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방담(放談) / 민명자
친구들 몇 명과 변두리의 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아직 비정규직에서 일을 하는 Y, 지하셋방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게 꿈이라는 H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이 시대의 미생이라 여기는 그녀들은 완생을 꿈꿉니다. 우린 그날 마치 래퍼처럼, 큰 소리로 혹은 낮은 소리로 많은 말들을 엎치락뒤치락 쏟아냈습니다. 자칭 미생의 무릎들이 주로 무릎에 대해 무릎을 맞대고 늘어놓은, 무릎을 위한 무릎 방담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말을 추려보면 이렇습니다.
얼마 전에 거북이가 알 낳는 장면을 티브이에서 우연히 봤어. 나는 거북이가 백사장 아무데나 알을 낳는 줄 알았어. 그런데 파도에 알이 휩쓸리지 않게 잘 부화할만한 곳을 찾으려고 며칠 동안을 헤매 다니더라. 결국 마땅한 자리를 찾더니 구덩이를 파고 알을 낳기 시작하데. 얼굴에 모래를 잔뜩 묻힌 채 끈적끈적하고 투명한 액체가 묻은 알을 구덩이에 뚝뚝 떨어뜨릴 때마다 큰 숨을 몰아쉬는데 꼭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알을 낳고는 뒷발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그 구덩이를 덮는 거야. 두 달이 지나면 알에서 깨어난 거북이가 바다로 돌아간대. 작은 생명 하나 태어나기가 저렇게 힘들구나 생각하니 눈물겹더라.
한낱 미물도 그런데 사람 생명이야 더 말할 게 있겠어? 하고많은 동물 중에 사람으로 태어난 건 큰 행운이야. 사람은 창공 저 너머 세계를 상상하고 이상을 꿈꿀 수 있잖아. 맹귀우목盲龜遇木이란 말이 생각나. 눈 먼 거북이가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제 머리를 내밀고 쉴 만한 구멍이 뚫린 나무판자를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100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데, 그런 인연이 있어야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대. 우담바라 꽃은 3000년에 한 번 피어나고, 선녀가 잠자리 날개 같은 치맛자락으로 바위를 쓸어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려면 억겁의 시간이 걸린다는데, 그런 것 만큼이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고귀하다는 거야.
그렇게 귀한 존잰데 누가 누구 무릎을 함부로 꿇려. 작년엔 무릎 얘기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는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게 많아 땅콩 회항인가 뭔가. 그건 듣도 보도 못했던 희비극이야. 그때 수모를 당한 스튜어디스가 요즘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했다며? 그쪽에선 배심원들이 평결을 해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유리하고 배상금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대.
나는 사무장 생각만 한면 가슴이 아려. 앞으로 그 직장에서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버터낼 수 있겠어? 만일 남편이나 자식이 젊은 상사 앞에서 무릎 꿇는 걸 보면 밥숟가락 들 때마다 눈물 밥을 삼킬 것 같아. 사람이 밥을 먹고 산다는 건 숭고하지만 밥을 먹기 위해 비루함을 견뎌야 한다는 건 슬픈 일이야.
사무장뿐이겠어? 국회의원 때문에 대리기사가 폭행을 당하질 않나, 병원 수술실에서 의사가 간호사 무릎을 발로 차질 않나. 무릎보다 발의 권력이 더 셌던 거야. 또 어떤 백화점에선 고객이 알바생 무릎을 꿇렸다지? 잘잘못이 누구한테 있든 간에 난 그 학생이 했다는 말이 안 잊혀져. 무릎을 꿇는 순간 대학교 등록금이 먼저 떠올라서 두려웠대, 그 말 들으면서 내가 등록금 때문에 대학중퇴한 일이 생각나서 울컥했어.
가난한 청춘들은 이래저래 힘들어. 그런데 요즘 삼포세대 젊은이들은 우리 젊었을 때보다 더 고달픈 것 같아. 젊음의 낭만은커녕 연애, 결혼, 출산까지 포기해야 하는 데다가 열정페이까지 견뎌야 하니 얼마나 막막하겠어. 청년실신이나 을사조약이란 유행어만 봐도 그렇고.
요즘엔 오포세대가 대세야. 삼포는 물론이고 인간관계랑 주택구입까지 포기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는 거야. 오죽하면 청년실신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나겠어. 청년실업자나 신용불량자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겠지. 그런데 을사조약은 또 뭐야? 일본이 우리한테 저지른 불평등조약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갑을관계를 빗댄, 죽을 사짜 을사乙死조약이래. 을을 죽이는 거나 다름없는, 일방적으로 을에게 불리한 갑질 계약을 비꼰 거야. 그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려면 비정규직이든 시간 당 몇 천 원짜리 알바든 감수하고 젊음의 열정으로 참고 견디라는 게 열정페이고. 어찌됐건 무릎수난의 시대야. 힘없는 무릎들 얘기 듣다보면 무기력해져.
그동안 귀감이 될 만한 갑들도 없진 않았어. 간송 전형필 선생은 우리정신이 담긴 문화재를 지키려고 사재를 털면서 열정을 바쳤고, 유일한 박사는 기업인으로 도덕성을 실천하면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잖아. 그 후손들도 그 뜻을 잘 받들고 살아. 경주 최부자 집 덕망이야 말할 것도 없고, 숨은 덕을 베푼 갑들도 많았어. 그런 분들이 많을수록 세상이 훈훈해지는데 요즘엔 인성이 피폐한 사람들이 많아져서 걱정이야. 남자든 여자든 가릴 거 없이 을남을녀 무릎을 꿇리니 원…. 내 남편도 직장에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순간 무릎을 꿇었을까 생각하면 밤에 곤하게 자는 모습 보면서 측은할 때가 많아.
사람은 직립보행을 하고 말을 하면서 우월한 존재가 되는 첫걸음을 내디뎌.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 처음부터 꼿꼿하게 설 수 있었나. 누구든 두 다리 버둥대면서 울기부터 했지. 그러다가 뒤집고, 두 손 두 팔을 지지대 삼아 기기 시작할 때 무릎의 공이라는 게 참으로 지대해. 굽혔다 펴고, 폈다가 굽히는, 그 굴신屈伸의 유연성 덕분에 무릎 역할이 빛나지. 제아무리 날 때부터 금수저 은수저 물고 나온 갑이라 한들 적당한 각도로 움직여주는 굴신이 없으면 기거나 걷거나 뛸 수 있겠어?
어린 시절 굴신은 그런대로 행복해. 나는 슬하膝下라는 말이 참 좋아. 부모님 무릎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 부모님 보살핌 받으면서 뒤뚱뒤뚱 걸음마 배우는 시절엔 박수 받으면서 왕자님이나 공주님이 될 수 있거든. 그런데 차츰 그 슬하에서 멀어지고 바깥세상으로 나가게 되면서 굴신은 비굴과도 통한다는 걸 배우기 시작해. 그때부터 슬픔이란 감정과도 친해지는 거지. 어른이 되면서 고독이나 허무라는 단어와도 만나게 되는 거고.
나무에는 무릎이 없어. 그 수직성이 부러울 때도 있어. 그런데 생각해보면 뿌리들은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처절하게 기어야 돼. 그렇게 나이테를 만들면서 살아가는 거겠지. 속이 빈 대나무의 마디는 대나무의 무릎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가끔 있어. 비바람 몰아칠 때마다 버텨낸 흔적 같아보여서…. 덩굴식물로 태어나면 온몸으로 기어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 기거나 굽히는 건 살아 있는 것들 숙명이지만, 그래도 자연은 너나없이 서로 돕고 어울리면서 살아가.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는 바람이나 햇빛, 땅이나 물 도움 없이는 나무도 홀로 서지 못해.
을도 어떤 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을한테 갑질 할 때가 있어. 하긴 나부터도 조심해야 돼. 그나저나 무릎은 스스로 꿇을 때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신을 경배하거나 조상을 섬길 때, 부모님이나 존경하는 스승 앞에서처럼, 중요한 건 진정성이나 자발적 의지가 아닐까싶어.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갑을관계는 먹이사슬 따라 중중첩첩이야. 그런데 공평한 게 하나 있긴 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죽어서 염습 자리에 누우면 염포에 묶여 모두 무릎을 반듯하게 펴는 거야. 노상 무릎 꿇고 살던 을남을녀도 그땐 한번 기를 쫘-악 펴는 거지. 그때서야 세상 근심 걱정 다 놓고 자유인이 되는 거야.
그날, 카페 벽에 걸린 그림에선 오글보글한 머리를 한 양 몇 마리가 선한 웃음을 짓고, 실내엔 '봄의 소리 왈츠'가 세상의 봄을 고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마치 미장센이 잘 배치된 연극무대 같았습니다. 하긴 우리 사는 세상이 연극보다 더 연극 같을 때가 많으니까요.
그날, 우리는 '인간 존엄, 평등, 조화, 배려'와 같은 소망의 언어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중언부언 남발한 단어들은 허공을 떠돌다가 한낱 허무한 추상명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어쩌면 그 단어들은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에 짓밟혀 '아파, 아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갈지도 모릅니다. 달력은 이미 2014 갑오의 언덕을 훌쩍 넘어 2015 을미의 길을 가고 있건만 대한민국의 시계는 여전히 갑을시 병정동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우리들의 방담은 그렇게 끝이 났고, 일행들은 카페 한쪽에 달려있는 작은 마당엘 나가보자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마당에 다문다문 놓여있는 디딤돌 틈바구니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낸 풀 몇 포기가 여린 고개를 삐죽삐죽 내밀고, 그 틈에서 납작하게 땅에 엎드린 제비꽃이 연보랏빛 꽃 한 송이를 힘겹게 올리고 있었습니다. 오, 작은 생명들. 용케도 잘 살아났구나, 나는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 그들을 들여다보며 생명의 찬가에 귀를 기울여보았습니다. 그대들에게는 무릎을 꿇어도 좋으리. 그대들은 무릎을 어디에 숨기고 있는가. 문득 쪼그린 내 무릎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무릎은 내 생을 기억하리라.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아보았습니다.
'못난 주인 만나 고생 많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힘든 세월 잘 견뎌 왔구나.' *
첫댓글 청년취업의 어려움은 동정이 가지만
실은 공장등의 취업은 조선족과 해외인력의 독차지입니다.
결론은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85프로고 대졸자가 그런 취업을 꺼려서 생기는 뮨제이기도 하죠.
몸으로도 하는
노동의 현장
땀 흘리는 문화
존중받는 사회
선진국의 기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