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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한 라오디게아교회(계 3:14-22)
교회를 다니는 네 명의 청년이 어느 날 야고보서를 공부하다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라는 말씀을 보고, 이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약점을 서로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한 청년이 "나는 교회를 나오기는 하지만 아직도 주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자, 두번째 청년이 "나는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성적인 면에서 밤낮 넘어집니다"라고 했습니다.
세번째 청년은 "나는 아직도 도벽을 못 버리고 있습니다. 사실은 교회에 나오면서도 몇 번씩 슬쩍 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네번째 청년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동료들이 고백하라고 재촉을 하니까 고민하다가 "나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다 불고 다니는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각 공동체도 그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도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가 칭찬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칭찬받을 요소가 하나도 없는 그런 교회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 살펴볼 소아시아의 7개교회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조차도 약간의 칭찬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투성이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많은 학자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야말로 말세교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정치적으로도 핍박을 받지 않았고, 이단 사상이 침투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한 일도 없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부유한 도시였기에 교회도 부유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성공한 교회요,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처럼 가난한 모습도 아니었고(계2:9),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작은 교회도 아니었습니다(계3:8). 그러므로 이 교회은 큰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교회, 영적감각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런 교회를 향해 토하여 내치겠다고 거부감을 표시하고 계십니다(16절). 큰교회였지만 주님이 토해내고 싶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저들이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축복을 많이 받은 좋은 교회라는 착각속에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1.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
본문 14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은 아멘이시요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멘은 헬라어로 '진실로'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거짓된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진실하지 못한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주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느 정도 충성하셨고, 증인으로 사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죽기까지 충성한 참된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적당하게 타협하고 철저하게 자기위주로 신앙생활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와는 너무 대조되고 있습니다. 또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곧 주님이 창조자라는 말씀입니다.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데 라오디게아교회는 자신들의 노력으로 쟁취한 내 것으로 알고 주님께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진단
첫째로, 이들은 차지도 더웁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15,16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교회의 어마어마한 부는 성도들에게 거짓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일도 참 많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 만족에 빠져있는 오만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저들의 그런 모습을 다 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미지근하다는 것은 영적으로 말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안지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는 것같은 데 어떻게 보면 안믿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거룩한 것입니다. 구별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준이 분명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교회안에 앉어 있습니다. 사데교회처럼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자와 같습니다. 무언가 아는 것같이 큰 소리를 치지만 정작 그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토하여 버리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식생활 풍습과 지리적 요건들을 이해하면 이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동지역의 식생활 풍습에서는 뜨거운 물을 먹든지, 차가운 물을 먹든지 했고 결코 미지근한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북쪽 10㎞ 정도에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는 섭씨 90도나 되는 뜨거운 온천이 나왔습니다.
이 물이 라오디게아까지 10km의 수로를 통해서 흘러 내려오면서 식어서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라오디게아 동쪽에는 8천피트나 되는 높은 산이 있는데 그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은 얼마나 차가운지 여름철에도 손이 시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에서 이 두 물이 만나면 뜨뜻미지근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뜨겁다는 것은 종교적인 열심, 신앙적인 열심을 말합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갈증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려움을 만나고 힘든 일을 만나면 기도해야겠다는 영적 갈증이 생깁니다. 아니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내 힘대로 사는 것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싶은 갈망, 기도하고 싶은 갈망이 생깁니다.
또 믿지 않는 자를 보면 전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교회당을 찾아와 기도하고 싶은 갈망이 생깁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차갑다는 것은 감정이 메말러서 마음이 감동이 없습니다. 그래서 냉정하게 세상으로 향하고 거절하고 대적하고 자기 길로 가버립니다. 그런데 지금 상태는 무엇입니까? 라오디게아교회 상태는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토하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역겨운 신앙은 주님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상태의 신앙에 대한 질책입니다. 성도로서 오랜 연륜도 있고 직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감동이 없습니다.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종교적 의무감으로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 사람은 회개가 없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편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도 없고, 울며 기도하는 회개의 모습도 없고, 모이기는 모이는데 마치 극장처럼 예배를 보러왔다가 흩어지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코로나라는 재앙이 온 세상을 뒤집어 엎어도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지식적으로만 코로나가 어떻게, 백신과 치료제는 어떻고 하는데,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일에 바뻐서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습니다. 마치 요즘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에스겔처럼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은 없는가에 관심을 쓸 뿐입니다.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그러했습니다. 도무지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교회, 차지도 더웁지도 않았던 교인들, 아무리 하나님의 징계가 와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힘만 의지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교회가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둘째로, 이들은 자만심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 당시에 라오디게아에는 상류 계급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 라오디게아는 문자 그대로 부요했던 도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도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출석했던 부자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물질적으로 풍요한 교회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됐지'하는 현상 유지식의 사고 방식으론 영적인 생명력을 발휘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발전하고 있는데 신앙생활은 적당히 현상유지하는 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면 그 교회는 이미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서울 강남의 어느 교회를 가보니 참 잘 꾸며 놓았습니다. 그 교회는 소위 상류 계층의 사람들로 꽉 차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중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는 이제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딱 좋습니다. 분위기도 좋고 우리들의 교제도 좋고 가질 것도 가졌고 더 많이 나와야 귀찮기만 합니다. 우리끼리 교제하는 것으로 너무나 좋습니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정신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만하면 가질 것은 가졌다고 하는 자만심에 취했던 라오디게아 교회, 그러나 그 순간부터 그 교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이 가지고 있는 권력과 돈과 명예, 쾌락에 빠져 하나님을 찾지 않는 교회였음을 본문에서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시대를 향한, 우리 교회를 향한 경고를 읽어야 합니다.
셋째로, 이들은 자기 성찰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찰이 없었기 때문에 자만심에 빠졌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옛날부터 세 가지 큰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첫번째가 은행인데, 그 당시 소아시아의 모든 도시들 중에서 가장 금은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은행들이 라오디게아에 소재했다고 합니다. A.D. 60년에 소아시아 일대에 지진이 일어나서 라오디게아 교회도 굉장히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그때 라오디게아 주민들은 로마 황제의 원조를 거절할 만큼 부유했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병원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안과와 안약이 널리 알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목초지를 갖고 있어서 많은 양모를 산출하는 것으로도 이름이 났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양모공장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황금을 보유한 은행과 안약으로 유명했고 양모산지가 있어서 의류 제조로 널리 알려졌던 이 도시를 향해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17,18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 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진정한 부요는 물질적인 부요 이상의 것입니다. 또한 이 도시는 안약으로 유명했고 눈밝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그들이 눈먼 상태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밍크 옷을 입었을지 모르지만 주께서는 그들에게 벌거벗었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얼마나 현장 감각을 갖고 말씀하셨는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라오디게아에 나타나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너는 가난하고 너는 눈멀었고 너는 벌거벗었도다. 하나님앞에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자이고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자이며, 영적으로 벌거벗어서 부끄러운 상태에 놓인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만하면 됐다고 착각하고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진단입니다.
자기 성찰이 없이는, 병들고 죽어 가면서도 내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모를 수가 있습니다. 암에 걸린 환자가 자기는 건장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환자는 조기 진단해서 빨리 병을 발견해야만 치료할 수 있습니다. 싫어도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 추한 모습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아프고 어려운 과정이지만 그 과정이 없이는 우리의 건강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가를 살피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건전한 비판의 기능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주님 앞에서 어떻게 새로워져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
첫째로, 네 자신을 진단하고 치유하라.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당연히 연단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요즘 자주 인용하는 로마서 5:3,4절,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야고보사도는 여러 가지 시험을 믿음의 시련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코로나,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믿음의 시련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그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단련하고 있습니까? 연단은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온갖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금과 같은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불로 연단한 순금과 같은 믿음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후에 온전한 믿음, 순금과 같은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흰 옷을 사서 입음으로써 벌거벗은 것을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흰 옷은 주님의 성결의 옷, 의의 옷을 가리킵니다. 또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보고 욥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영광의 주님을 보고 또 나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앞에서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치료받는 구원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도 마지막 말씀이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정확하고 정직한 자기 진단을 통해서 정말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둘째로, 열심을 내라.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아직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책망투성이의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교회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을 가지고 "내가 너를 사랑하여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열심을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열심을 내야 하나님께서 쓰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일 쓸모가 없는 사람은 열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열심이 없는 사람을 주님이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기 원하고, 열심히 순종하기를 원하고, 열심히 섬기기를 원해야 주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시며 그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부터 실시할 다니엘기도회도 열심히 없으면 참석하지 못합니다. 열심은 다른 말로 충성입니다.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할 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열심을 낼 때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달란트비유에서 한달란트 받은 사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달란트가 작은 것이 문제였습니까? 아닙니다.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을 다했던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처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달란트가 얼마이든 그것을 충성을 다해서 갑절을 남기는 충성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첫째로, 주님과의 교제를 약속했습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주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문밖에 계십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찾아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 요즘 에스겔을 묵상하고 있으니까 그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그 말씀을 듣는 자는 듣고 문을 열면 됩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저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주님이 통치하기 시작하면 그것에 하나님나라가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고 나는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진정한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안에 있고 주님이 내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기도의 능답이 나타나고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옛날 중동에서 왕의 보좌 옆에는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를 앉히는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앉는 신하는 생애 최고의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보다 더 놀라운 약속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개교회에 보내어진 편지를 우리가 다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내어진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문제가 많아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아직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음성을 듣고 마음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연합하여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인되어 우리를 다스리실 때 거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참모습을 진단하고 하나님앞에 나아와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열심을 내어서 주님을 위해서 충성할 때 주님의 기적이 일어나서 여러분의 삶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에 열정을 가진 교회,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체험하며 우리 교회 올해 표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누리고 증거하는 성도,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크게 확장하는 일에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