이 되어 물 위로 떠오르는 날에는 반드시 태평성대가 펼쳐지리라는 확고한 믿음은 가슴에 새기고 돌에도 새겼다. 언젠가는 미륵부처님이 출현해 가져다 줄 것으로 믿고 있었던 그 바람까지 담은 간절함이 매향비에는 그대로 드러난다.
도심을 벗어나자 찻길은 한산했다. 곳곳에서 벼가 누렇게 익어 가는 들판을 끼고 국도로 한참을 달리다 보니 길바닥에서는 아지랑이가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정진의 차는 부산을 출발해 김해, 창원, 마산, 문산을 지나 사천으로 들어서는 길목을 달렸다. 정진은 문산을 지난 다음 몸과 눈의 피로를 풀려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 차 문을 열고 나서는데 한줄기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도심의 찌든 공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정진은 두 팔을 위로 치켜들어서는 길게 뻗고 심호흡을 했다. 심한 갈증 끝에 마시는 청량음료처럼 시원한 바람이었다. 가슴팍에서는 우두둑하는 뼈마디 소리가 들렸다.
급한 마음에 정진은 금방 차에 올랐다. 들판을 가로질러 보이는 다솔마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고향의 마을 같은 풍경을 뒤로하고 정진은 차를 몰아 이내 사천경계로 접어들었다. 풍광이 아름다웠다. 사천은 동남쪽으로 와룡산 주봉이 가로놓여 삼천포와 경계를 짓고, 지맥을 따라 명지재를 넘어 봉태산을 끼고 용견면과 사남면이 나누어진다. 또 다른 지맥에 잇닿아 홍무산, 니구산을 거쳐 성황산이 사남면과 정동면을 구분하고 있는 곳이다. 매향비가 있는 곤양면은 지리산의 지맥 한줄기가 남으로 뻗어내려 그 세력이 쇠퇴해진 지점으로, 남해안에 인접해있다. 크게 보면 소백산맥의 여러 갈래 지맥에 둘러싸여 중앙에 사천만이 깊숙이 자리한 비처(秘處) 중의 비처였다. 갑오년 동학군과 일본군의 격전지로 알려진 고승당산도 자리해 있다. 그런 만큼 일본군의 노략질이 심해 유생들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이 잦을 수밖에 없었으며, 난세에 영웅 난다고 그만큼 걸출한 인물들도 많이 나왔던 곳이다. 더욱이 신라 시대 이래 불도가 흥성해 수많은 사찰들이 즐비하게 있었으며 지금도 불당골이니, 사릿골이니 하는 지명들이 비교적 많이 있는 곳이다.
정진은 흥사리 방향으로 차를 몰아 가다가 멀구리 마을 어귀에서 좌회전을 해 흥사교를 지났다. 매향비각은 산 입구 길옆에 있어 금방 눈에 띄었다. 정갈하게 쌓아올린 돌담 속 빛바랜 단청을 두른 낡은 목조 누각 안에 있는 울퉁불퉁한 자연석은 빼곡히 쓰인 글씨를 칭칭 몸에 감고 존재의 가치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서 있었다. 실물은 신문에 실린 사진보다 훨씬 초라했다. 6백여 년 전에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흥사천과 만나는 기수지역이었다는 사실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지금은 비옥한 농경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마른 하늘 아래서는 반짝이는 윤슬은 은빛 장관을 이루었겠지만 이제는 세월이 변해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매향비각을 한참 살펴보던 정진은 아침에 무작정 집을 나섰을 때처럼 문달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문달사는 아니라도 다른 어떤 절이나 흔적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산을 타고 좀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땔나무를 하지 않는 통에 산은 온갖 나무와 잡풀들로 뒤엉켜 한 발짝을 들이밀 틈조차 주지 않았다. 키보다도 큰 나무며 잡풀을 간신히 헤치며 전투하듯이 산을 올랐다. 우왕좌왕하다가 옷이 찢기고 얼굴에 생채기를 내며 한참을 헤맸다. 6백여 년 전의 세월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했는데도 무서운 생각은 들지 않고 귀에 익은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도량석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목탁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투 곁으로 다가온 듯하더니 다시 점점 멀어지자 뒤를 이어 운판, 목어, 법고가 차례로 따라 울었다. 날이 다 밝은 듯 대가람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오고 요사에서 나온 스님들이 줄을 지어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가람답게 스님의 숫자도 대단해 보였다. 새벽예불을 위한 문달사 스님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산사의 새벽을 깨우고 있다.
산마루터기로 올라섰을 때 마침 불어 오르는 서늘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잠시 쉬었다 가려고 소나무에 기대앉아 문달사를 그려보는 새 살포시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화서지몽, 꿈이었다. 꿈속에서나마 계곡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다던 문달사를 보아서 좋았다. 정진은 순간 저도 모르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고 내뱉었다. 정진은 어둑해진 주변을 휘둘러보고는 서둘러 올라왔던 길을 더듬으며 산을 내려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정진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허전함은 끝내 털어낼 수 없었기에 하루를 묵어갈 양으로 동네어귀로 들어가 민박할 마땅한 집을 물색하기로 했다. 관광지가 되지 못한 터라 여관은 물론 민박할 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초저녁인데도 방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대문을 두드려보지도 못하고 다른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신히 방에 불이 켜져 있는 집을 하나 찾아 대문을 두드렸다.
"거어 누고?"
"예,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문간 사랑채에서 할머니가 인기척을 하며 나왔다.
"예. 낮에 이 마을에 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길손입니다. 동네에 하룻밤 묵어갈 곳이 있으면 좀 가르쳐주십사고 해서……."
"미씨고?"
"여덟씹니다."
"하매나. 그라마 저어거 젤 끝지베 가서 물어보래이."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진은 아무튼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할머니가 일러준 대로 마을의 끝 집으로 찾아갔다. 대뜸 하는 말이 방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역시 시골 인심은 아직 남아있는 듯했다.
"우야노, 만다꼬, 어델 댕깃능교? 그다안에 밥은 뭇능교?"
"예, 대충……."
정진은 민폐를 끼치기가 싫어 밥은 해결을 했다고 둘러댔다.
"에나가? 보자카이 가근방 사람은 아닌가베, 여까장 우짠일로 왔노?"
"할아버지, 혹시 매향비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뭐라꼬. 매행비라. 알다마다. 내 어릴쩡부터 여서 자랐는데 고걸 모르겠노? 그란데 매행비를 우째 찾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도 되었고요. 할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는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먼 곳에서 찾아온 벗이라도 만난 달뜬 기분이 되어 전혀 싫은 기색 없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노인이 들려준 바에 따르면 매향비가 주로 많이 만들어졌던 시대는 고려왕조에서 조선 시대로 정권이 넘어가는 교체기의 혼란한 상황이었다. 양반들이 정권교체기의 불안으로 흔들릴 때 백성들은 왜적의 노략질에 시달려야 하는 큰 걱정거리를 안고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대책 없이 당하고만 있을 때였다. 심지어 중국 연안으로까지 무대를 옮겨가며 약탈행위를 일삼던 해적들이 판을 쳤던지라 경남 사천 흥사리 지방은 그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놓여있어 피해가 더 컸다. 이렇게 해서 매향지의 백성들은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륵신앙을 지극한 정성으로 믿게 되었고, 땅에 향을 묻어 내세에라도 태평성대로 살기를 발원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방문을 열었다. 달빛을 받은 감나무 그림자가 마당가운데 제법 기다랗게 누워있었다.
"이제 초저녁인가 봅니다."
정진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새벽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고도 초저녁쯤 된 것으로 얼버무렸다.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두고 잠자리에 들게 되면 안 된다 싶은 욕심 때문에서 거짓으로 둘러댔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말없이 방문을 닫았다.
"할아버지, 문달사라는 절도 아십니까?"
"문달산지 민달산지는 몰라도 옛날에 절이 있었다 카는 이야기는 들었지. 거 이야길 들을라 카모 천상 낼 날 밝거던 저거 산삐얄에 가마 굴집을 맹글어놓고 내치 사는 사람이 하나 있능기라. 마 거 가서 물어보마 알끼네. 인자 자부럽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툭 던져놓고는 몸을 비틀어 모로 누워 잠을 청하는 듯 말이 없었다. 산속 굴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으로 정진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곱씹으며 밤을 꼴딱 지새웠다.
정진은 할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간밤 할아버지가 일러준 대로 굴집이라는 것을 찾아 서둘러 나섰다. 지름길이나, 달리 있을 법한 길을 알지 못했으므로 전날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서 산을 올라가려다가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 길에서 굴집은커녕 본 것은 나무와 풀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없는 길을 만들면서 헤매는 산길은 훨씬 힘들었다. 간신히 산등성이까지 올라가 반대편 기슭을 내려다보았다. 굴집은 고사하고 사람이 있을법한 그 어떠한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온 산을 다 헤집을까, 하는 성급하고도 방정맞은 마음이 드는 것을 간신히 짓눌러 놓고 무작정 반대편으로 내려가며 찾아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을 다 내려오기까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 하나 발견하지를 못했다. 정진은 지레 실망부터 하며 간밤에 할아버지가 한 말이 거짓은 아닐까, 하고 의심부터 들었다. 올라갔던 반대편 산기슭에 다다랐을 때는 낙담에 빠져들며 한숨부터 내둘러졌다. 저 길을 다시 어떻게 올라가나, 하는 생각에 속았다, 싶은 분한 마음까지 들었다. 속이 매슥거리며 두통까지 일었다. 이 무슨 망할 짓이람, 하고 투덜거리며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를 툭 걷어찼다. 풀 섶에 박혀있던 것이라 발이 더 아팠다.
산을 되오르는 발걸음은 무겁기 한이 없었다. 마치 짐을 한 짐 지고 걷는 듯 발이 땅에서 쉬 떨어지지 않아 질질 끌다시피 억지 걸음을 옮겼다. 산중턱까지 되올라갔을 때 커다란 바윗덩어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미처 내려갈 때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정진은 걸음을 빨리 해서 그곳으로 다가갔다. 바위 앞 흙 위에 사람 발자국 같은 것이 몇 개 나있었다. 고무신 자국이었다. 정진은 직감적으로 근처 어딘가에 굴집이 있겠거니 하고 두리번거려 보았다. 굴이 있었다. 집은 보이지 않고 굴만 바위 바로 옆에 있었다. 굴 입구는 수풀로 철저하게 가려져 있어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는 놓치기 십상이었다. 사람이나 짐승의 접근을 막기 위해 사람의 힘으로 위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자연이 빚어놓은 철저한 비밀의 장소처럼 여겨졌다. 정진은 굴 입구를 찾은 설렘에 겨워 두려움도 없이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만 짧은 간격을 두고 연이어 들려왔다. 한 번은 앞쪽에서 나는 것 같았고, 또 한 번은 뒤쪽에서 나는 것 같아 앞뒤는 물론 사방을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순간 바닥 어딘가에 물웅덩이 같은 것이라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옴짝달싹도 못하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겨우 발밑을 분간할 수 있었다.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내다보니 내부는 터널처럼 제법 길어 보였다. 한 발 한 발 움직여서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으로 움푹 패인 곳이 있어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멍석 같은 자리가 깔려있고 벽에 붙은 납작한 돌 위에는 불을 켠 흔적인 양 여러 개의 양초가 꽂혀 있었다. 받침돌은 아예 촛농을 뒤집어쓰고 있어 거대한 초 무덤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옆에는 제법 큼직한 입상 하나가 벽을 의지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불상인지, 보살상인지 분별이 안 됐다. 미륵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발밑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멍석 위에는 바리때가 하나 얹혀있을 뿐이었다. 생식을 한 흔적인 듯 바리때 안에는 솔잎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하얀 가루가 버무려져 있었다. 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먹을거리인 듯했다. 어쩌면 산이나 들에 흩어져 있는 각종 과일이며 열매들이라도 있을법한데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굴 입구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는 산발을 하고 누더기를 걸친 한 사내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 왔다. 정진은 긴장한 탓에 전신이 뻣뻣해져 꼼짝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
정진은 몸이 굳어진 듯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괜찮소. 원래 주인 없는 곳인데, 누구에게 허락 받고 말고 할거나 있겠소?"
그가 정진을 안심시키려고 한 말처럼 들렸다. 정진이 산을 내려갔다가 되오른 것이며 굴로 들어오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은 듯 했다. 정진은 몰래하던 일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사람처럼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도망갈 곳도 없는 굴속에서 사나운 짐승을 만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에서 마음은 조금 놓였다. 그러면서 그가 이 고장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순간 그는 정진이 서 있는 옆을 지나쳐 멍석을 가로질러 양초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 촛불을 켜고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허리를 굽혀 합장을 세 번이나 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하고 몸을 앞으로, 옆으로 몇 번 움직여 보고는 이내 중심을 잡기라도 한 듯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곧추세운 자세며 앉은 폼이 큰스님들의 참선하는 자세 그대로였다. 그를 만나고자 찾아온 것이었지만 막상 그를 대면하고 나서 정진은 몸이 얼어붙어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조차 모른 채 어벙한 상태로 그가 하는 짓을 지켜보며 마냥 서 있을 뿐이었다.
"좀 앉으시오."
좀체 자세를 풀 것 같지 않던 그가 정진을 향해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내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예에. 매향비를 찾아왔다가 매향비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듣고 염치불구 찾아왔습니다."
"내가 무슨……."
"매향비에 대해 좀 듣고 싶습니다. 그전에 어떻게 불러야 할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시오. 내겐 이름이 없으니……."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 뭐 있겠소. 텅 빈 공간에 떠돌다가 가는 것인데. 이름인들 뭔 필요가 있겠소?"
그는 말을 많이 아끼는 듯했다. 정진은 순간 유명한 스님들은 자기의 법명이나 법호를 직접 말하는 법 없이 뜻풀이로 한다는 생각을 언뜻 떠올렸다.
"혹시……."
"무슨 생각을 하시오. 수행자들이나 법명이 있는 것이지 나는 수행자가 아니오. 그래서 이름이 없소."
그는 정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단호하게 수행자가 아니기에 이름이 없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나 정진이 보기에 수행자가 아니라고 한 말은 아무래도 거짓으로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는 치렁치렁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정진을 뒤로하고 돌아앉아 말문을 닫았다. 정진은 예상대로 그의 이야기를 듣기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진은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기에 조급히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배에서는 꼬르륵, 물 흘러가는 소리가 났다. 그도 신경이 쓰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정진이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얼른 떡 하나 주어 보낼 심사로 앉은 자세 그대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시고 있던 큰스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라는 것을 강조했다.
1년 전부터 매향을 한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매향처로 정해진 고을에 전해지자 삽시간에 인근 마을까지 번져나갔다. 양반들은 정권 교체기의 불안으로, 힘없고 믿을 곳 없는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매향의식을 통해서나마 태평성대가 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문달사에서는 매향의식에 쓰일 향나무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절간의 대중스님들이 다 동원돼 향나무를 다듬고 참여자들의 소원을 글씨로 새겨 넣기도 했다. 그 모습은 어떤 결사를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비밀리에 진행됐다. 해가 바뀌고 달이 바뀌어 정묘년 8월 28일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문달사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극성스러운 사람들은 전날부터 문달사에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다. 고불법회를 시작하기로 했던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름과 소원을 새긴 향나무를 하나씩 들고 법당 앞뜰로 모여들었다. 농익은 가을 햇살이 기울면서 서쪽 하늘을 물들였다. 그때 스님들이 가사장삼을 하고 법당으로 줄지어 들어섰다. 한참 후 고불법회의 시작을 알리는, 법상에 앉은 스님의 주장자가 한번 위로 번쩍 치켜들려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리꽂히자 모든 대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들고 있던 향나무를 두 손으로 맞잡고 합장을 한 채 법회에 동참했다. 고불법회가 모두 끝나고 스님들이 법당을 나와서 앞장을 서자 대중들도 일렬로 줄지어 뒤를 따랐다. 매향처로 이동하기 위한 것이다. 길옆으로 널려있던 왕고들빼기, 쑥부쟁이, 뱀딸기 꽃들이 으스름 달빛에 고개를 숙이고 긴 행렬을 맞았다. 매향처에 도달한 대중들은 동토가 소멸되고 팔부신장이 옹호하기를 염원하며 천지팔양신주경 등을 독송하는 간단한 의식을 치른 뒤 순서대로 저마다 소원을 빌며 가슴 앞에 들고 있던 향나무 조각들을 물속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향나무가 침향이 되어 떠오르는 날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해 태평성대가 오기를 갈구하는 염원을 담아 가슴팍에는 믿음을 새기며 땅에는 희망을 묻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대로 행하는 의식인지라 밤을 지새우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매향처에서 동네어귀까지는 꽤 먼 길이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가 가장 늦게 향나무 한 조각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은 둘레네가 막 집에 도착해 방문을 열려는데 옷깃이 발에 밟히기라도 한 듯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둘레네는 잡아당기는 어떤 힘에 이끌려 몸을 움찔하면서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에 여지없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옆으로 넘어진 둘레네 몸 밑에는 사람의 다리 하나가 깔려있었다. 둘레네를 낚아채려던 자가 뒤로 나자빠지면서 뻗은 다리였다. 너무 어둡고 갑작스런 놀라움에 당황한 둘레네가 덴겁하게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다리를 먼저 빼낸 사내가 벌떡 일어나 둘레네 머리에 보자기를 씌워서는 업고 뛰기 시작했다. 그날 일로 둘레네는 뒤에 아들을 하나 낳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태어난 아들도 훗날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았다. 둘레네 증손자는 훗날 출가를 했다. 출가사문이 된 증손자가 성인이 됐을 때 그를 돌봤던 절의 스님은 모진 굴레를 벗고 새 인연을 만들라면서, 출생의 비밀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악연이 끝났다고도 덧붙였다. 임종을 앞두고 있던 스님의 마지막 말이었다. 증손자는 스님의 열반을 갈무리하고 그 길로 절을 떠났다.
혜준이라는 법명을 가진 그 스님이 처음 찾아간 곳은 도반 혜진 스님이 주지로 있던 혜진사였다. 혜준 스님은 그곳에서 며칠을 머무르다가 도반의 동의를 어렵게 얻어 무문관 수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토굴을 짓기 시작했다. 직접 땅을 파내고 벽돌을 만들어 움막을 지었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마음은 물론 몸까지 가둘 공간이 필요했기에 일을 서둘렀다. 문이 없는 움막을 지은 것이다. 누에가 고치를 짓듯이 자기의 몸을 가둘 움막 속으로 들어간 뒤 밖에서 문을 막아버리게 하는 것이다. 1주일에 한번 정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먹을거리가 들락거릴 개구멍만 뚫어놓으면 그만이었다. 그 일은 혜진 스님의 몫이다. 그래서 무문관 수행은 돌봐주는 이 없이는 할 수도 없다.
무문관 속에 들어가면 그날로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게 된다. 혜준 스님은 움막 속에 몸과 마음을 가두고 절대고독의 참선수행에 들어갔다. 10년이고 20년이고 깨달음을 구하기 전에는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죽음을 각오한 수행이었다. 외부와는 철저하게 차단된 세계, 그 속에서 혜준 스님은 화두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할 일이었다. 처음 한동안 앉아서 참선을 하다가, 운동 삼아 방안을 빙빙 돌기도 했다. 하루 한 시간 남짓 잠을 자면서 자신을 비워내는 일에 철두철미했다. 그러다가 공부보다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먼저 자라났다. 이윽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사다리를 타고 천장에 뚫려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서 지붕에 걸터앉아 손수 가위질을 했다. 두어 달 만에 한번 정도는 이렇게 해바라기를 해주어야 했다. 때로는 극심한 고독감과 외로움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지만 그때마다 무문관에 들어갈 때의 초심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이미 죽은 목숨인 걸, 하는 생각 끝에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감사의 마음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면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화두를 붙잡고 수행의 고삐를 다잡을 수 있었던것이다. 그렇게 하기까지 스스로도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이 얼마나 더 지독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다가 가무러지기도 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화두를 들고 있다가 사위가 환해지면서 천장에 원광이 그려지는 것을 보았다. 혜준 스님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 참구해 들어갔다. 몸이 위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좌우로 흔들리며 감옥처럼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흙담이 스르르 무너졌다. 무너진 무문관 뒤로 넓은 초원이 드러났다. 그곳에 자신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는 금당처럼 보이는 암자도 있었다. 혜준 스님은 그때 시원(始原)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움막을 부수고 나왔다. 솔잎은 다시 솔잎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혜준 스님은 이 말을 생각하며 자신의 시원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나갔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정진은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거니와 여전히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그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가해자의 입장이건, 피해자의 입장이건 어떻게든 연관돼 있는 이야기 같아서였다.
"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나와는 상관없는 옛날이야기라오. 엉뚱한 생각하면 안되오."
정진은 또 한번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몰라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제 가보시오. 나도 할 일이 있으니까……."
정진이 주변을 살피며 일어서서 합장으로 예를 갖추고 그의 뒤를 돌아 굴 밖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굴을 막 벗어나려는 찰나 그의 말이 들려왔다.
"그 잘난 분별심을 놓아버리게. 분별조작 하나 없이 자연 이치 그대로 이뤄지는 것이 법이라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이뤄지니 인연 없으면 모든 법도 없는 것이라네."
정진이 듣기에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을 보고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처럼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엄청난 비밀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몸까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정진은 멈칫하다가 굴을 벗어나면서, 먼발치께 숨어서 그를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진은 잰걸음으로 몸을 움직여 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바위 뒤 수풀에 몸을 숨겼다. 머릿속에서는 '분별심이 어떻고, 자연이치니 법이 어떻고, 인연이 어쩌고저쩌고……' 했던 그의 알 수 없는 말을 되뇌어보았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가 없을 듯해 씁쓸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때 그가 굴을 나와 정진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정진은 가슴을 졸이며 그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수없이 해보았던 짓이라 제대로 자세가 나왔다. 그는 점점 더 정진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정진이 숨어있는 바로 그 바위 위에 올라서서 사방을 휘둘러보고는 가부좌로 걸터앉는 것이었다. 정진은 숨조차 크게 쉬지를 못하고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내게 더 들을 말이라도 있소?"
정진은 또 일격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겸연쩍은 낯빛을 드러낸 채 몸을 일으켰다. 산을 떠나지 않는 한 손바닥 안의 일처럼 들여다보고 있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참을 있다가 사람이 사람 말을 이해 못하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어서 산이나 내려가라는 투로 손짓을 했다. 정진은 그의 손짓을 못 본 채 눈길도 외면하며 그 자리에 서서 버티기로 작정했다. 발가벗긴 느낌이었다. 분별심, 자연이치, 법, 인연……. 다시 머릿속에 알아듣지 못할 그 단어들을 떠올리는 순간 번쩍하고 스치는 한 생각이 있었다. 극한 순간에 발휘된다는, 생각지도 않았던 초능력이나 순발력 같은 것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이뤄진다. 인연 없으면 모든 법도 없다'고 한 그의 말이 또렷하게 살아서 꿈틀대는 것 같으면서 이해가 될 듯했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저이를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나는 여기에 왜 왔는가? 그것도 내 의지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저이와 나의 인연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됐을까? 새로운 의문도 들었다. 비단 이곳에서 보고 들었던 일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눈앞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도 내 인연 때문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있었기 때문에 내 눈앞에 보였던 모든 현상도 있었다는 말이 된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명경대 앞에 선 기분이 이런 것일까? 절대자 앞에서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주절주절 주워섬기는 정직한 심복이 된 심정이기도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사이비단체들이 하는 활동이나, 그것을 르포하겠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돌아다니면서 했던 행동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 땅에 없었다면 사이비단체들의 극성은 없었을까? 그것은 아니겠지만, 내 눈앞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으리라. ??트릭아트??를 보는 듯한 이러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산을 내려온 정진은 길 위에 서서 산을 올려다보았다. 지는 햇살을 받아 금빛 조각이 팔락이는 것처럼 나뭇잎들이 뿜어내는 빛으로 산은 성자를 품고 있는 금당인 듯했다. 세상의 온갖 번뇌를 다 여읜 극락정토. 6백여 년 전 매향의식을 행하던 대중들이 염원했던 미륵의 용화세계가 이런 곳은 아니었을까? 정진은 순간 보로부두르를 떠올렸다.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조크자카르타 북방, 거대한 화산으로 둘러싸인 쿠두평원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불교사원이다. 건립자와 건립시기 등이 베일에 가려 있어 더 신비롭게 여겨지는 세기의 걸작이 아니던가. 지금 그가 앉아있는 산 전체가 온갖 부조와 불상, 각종 장엄물로 장식돼 있는 한국의 보로부두르처럼 여겨졌다. 세속과 성역의 경계, 그가 있는 그 산은 결코 빈산이 아닌 듯 보였다.
"한 등불이 백천 등불 이어 가노니/심인을 통해 보라, 법이 서거니/천성도 전치 못해 멸하지 않느니/휘황찬란하여라, 모습 분명하네."
중국 송나라 예장 종경 스님의 불멸송을 곱씹으며 정진은 침향과 같은 그의 말을 가슴에 묻었다. 제2의 침향을 기다리며…….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2년 · 상반기 제6호
정유제
경북 성주 출생. 2010년 『시에』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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