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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씨가 1982년에 발표한 “솔개”의 가사를 보면,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 날으는 솔개처럼 / 소리없이 날아가는 하늘 속에 / 마음은 가득차고 / 푸른 하늘높이 구름 속에 살아와 /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 지쳐버린 나의 부리여”라고 합니다. 사람은 하루종일 아무 말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의 대화가 아니면, 동물이나 사물 또는, 홀로 독백을 통해서든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혼자서 살지 않고, 그 무엇과 둘 이상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대화는, 일방적으로 한 쪽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한만큼 듣고, 들은 만큼 말을 하는 것, 이것이 대화의 기본입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그 무엇과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독백을 통한 내 자신과의 대화라도 나눌 수 없다면,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우울증에 빠지게 되어, 몸도 마음도 병들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때로는 지치면서까지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계들이 우리를 즐겁게 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영혼까지도 즐겁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수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시작에서 소개한 솔개의 가사에서,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 지쳐버린 나의 부리여”라고 하는 것처럼, 때로는 우리의 입이 아플 정도로도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모세, 다윗 그리고, 수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은 이러한 대화를 수없이 하였습니다. 죠지 뮬러는 50,000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50,000번의 기도응답을 받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받기 위해 얼마나 기도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기도했을까요? 우리는 삶 속에서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과 대화하는 만큼,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까? 삶 속에서 문제가 있을 때만 반짝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릴 때, 그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데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합니까? 본문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의 인생은 참으로 굴곡이 심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지만, 왕으로서 궁에서 편하게 호화호식하며 지낸 것이 얼마나 됩니까? 그의 인생에서 약 2/3는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다니며 살았고, 또, 전쟁 속에서 살았습니다. 왕이 되어 궁에 있을 때는,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시 도망자의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상 위대한 성군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부리가 지칠 정도로 하나님을 불렀고, 하나님과 대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삶은, 평안보다 위험과 위기가 훨씬 많았던 삶이었고, 끝도 없는 갈등과 위기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심사를 헤아리십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을 알기에, 본문의 시작에서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 주시기를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다윗은 또한, 이 때 뿐 아니라, 기쁠 때는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시 108: 1을 보시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기쁠 때나 힘들 때나 고통스러울 때나 언제나 그는 하나님을 향해 그의 입을 다물지 않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 때도 없이 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도 본문의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대화를 했다가는 역효과가 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시도 때도 없이 대화를 해도 다 받아 주시고, 응답하시며,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도 때도 없이, 홀로 있는 곳에서는 소리내어서, 공공의 장소에서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과 끝없는 대화를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 우리를 위해 일을 만드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삶 속에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 - 3절을 보시면,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 앞의 1절을 보시면, 우리는 다윗이 처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윗에게 무엇인가 안타깝고 나름대로 억울한 사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가 처한 상황과 다윗의 호소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 속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밤을 새워 아침까지 기도합니다. 아무도 다윗의 억울함과 속상함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억울함과 속상함을 아룁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데, 아무도 내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싶고, 사람들을 보고 싶지도 않은데, 그렇지만 그러한 속상함과 안타까움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호소하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 속상함을 듣고, 풀어주십니다. 본문은, 다윗이 이러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나의 왕이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의 창조주요, 주재자이십니다. 그분은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나의 창조자시요, 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그분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백성입니다. 그분은 나와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하시고, 맹세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나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의 형편을 하소연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흐느껴 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어 우는 소리를 귀 기울여 다 들으시고, 그 의미를 아십니다. 다윗은 본문 3절에서,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합니다. 다윗은 아침에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도를 아침에만 들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밤새도록 지켜주셔서 감사하고, 또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대화의 문을 열어,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큰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독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독백이라며 조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다윗이나 모세, 아브라함, 선지자, 사도들, 그리고, 죠지 뮬러를 보면, 하나님과의 대화는 독백이 아님이 증명됩니다. 이것은,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와의 대화나 영국의 국왕인 찰스 3세와의 대화보다 더 영광스러운 대화입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이 아플 정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내내, 하나님과 늘 대화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 - 8절을 보시면,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성도의 대적들은, 성도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본문 7절의 시작을 보시면, “오직 나는”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다윗은 지금,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자기만큼은,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었기에,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님과 각별하다는 겁니다.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구약학 교수인 “버나드 앤더슨”은, 본문 7절의 끝부분인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를 원어 그대로 해석하여, “나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엎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성도는, 하나님 앞에 그대로 완전하게 엎드릴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기에, 전쟁 중에서도 또는, 그를 추적하는 자들로부터 추격을 당할 때도 어느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과의 대화를 미루거나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어, 본문 8절을 보시면,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를 쉬운 성경역으로 보시면, “여호와여, 내 주위에 적들이 많으니 주의 의로운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의 곧은 길을 보여 주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 주변에 대적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에게 이러한 믿음,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만일, 연약한 우리와 같았다면, 그는 좌절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 의심했을 겁니다. 성도된 우리의 대적 곧 악인들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에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지 않고 그 일부를 남겨두셨습니다. 가나안 족속의 일부가 살아남은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그 큰 원인이 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의 일부를 남겨두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그들이 그릇된 길로 갈 때, 그들을 징계하기 위한 도구로 삼아 이스라엘로 하여금,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길로 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이 그 숱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지 않고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도 본문의 다윗과 같이, 우리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황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과의 대화를 멈추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1 - 12절을 보시면,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본문 앞의 1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자신의 탄식을 헤아려 달라고 간청하던 다윗이었지만, 이제는 기뻐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욱이, 본문 11절을 바른 성경역으로 보시면, “그러나 주께 피하는 사람들은 다 기뻐하며, 주님의 보호로 인하여 영원토록 즐거이 외치며,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즐거워할 것입니다”라고 하며, 현대어 성경역으로 보시면, “주께 몸 피하는 이마다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노랫소리 항상 끊이지 않게 하소서. 주님 받들어 섬기는 이, 주님만 생각해도 가슴 벅차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를 보면, 다윗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이, 점차적으로 점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뻐하다”이지만, 다음에서는 “외치다”로 기쁨이 한층 고조됩니다. 그리고는, “즐거워하다”로 기쁨이 온 몸에서 흘러나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모셔올 때,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백성들 앞에서 기쁨으로 춤을 춘 것처럼, 온 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기쁨이 그에게서 나왔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픔을 살피셨고,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대적들과 환경 속에서,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성도입니다. 그랬기에, 자신의 억울함과 속상함을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했던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때로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대적들과 환경 속에서 우리를 건져내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겠습니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처럼, 평소에는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대화도 하고 즐겁게 지내지만, 정작 대화가 필요하고, 삶 속에서 위로가 필요할 때는,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경험해 보셨나요?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누가 누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때로는 우리의 입이 아플 정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호소를 들으시고, 다윗의 심정을 헤아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디 다윗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겠습니까? “주께 피하는 자”는 모두가 이렇게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이듯, 성도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기도의 생활로 우리의 삶을 시작해서, 하루종일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기도하는 삶, 우리의 입이 아플 정도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함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총 가운데 거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