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 26,4-10; 로마 10,8-13; 루카 4,1-13
+ 찬미 예수님
지난 3월 5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순(四旬)의 ‘순’(旬)자는 ‘열흘’을 뜻하기 때문에 ‘사순’은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부터 6주 뒤, 즉 42일 뒤가 부활인데요, 이렇게 40일이 넘는데도 사순시기라 부르는 까닭은, 주님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는 주일에는 사순시기의 재계가 면제되었기에, 주일을 제외하고 40일을 계산하여 지난 수요일에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에 40일 동안 재를 지켰고, 엘리야는 호렙산에 갈 때 40일을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단식하셨습니다. 이처럼 ‘40일’은 하느님을 만나는데 필요한 정화의 기간을 뜻합니다.
사순시기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기쁨을 상징하는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바치지 않고, 제의도 회개와 속죄를 상징하는 자색으로 바뀌게 됩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함께 바칩니다.
대림 시기와 마찬가지로 사순시기에도 ‘판공 성사’를 받게 되는데요, ‘판공 성사’(辦公 聖事)란, 교회가 공적인 일로서 주는 성사라는 의미입니다. 한자어로 ‘공적 업무’를 ‘판공’이라고 하기도 하였는데요, 판공 성사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렌토 공의회에서는 가톨릭 신자의 네 가지 의무를 명시했는데요, 그 네 가지는 주일 미사 참례, 단식재와 금육재,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을 것, 또한 적어도 1년에 한 번 부활 축일 전후에 영성체할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여기에 두 가지가 더 붙어, 교무금 납부와 교회 혼인법을 지키는 것까지가 신자의 여섯 가지 의무입니다.
이 중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는 의무에 대해서, 유럽의 신자들은 성당에 와서 고해성사를 받으면 되지만, 성당이 많지 않고 사목 지역이 넓었던 아시아에서는 사제가 순회하며 성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 교회가 공적으로 주는 성사라는 의미에서 ‘판공 성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추수가 끝난 11월부터 사제가 교우촌을 다니며 고해성사와 미사를 드렸고, 이 판공 성사와 미사는 이듬해 4월 부활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박해가 끝나고 사제의 수가 늘어나자, 한국 천주교회는 판공 성사를 두 번으로 확대했고, 그래서 부활 준비 외에 성탄을 준비하는 판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박해 시대 때 판공 성사 날은, 1년 중 유일하게 고해성사를 받고 미사에 참례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것이 내 일생 마지막 미사 참례일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듬해에는 신부님이 순교할지도 모르고 내가 순교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1857년 베르뇌 주교님이 반포하신 교서(장주교윤시제우서, 張主敎輪示諸友書)에 의하면, “미사와 모든 예절에 참례할 때 모든 교우가 버선을 신고 옷을 단정히 하되, 남자 교우는 머리에 망건을 두르고 소창옷을 입으며, 여자 교우는 미사포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우리나라가 미사 때의 복장을 유난히 강조해 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순회 성사와 미사의 전통이 남아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구역 미사’입니다. 구역 미사는 유럽 교회에는 없는, 한국 천주교회의 고유한 전통인데요, 박해로 인해 공개된 장소에서 미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교우들 집 중 한 곳에서 미사를 드린 것이 그 기원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구역 미사가 시작되어 2구역에서 미사를 봉헌했는데요, 참으로 귀한 자리였습니다. 우리 구역 미사가 있는 날을 기억하시고, 구역 미사에 참례하심으로써 구역 식구들 안에 계신 예수님과 만나시고, 신앙의 선조들도 만나시는 귀한 시간 가지시기를 빕니다.
사순 제1주일 복음에서는 해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올해는 ‘다해’이기 때문에 루카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갖가지 유혹을 겪었습니다. 이 유혹을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에 압축해서 겪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역사를 몸소 겪으셨을까요? 하느님께서 인간과 연대하신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주님께서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셨다는 것”을 고백하라고 말합니다. 이 고백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들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겪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과 연대하시고, 인간과 연대하십니다.
악마는 우선 예수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라고 유혹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에 대해 불평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탈출 16,3)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기적을 베풀지 않으시고 악마에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악마는 두 번째로,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주며 유혹합니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본래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에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고 기도드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악마는 자기가 그것들을 받았고, 자기가 원하는 이에게 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상의 영광과 지상의 영광, 참된 영광과 거짓 영광의 차이를 봅니다. 참된 영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십자가를 거쳐 옵니다. 거짓 영광은 악마에게서 오며, 악마에게 절하고 경배하여 받는 것입니다. 거짓 영광에 취한 이들은 잠깐의 환호를 즐길지 모르지만, 악의 세력과 거래한 대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악마의 두 번째 유혹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졌던 일(탈출 32,1-6)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역시 성경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악마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말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이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하려는 유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싸와 므리바에서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면서 하느님을 시험하였습니다.(탈출 17,7)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성경 말씀으로 대답하십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그러자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갑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나오는 유혹 이야기의 내용은 같습니다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혹의 순서가 다릅니다. 마태오 복음은 마지막에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유혹하는데요, 마태오 복음 마지막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승천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새로운 모세로서,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루카 복음에서 악마는 마지막에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는데요, 루카 복음은 성전에서 시작하여, 성전에서 끝이 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이제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유혹을 성경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악마도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유혹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이단과 사이비 종교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참 하느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쳐야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2독서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가까이 있다. 너희 입과 너희 마음에 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은 우리 인생에서 겪는 유혹을 요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목말라할 것인가, 재물에 목말라할 것인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영광을 추구할 것인가, 십자가 없는 영광, 악의 세력과 거래하여 악마에게 절하고 경배하여 얻는 거짓 영광을 추구할 것인가’,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의 편에 서서 하느님을 시험할 것인가, 끝까지 하느님께 충실할 것인가’ 하는 유혹입니다.
실망과 좌절의 순간에도 결국 주님의 의로우심이 승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주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며 끝까지 충실히 이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요골 공소 (충남 공주시 유구읍) 의 판공 성사날 풍경, 1959년
사진 제공: 김정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