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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5) 주문모 신부의 동선과 24시
교우들 집 전전하며 밤에는 성직 수행하고 낮에는 교리서 집필
-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
창백한 낯빛에 긴 구레나룻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주문모 신부의 도착은 천주교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위로와 기쁨을 주었으니, 이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맞아들였다”고 썼다. 1795년 실포 사건 이후 신부가 조선에 와 있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지면서, 주 신부는 끊임없는 사찰과 체포 시도 속에 노출되어 있었다.
달레는 조선 교회가 오직 하나뿐인 목자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고 하면서, “주문모 신부가 이런 비밀에 둘러싸여 있었으니 조선의 전설이 그의 사목활동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우리에게 전하여 주지 않았음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썼다. 글 속의 ‘조선 전설’은 정약용이 쓴 「조선복음전래사」를 가리킨다.
또 “교우들이 주문모 신부를 칭찬하는 것은 한결같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주문모 신부는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지경이었다 한다. 밤에는 성직을 수행하고 낮에는 책을 번역하거나 새로 책을 쓰거나 하였다. 그는 금식을 하고, 극기를 하고 자기 본분에 자기를 온전히 바쳤다”고 적고 있다.
주문모 신부의 외모와 인상은 어땠을까? 복자 김연이 율리아나가 포도청에서 한 공초에서 말했다. “신부는 나이가 50 가까이 되고, 구레나룻이 조금 깁니다. 얼굴이 길쭉하고 아래턱은 뾰족하였습니다. 낯빛은 검은 듯하고 눈동자는 붉은 것 같았습니다. 키는 중간쯤 됩니다.” 유덕이는 또 이렇게 진술했다. “교종이란 사람의 용모는 얼굴이 둥글고 조금 길쭉한데 양쪽 광대뼈가 높고 크고, 하관은 뾰족합니다. 낯빛이 창백하고 구레나룻은 조금 길고 희끗희끗합니다. 눈이 크고, 나이는 50세가량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늑수(勒鬚) 즉 구레나룻이 길었고, 광대뼈는 솟고 턱이 뾰족한 데다 얼굴이 조금 길쭉한 편이었다. 턱수염도 꽤 길었다. 조금 길쭉한 얼굴에 유난히 긴 구레나룻은 홍어린아기연이와 폐궁 나인 강경복, 김달님 등도 한결같이 증언한 바이다. 위 두 사람의 진술에서 한 사람은 신부의 낯빛이 검다고 하고, 한 사람은 창백하다고 했다. 조선에 온 뒤 그는 낮에는 방안에 깊이 숨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햇볕 쬘 일이 아예 없다 보니, 얼굴색이 누렇게 떠서 핏기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 주문모 신부는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는 존재였고, 조선 신자들은 교회에 하나 뿐인 목자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은 어농성지에 있는 주문모 신부 동상.
신부의 동선과 24시
입국 후 주문모 신부가 처음 머문 곳은 계동 최인길의 집이었다. 1785년 1월부터 5월 초까지 4개월 남짓 이곳에서 생활했다. 두 번째 거주지는 강완숙의 창동 집이었다. 그마저도 처음 두어 달 동안은 장작광 뒤 겨우 웅크려 지낼만한 좁은 공간에서 집안 식구들조차 모르게 숨어 지냈다. 밤중이면 불도 없는 칠흑 속에서 그는 무더위와 싸우고 물것들을 견디며 오로지 기도 속에 그 참혹한 시간을 건넜다.
그 뒤 강완숙네 안방 뒤쪽 협실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햇빛 볼 시간은 없었다. 밖으로 다닐 수도 없었다. 그는 24시간을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이 와중에도 신부는 교리서 집필에 힘쓰고 미사 집전에 애를 썼다.
1801년 2월 말 폐궁 나인 서경의의 공초는 주문모 신부의 일과를 엿보는데 의미 있는 자료다. 하루는 그녀가 무심코 폐궁 송씨의 방을 여니 한 사람이 화들짝 놀라 일어나 곁방 뒷문으로 나갔다. 괴이하게 여긴 그녀가 누구냐고 묻자, 송씨는 홍필주 집안의 여종이 잠시 숨어 있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2월 20일 밤 2, 3경 무렵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그녀가 창문을 열고 살펴보았을 때는 웬 남자가 송씨 방의 측간에서 급하게 곁방 문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놀란 그녀가 송씨에게 가서 물으니, 며느리 신씨가 측간에 간 것을 잘못 본 모양이라며 말을 돌렸다.
연산 이보현의 집에서 상경한 뒤, 신부의 동선도 궁금하다. 1801년 3월 15일, 의금부의 공초에서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의 집을 나와 어디로 갔느냐는 물음에, 신부는 연산 이보현의 집에 도피해 몇 달간 머물렀고, 1796년 5월 상경 이후에는 강완숙의 창동 집과 계동 최인철의 집, 창동 김 우르슬라의 집을 하루 또는 이틀, 또는 사나흘씩 머물렀다고 대답했다. 그러다가 상황이 잠잠해지면 다시 강완숙의 집으로 돌아갔다.
1798년 충청도 지역의 박해가 일어났을 때는 반 년간 지방으로 도피해 숨었고,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799년에 강완숙이 사동(寺洞)으로 이사했다. 집 확장 문제로 법적인 다툼이 생기자 전동 최인길의 집과 아현 황사영의 집에 번갈아 가며 묵었다. 1799년 겨울, 청주에서 교난이 일었을 때도 이를 피해 다시 몇 개월간 지방을 전전했고, 이때에는 교우의 집에 머물지 않았다.
1800년 3월, 강완숙은 사동 집을 되팔고 관훈동으로 이사했다. 이른바 충훈부 후동으로 일컬어진 곳이다. 4월에 충훈부 후동 집에 들어간 지 며칠 되지 않아 다시 여주에서 교난이 발생했다. 신부는 다시 황사영과 남대문 안 현계흠의 집, 창동 정약종과 벽동 정광수, 광통교 김가, 김종교의 행랑채의 집을 옮겨 다니며 지내야 했다.
정리한다. 주문모 신부의 주거는 처음 5개월 남짓 계동 최인길의 집에서 살았고, 이후 1795년 5월에서 연말까지 강완숙의 집에 숨어지내다, 해가 바뀐 뒤 충남 이보현의 집에서 두어 달 숨어지냈다. 5월 상경 이후에는 계속 여러 집을 전전하며 거처를 옮겨 다녔다. 검거 선풍으로 사정이 다급해지면 지방으로 몇 달씩 잠적했고, 이후 1799년 5월 이후로는 외교인의 행랑채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1800년 4월 이후 명도회 모임이 활성화되면서 신부의 각 구역 순회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 기간은 정조의 국상(國喪)으로 인한 국가적 애도 기간이어서 일체의 검거 활동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주문모 신부의 6년에 걸친 조선 체류는 그야말로 칼끝 같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낮 동안 그는 꼼짝도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지냈고, 그것도 여성의 거주 공간인 안방의 더 깊은 안쪽 협실에 숨어 지냄으로써, 양반 여성의 내실을 조사하지 못하는 조선의 관행을 보호망으로 삼았다.
주문모 신부의 조선어 구사력
조선에 6년간 머물렀음에도 신부의 조선어 구사력은 ‘반아(半啞)’ 즉 반벙어리 수준이었다. 여러 사람의 증언이 한결같다. 서양 신부들이 입국한 지 두어 달 만에 기본적인 언어를 익혀 바로 고해성사를 조선 말로 행한 것과 확실히 대비된다. 폐궁의 나인 강경복은 포도청의 공초에서 “사서를 배우려고 홍문갑의 집에 갔더니 홍문갑의 어미가 한 남자와 함께 같이 앉아서 경문을 가르치는데, 그 소리가 벙어리 같은지라 홍문갑의 어미가 대신해서 가르쳐주었습니다”라고 했다. 김계완도 “1800년 7월에 정약종의 집에 두 차례 갔다가 서양국에서 나온 신부를 만나보고 사학을 강론하였는데, 그 사람은 말이 어눌해서 반벙어리 같았으므로 필담으로 서로 수작하였습니다”고 한 것을 보면 확실히 주 신부의 조선어 습득 능력은 큰 문제가 있었다.
나중에 의금부에 자수했을 때도, 신부는 자신이 조선말을 잘하지 못하므로 글로 진술하겠다며 붓과 종이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이에 반해 김건순의 편지를 보고 그 문장력에 감탄한다거나, 유관검 등이 보낸 청원서의 문장이 시원찮다며 직접 손질한 것을 보면 한문 문장력은 몹시 뛰어났던 듯하다. 달레도 주문모 신부가 훌륭한 재질과 한문에 대한 박학한 지식, 비범한 종교 지식과 덕행의 소유자였고, 점잖은 외모와 고상한 태도, 크나큰 친절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고 말한 바 있다.
신부가 비록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거처가 일정치 않았지만, 강완숙의 집이 신부에게는 베이스캠프와 같은 곳이었다. 강완숙의 집에서 신부는 강완숙의 보살핌을 받았고, 대외 활동에서는 그녀의 아들 홍필주가 지척에서 수행하며 이른바 수행비서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부가 거처를 옮기거나 이동할 때도 그가 곁에서 수발을 들었다.
1799년부터 강완숙의 집에서 심부름하며 지낸 여종 정임은 포도청에서 진술한 공초에 묘한 말을 남겼다. “바깥 상전은 작년 섣달에 피를 토하는 증세로 의원을 찾으러 나가서, 이제 석 달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아 간 곳을 알지 못합니다. 안 상전은 조금도 놀라거나 괴이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으레 그런 일로 보았습니다.”홍필주가 1800년 12월 이후, 혈증(血症) 즉 폐병을 치료하겠다고 나가서는 석 달째 들어오지 않고 있는데도 강완숙은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해서 이상하게 여겼다는 내용이다. 또 권상문의 여종으로 강완숙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었던 비녀 복점(福占)은 공초에서 “금년(1801) 정월에 들으니, 홍서방은 미친 증세가 나서 거처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라고 진술했다. 당시 장기간에 걸친 홍필주의 부재를 이리저리 둘러대고 있었던 셈이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정약종과 김가의 집을 옮겨 다니다가 12월에 김종교의 행랑채에 머물렀다가 해가 바뀌어 다시 천주교 검거가 시작되자, 남의 집 행랑채와 북산 등지로 달아나 숨어 지낼 때였다. 아마도 홍필주는 이때 신부를 밀착 수행하며 신변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을 것이다. 홍필주 자신도 결안에서 “저는 계모와 더불어 한마음으로 사학에 깊이 빠졌고, 외국인을 기이한 재화와 같게 보아 아비처럼 섬겼다”고 말한 바 있다.
마지막에 의금부에 갇혔을 때 가혹한 고문으로 마음이 약해진 홍필주는 천주를 배반하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강완숙이 조사를 받으러 가다가 홍필주와 마주쳤다. 강완숙이 크게 소리쳐 말했다. “필립보야! 네가 어찌 네 머리 위에 예수님이 임하시어 비추고 계심을 못 보고, 스스로 그릇된 길로 가려느냐?” 이 말에 홍필주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마침내 기쁘게 순교하였다. 초기 교회에서 홍필주가 감당했던 역할과 비중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6) 100년 전의 연극대본 「고려치명 주아각백전략」
100년 전 주문모 신부 시복 기원하며 입국~순교 과정 10막으로 구성
- 주문모 신부의 일대기를 담은 연극 대본 「고려치명주아각백전략」의 제8막 첫 부분. 8막 제목은 ‘주 신부가 관아에 스스로 자수하고 심판관이 참수형을 언도하다’라고 쓰여 있다.
1920년대 초 중국 강소성 천주교회의 연극대본
「한어기독교진희문헌총간(漢語基督敎珍稀文獻叢刊)」(중국 광서사범대학출판사, 2017) 제1집 제10책은 조선 천주교의 역사를 기록한 책만 따로 묶었다. 1879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은정형(殷正衡, 1840~1914) 신부가 중경(重慶)에서 펴낸 「고려주증(高麗主證)」 5권 2책과 1900년에 중국인 신부 심칙관(沈則寬, 1838~1913)이 상해에서 간행한 「고려치명사략(高麗致命史略)」 1책이 그것이다.
이 책 끝에 「고려치명 주아각백전략(高麗致命 周雅各伯傳略)」이란 낯선 이름의 책이 실려 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조선에서 순교한 주아각백(周雅各伯) 즉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일생을 정리한 연극 대본이다. 앞의 두 책과 달리 필사본인데다, 작가나 창작 시기에 대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고려치명사략」 속에 실린 주문모 신부 관련 내용에 기초하여, 이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쓴 창작 연극 대본이었다. 원본에 ‘상해 서가회(徐家匯) 천주당 장서루인(藏書樓印)’이란 장서인이 찍혀 있다.
이 연극 대본은 언제, 누가, 왜 지었을까? 제10막 에필로그 부분에 단서가 들어 있다. “현재 로마에서 예비심사를 진행 중인, 조선에서 순교한 몇 분의 주교와 신부의 안건이 예비로 진복품(眞福品)과 성품(聖品) 등등에 포함되어 있다. 다시 여러분께 청하니, 이분 주 신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중국 신부이고, 우리 본성(本省)의 소주부(蘇州府) 사람이다. 하루아침에 진복품에 오르게 된다면 우리 강소(江蘇) 사람에게 영광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천주께서 주 신부께 상을 내려주시어 일찍 진복품에 오르게 해주시기를 청해야 할 것이다. 아멘.”
로마 교황청에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위의 시복 요청이 받아들여져서 진복품, 즉 복자품에 오르게 된 것은 1925년 7월 5일의 일이다. 윗글에서 이들의 시복 시성을 위한 예비심사가 진행 중이라고 했으니, 이 대본은 1925년 이전 시복시성 재판에 앞서 예비심사가 이루어진 1923년 3월 이후 24년 사이에 창작된 것이다.
‘본성(本省)’이라 말한 것에서 창작 주체가 강소성(江蘇省) 천주교회였음을 알겠고, 목적은 강소성 소주부(蘇州府) 출신인 주문모 신부가 하루속히 복자품에 올라 강소성 천주교회에 큰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는 취지였다. 당시 로마에서 진행 중이던 청원에는 주문모 신부 등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는 포함되지 않았었다. 재판 신청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의해 주도되었고, 조선에서 순교한 외방전교회 출신 프랑스 신부의 시복시성에 초점이 놓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심사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중국인 복자와 성인을 내야겠다는 열망도 얼마간 작용했다. 당시는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지 12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중국 강소성 신자들은 애초에 주문모 신부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다가, 「고려치명사략」을 보고 주문모 신부가 강소성 소주부 출신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고, 그의 순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때 마침 조선 교회의 순교자 시복 재판 소식이 중국 교회에 알려졌던 모양이다. 이 명단에 주문모 신부가 빠진 것을 보고 그의 시복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 연극 대본 「고려치명 주아각백전략」표지. 원본은 중국 서가회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10막으로 구성된 스케일 큰 무대
주문모 신부의 일대기는 장장 10막으로 펼쳐지는 규모가 큰 무대였다. 매 막마다 서두에 8자 또는 7자 2구로 내용을 간추렸고, 뒤이어 각색(脚色)이라 하여 등장인물을 소개했다. 이후 지문과 대사, 그리고 방백으로 줄거리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제1막부터 10막까지 제목은 이러하다.
①조선 사람이 북경에서 주교를 찾아뵙고, 서신을 읽은 주교가 손님을 머물게 하다(高麗人北京見主敎, 念書信主敎留客人) ②윤유일 바오로가 답장을 지니고 조선으로 돌아오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주교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다(尹祿帶信回高麗, 權方濟樣樣聽主敎) ③제상(祭箱)을 보내오자 교우들이 크게 기뻐하며, 빨리 신부를 보내 줄 것을 천주께 기도하다(送祭箱敎友大歡喜, 求天主快賜神父來) ④주 신부가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오자, 여러 교우가 새 신부를 환영하다(周司鐸初次進高麗, 衆敎友歡迎新神父) ⑤주 신부가 서울에 머물며 조선말을 배우고, 여러 교우가 나아가 주 신부를 뵙다(周司鐸住京學方言, 衆敎友晉謁周司鐸) ⑥최인길 마티아가 주 신부로 가장하고, 주 신부는 잠시 강완숙의 집으로 피하다(趙瑪弟假裝周司鐸, 周司鐸暫避姜姓家) ⑦주 신부가 위험을 피할 뜻이 있었으나, 천주의 뜻으로 다시 조선에 돌아오다(周司鐸有意避危險, 天主意仍舊回高麗) ⑧주 신부가 자수하여 아문에 이르니, 심판관이 참수형으로 판정하다(周司鐸自投到衙門, 審判官判定斬首刑) ⑨사형집행장에서 주 신부가 순교하자, 큰 우레와 비가 쏟아지는 변고가 일어나 사람들이 놀라 깨닫다(押法場周司鐸致命, 大雷雨天變驚醒人) ⑩주 신부가 순교한 영광을 조선 사람들은 지금껏 잊지 않고 있다(周司鐸致命光榮, 高麗人至今不忘)
연극은 이렇듯 1790년 1월 윤유일이 북경성당으로 구베아 주교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귀국 후 조선 교우들의 환호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어 실포 사건과 피신, 자수, 순교에 이르는 도정을 장면별로 간추려 표현했다.
대본은 조선 천주교 순교사를 정리한 「고려치명사략」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전체 23장 중 특별히 제4장 ‘중국 신부가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가다(中華司鐸首進高麗)’와 제5장 ‘주 신부가 주님을 위해 순교하다(周司鐸爲主致命)’에 나온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었다.
제상(祭箱) 속에 담긴 성물
현재 남아 있는 연극 대본은 원본이 흐리고, 중간중간 글자가 많이 탈락되어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여기에 더해 지역 사투리가 강하게 반영된 백화문의 본문은 ‘로()’나 ‘로사()’, ‘탁()’ 등 지금은 쓰지 않는 생경한 옛 말투와 표현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접근이 더 어렵다.
그럼에도 내용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적지 않다. 이승훈의 배교 사실을 강조해서 기록하고, 그의 배교 이후 신자들의 공의로 권일신을 새 주교로 세웠다는 이야기, 그리고 권일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낸 이야기 등이 나온다. 특별히 이류사(李類思)란 인물이 여러 차례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이다.
또 제3막에 보이는 윤유일이 주교에게서 받아온 제상(祭箱)에 담겼다는 내용물 대목도 흥미롭다. “다만 제상(祭箱) 뿐이지만 미사 때 신부가 입는 장백의(長白衣)와 성삭(聖索:허리띠)과 영대(領帶: 목띠), 성석(聖石), 성경, 경문 카드(經頁子), 미사주(彌撒酒), 성체(阿斯底亞: 아스티아, 성체의 라틴어 Eucharistia의 음역)를 만드는 집게[鉗: 제병기], 복사가 입는 단백의(短白衣), 미사 때 쓰는 성작(聖爵)과 성반(聖盤), 성체(聖體)를 줄 때 쓰는 성합[聖爵], 성체(聖體)가 빛을 내며 색색을 두루 갖추고 이지러진 데 없는 성광(聖光)이 들어 있었다.”
사실 윤유일이 제상과 미사 물품을 받아온 것은 1차 북경 방문 때가 아닌, 1790년 9월 2차 방문 때였다. 대본에서는 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달레는 이때 윤유일이 성작 1개, 미사경본 1권, 성석 1개와 미사성제 거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받아왔다고만 썼다. 이 물건들은 이때 북경성당에서 새로 세례를 받게 된 성이 ‘오씨’ 또는 ‘우씨’였을 수행 관리가 왕명으로 사가지고 가는 물품이 담긴 상자 속에 같이 담겨 국경을 통과했을 것이다.
제8막 끝에 1801년 4월 19일에 사형 언도를 받은 뒤, 신부의 최후 진술은 이렇다. “대노야께서 저에게 참수의 큰 은혜를 내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귀국에 와서 전교하며 신자들에게 권면한 종지(宗旨)는 하루라도 편안히 죽고 잘 마침을 얻기를 기도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선종할 날짜를 판정해 주시니, 제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온지요. 천주께서 저처럼 비천한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순교의 영광이란 큰 은전을 상으로 내려주시니,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교중(敎衆)에게 청하노니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시다.”
이렇게 주문모 신부는 순교의 영예로운 화관을 썼다. 이어지는 제9막 끝, 참수 장면의 묘사를 보자. “망나니가 귀에다 화살을 꽂더니, 주 신부를 끌고 세 차례 돌게 하고는 돌아 세워 한가운데로 오게 한다. 주 신부는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드리워 형 집행을 기다린다. 망나니가 칼을 뽑아 막 목을 베려 하자 우르릉 꽝하는 소리가 난다. [막이 내린다] 갑자기 비바람과 우렛소리가 들리며 번갯불이 번쩍번쩍한다.”
참수 죄인의 귀에 화살을 아래위로 꽂는 것은 목을 자른 뒤 화살 끝에 끈을 묶어 도르래로 머리를 달아 올려 장대 끝에 매달기 위함이었다. 목이 잘리는 장면은 보여주지 않은 채 막을 내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음향과 조명 효과로 대미를 장식했다.
전체 10막으로 구성된 이 연극 대본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에서 순교까지의 과정을 장엄하게 담아냈다. 이제껏 이 자료는 상해 서가회(徐家匯) 장서루 속에 보관되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2017년에야 처음 공개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중국 강소성 신자들이 신부의 시복 청원을 위해 연극 대본을 만든 지 정확하게 90년 뒤의 일이다. 현재 주문모 신부의 시성 재판이 진행 중이고, 2022년은 한중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주문모 신부를 포함한 동료 순교자들의 시성 축원을 위해 이 연극 대본이 양국에서 무대에 올려지는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된다면 실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7) 여걸 강완숙 골룸바의 카리스마
「사학징의」에 강완숙 이름 128회 등장… 6년간 주문모 신부 모신 여장부
- 복자 강완숙 골룸바는 여회장으로서 6년간 열과 성을 다해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교회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그림은 강완숙이 왕실인 은언궁 송씨를 찾아 교리를 가르치는 모습(탁희성 화백).
압도적 존재감
강완숙은 초기 교회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1801년 신유박해의 공초 기록인 「사학징의」에 그녀의 이름은 128회나 등장한다.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총회장 최창현과 명도회장 정약종보다 훨씬 비중이 높았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실포 사건 이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지냈지만, 기본적으로는 6년간 그녀의 집이 주된 거처였다. 신부는 강완숙의 안방 안쪽에 달린 협실(挾室)에서 기거했다.
주 신부가 있는 곳이 교회의 중심이었기에 그녀의 집 또한 자연스레 교회의 심장부가 되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신부를 만나지 못했고, 신부의 동선과 행선지도 그녀가 결정하고 관리했다. 그녀의 위상은 황사영이 「백서」에서 “박해 후에 신부가 그 집을 거처로 정하였다. 6년 동안 교회의 중요한 사무에 모두 그녀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신부가 총애하여 신임함이 몹시 융숭하여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썼을 정도다.
그녀는 신부의 비서실장이자 보호자였다. 그녀의 둘레에는 수행비서 역할을 맡은 아들 홍필주와 신심으로 똘똘 뭉친 동정녀 및 과부들의 조직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당시 교회를 설명하면서 “부녀자가 3분의 2를 차지하였고, 어리석은 천한 사람이 3분의 1이었다. 사대부 남자는 세상의 화를 두려워하여 믿어 따르는 자가 몹시 적었다”고 한 말이 실감 난다. 남성 지도자 조직은 오히려 외곽에서 지원했다. 그녀는 조선 천주교회의 명실상부한 실세였다. 그녀를 ‘강파(姜婆)’로 지칭한 탓도 있겠지만, 그 압도적 카리스마로 인해 세상을 뜰 때 그녀의 나이가 적어도 50대 후반쯤은 되었지 싶은데, 막상 그녀가 처형당할 때의 나이는 41세였다.
- 강완숙 골룸바 복자화.
그녀는 1792년 이후, 1793년쯤 상경했다. 별라산 시절부터 그녀의 리더십은 출중했다. 앞서 살핀 대로 그녀는 계실(繼室)로 홍지영과 혼인했다. 홍지영은 영의정을 지낸 홍낙성의 5촌 서조카로,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는 7촌 서조카가 되는 인물이었다. 가족으로는 전처 소생의 아들 홍필주와 성격 고약한 시어머니 유 아녜스가 있었다.
별라산 시절부터 손님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면 안방으로 불러들여 식사를 대접하고, 노잣돈까지 쥐어 줬다는 것에서도 그녀의 거침없는 성격이 엿보인다. 남편 홍지영과 고오봉 등 주요 신자들이 홍주 감영에 끌려갔을 때, 그녀는 음식을 장만해서 감옥까지 찾아가 적극적으로 뒷수발을 했다. 그는 다소곳하지 않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이 적극성과 과감성이 초대 교회를 견인하고, 주문모 신부를 수호해낸 밑바탕이 되었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강완숙에 대해 말한 것을 한 대목 더 들어보자. “골롬바는 안에서 신부를 받들며 기거와 복식에 모두 알맞게 잘하였다. 밖으로 교회의 사무를 처리함은 경영과 수응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동녀(童女)를 많이 모아 가르쳐 성취시켰고, 각 집을 나누어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주님을 믿을 것을 권면하게 하였다. 자기 또한 두루 다니며 권면하여 교화시키느라 밤으로 낮을 이어 편히 잘 때가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도리에 두루 통하고 말솜씨가 민첩하여 사람을 교화시킴이 가장 많았다. 일 처리에 강단이 있고 위엄을 갖추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려워했다.”
기록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그녀의 카리스마는 실로 대단했다. 한신애는 “강완숙은 제가 아들과 비첩들에게 서학을 능히 가르치지 못한다고 하여 매번 비웃곤 했다”고 했고, 궁녀 문영인은 강완숙의 집으로 찾아가 사서를 배우려 하니, 강완숙이 잠깐동안 왔다 갔다 하는 사람에게는 가르쳐 봤자 도움이 안 된다고 해서,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창동에 살던 유덕이 갈오사(乫於沙)도 강완숙에게 정성이 부족하고 배움에 게으른 사람은 쓸모가 없다는 나무람을 듣고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거의 비슷한 표현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강단이 있었고, 여장부의 기질을 지녀, 결코 살가운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리스마를 갖춘 여회장
1811년 11월 3일 조선 교회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신미년백서」에는 강완숙의 일생이 꽤 길고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다음은 그중 한 단락이다. “갑인년(1794)에 신부가 동국에 오셨으나, 조심스레 비밀로 한지라 나아가 뵙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신부가 이미 그녀의 재주와 그릇을 아시고 천거하여 여회장으로 삼았다. 당시의 교우들이 모두 그녀가 알아줌을 입음을 보고 놀랐다. 이때 신부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성사를 조금 행하였다. 동국의 풍습은 남녀가 내외함이 지극히 엄하였다. 그래서 겉모습을 남모르게 꾸미는 것은 여교우가 나은 점이 있었지만, 계책을 삼가 비밀스레 하는 것은 남자 교우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강완숙은 앞에서 끌고 뒤에서 인도하여 정성을 다하고 힘을 온통 쏟아, 안으로 받들어 모시는 예절을 지극히 하고, 밖으로는 가늠해 따지는 본분을 다하였다.”
1794년 연말에 조선에 입국한 신부가 계산동 최인길의 집에 도착한 뒤에도 강완숙은 신부를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평판을 익히 들어 안 주문모 신부는 그녀를 여회장으로 지명했다. 이후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해 신부를 모시고 교회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글 속의 겉모습을 남모르게 꾸민다는 말은 천주교 신자가 아닌 척한다는 말이다.
앞서 윤유일, 최인길, 지황 등 세 사람이 잡혀가던 급박한 상황에서 정약용이 주문모 신부를 창동 강완숙의 집으로 빼돌린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다시 「신미년백서」에서 강완숙에 대해 말한, 다음 한 단락이 유독 눈길을 끈다. “3년이 되자 박해의 기미가 조금 누그러지고 성사(聖事)가 점차 늘어났다. 강완숙은 위로 신부님을 받들고 아래와 연결하니, 곧고 굳고 바르고 반듯해서 강론을 사람에게 펴면 마치 종소리가 화답하여 응하는 것 같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사람을 당기면 마치 불이 장작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려움이 몰려와도 물리쳐 해결함이 마치 예리한 칼로 얽힌 뿌리를 잘라내는 것 같았고, 세속이 위험하나 그 나아감은 마치 남자가 전쟁에 임하는 듯이 하였다. 남자 교우가 비록 많았지만 열심만큼은 매번 그녀에게 양보함이 있었고, 신부 또한 그녀에게 의지하여 일을 이루었다. 진실로 거룩한 모임의 간성(干城)이요 당시의 우두머리였으니,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이라 논할 수가 없었다. 비록 그러나 인정을 매번 살필 수는 없었고, 세상일을 모두의 뜻에 맞게 하기가 끝내 어렵다 보니, 간혹 마땅해 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성인의 전기 가운데서 두루 살펴보더라도 또한 이같은 종류가 많았으니, 이것으로 흠을 잡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교회 내에서 그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웅변하는 글이다. 다만 끝의 한 문장은 교회를 앞세우고 신부를 위하는 그녀의 선 굵은 행동과 말투로 인해, 한신애나 유덕이의 경우처럼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얼마간 불만을 품은 이들이 없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편 폐궁 나인 강경복은 “사서를 배우려고 홍문갑의 집에 갔더니 홍문갑의 어미가 한 남자와 함께 앉아서 경문을 가르치는데, 그 소리가 벙어리 같은지라 홍문갑의 어미가 대신해서 가르쳐주었습니다”라고 했고, 정인혁은 “탁자 위에 등촉을 밝히며, 요상(妖像)을 걸어놓고는 신부인 주문모가 상 앞에 서서 입으로 사서를 외웠습니다”라고 했다. 주문모 신부의 조선어 실력이 워낙 형편없었기 때문에, 첨례는 신부가 주도하되, 교리 교육은 신부와 강완숙이 나란히 앉아, 신부가 우물우물 몇 마디를 하면 강완숙이 알아서 가르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토론으로 기세를 압도하다
1801년 2월 26일경 강완숙과 한신애가 체포되었다. 신부는 이미 다른 곳에 숨은 뒤였다. 신부가 숨은 곳을 알아내기 위한 고문으로 인해, 그녀들은 뼈 마디마디가 부러져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강완숙은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그 고문을 받아 견디며 입을 열지 않았다. 형리들이 저건 여자가 아니라 귀신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신미년백서」는 형장에서의 그녀의 모습을 다시 이렇게 적었다. “유학을 끌어와 도리를 증명하고 본원을 환하게 밝혀, 삿됨을 배척하고 바름을 높이며 고금의 내력을 확고하게 드러내었다. 심문관은 말문이 막혀 여사(女士)로 일컬었고, 당시의 여론이 기운을 빼앗겨 모두 여장부[傑婦]라고들 하였다.”
달레도 “관리들도 감탄하여 강완숙 골롬바를 ‘유식한 여인네, 비길 데 없는 여인’이라는 말로 그를 표현하며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고 썼다. 고문으로 위협하다가 달래고 얼러 유혹을 해보아도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감옥에서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옷을 찢어 신부가 조선에 와서 행한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기록하여 감옥에 함께 있던 여교우에게 맡겼다.
그녀는 1801년 5월 22일에 서소문 밖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그녀 외에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김연이, 강경복, 한신애, 문영인 등 8명이 한날 같이 죽었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기도와 찬미를 멈추지 않았다. 형장에서도 그녀는 구차하지 않았다. 형관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법은 마땅히 옷을 벗은 채 형을 받아야 하나, 다만 우리들 부녀자를 똑같이 그렇게 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소. 담당 관리에게 속히 여쭈어, 이 죄수들이 옷을 입고 죽게 해주시오.”
강완숙은 성호를 긋고 맨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튿날 큰비가 쏟아졌다. 그녀를 포함한 아홉 구의 목 잘린 시신이 진창 속에 널려 있었다. 그래도 시신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았고, 낯빛은 살았을 때와 같았다.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고, 강완숙을 필두로 교계의 지도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깊고 오랜 침묵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