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기도
무언의 기도
시리아의 수도사였던 니느웨의 이삭은 “수많은 말을 함으로써 기뻐하는 사람들은 비록 좋은 말을 하더라도 그 속이 텅 비어 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러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무언의 기도는 우리를 말 중독 중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훈련이다.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진다는 것은 점점 더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시편 기자는 선언한다. 그리고 성 안토니스의 제자였던 광야의 교부 암모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게, 침묵의 힘이 얼마나 철저하게 치료하는지, 또 얼마나 하나님께 온전한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침묵에 의해 성도가 자라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 안에 거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다. 무언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렇듯 다시금 살아가는 침묵으로 나아가게 된다.
경계할 일과 주의할 일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약병에 붙어 있는 주의 사항과 꽤 비슷한 경계의 말을 해야겠다. 무언의 기도는 초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숙련의 정도나 전문적인 지식과는 상관없이 찬양의 기도나 묵상 기도나 중보 기도나 다른 수많은 종류의 기도들은 누구든지 다 자유로이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무언의 기도만큼은 다르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소중하지만, 누구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놀랍고 두렵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그리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침묵의 말씀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다. C.S.루이스는 나는 아직도 할 수만 있다면 무언의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기도를 나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실제 내 능력보다 더 큰 정신적, 영적 힘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언의 기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무언의 기도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성숙한 믿음의 표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와, 개인적 희생이 크다 해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만이 마음의 소원을 만족시키신다는 살아 있는 확신과, 기도에 대한 깊은 만족 등이다. 또 개인적인 능력과 단점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와, 영적인 성취를 자랑하지 아니하는 자유 함과, 생의 요구들을 끈기 있고 지혜롭게 처리해 낼 수 있는 입증된 능력 따위를 들 수 있다.
당신 스스로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점검하려면 다음 몇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된다.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점점 덜 두려워하고 있는가? ”기도의 훈련을 달게 받으며 기도가 내 안에서 발전하고 있는가? 지도의 훈련을 달게 받으며 기도가 내 안에서 발전하고 있는가? 건설적인 비판을 점점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개인적인 모욕에 대해 구애받지 않으며, 내게 잘못한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기를 배우고 있는가?’ 말없이 하나님을 묵상하다 보면 영적인 세계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무언의 기도에서는 말이 뒷전으로 물러가고 감정이 전면으로 부상한다. 각각의 경우 감정적인 언어를 주목해 보라. 이런 종류의 기도는 분명히 이성적인 경험보다는 감정적인 경험에 해당된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무언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체험을 말한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청종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 무언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감정에 대해서 말할 때 의도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내적인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이성이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하나님에 의해 훈련될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변할 수 있다. 무언의 기도는 신앙생활에 숙련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든 교리의 풍조나 감정의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과 육정과 마귀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폭 넓은 체험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고양되는 영적인 열정과 성령께서 주시는 확고부동한 확신의 차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한 반복된 시행착오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음성과 교활한 인간들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연합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대답해 왔다. 노리치의 줄리아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온전한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이상과 생각 속에 들어가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성 프랜시스의 제자였던 보나벤추어는 우린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면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순수한 관계라고 하였다.
두 가지 중요한 준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마음이다.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언의 기도가 당신에게 주는 소망의 메시지는 오늘날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과 혼잡한 언어의 정글을 당신이 말없이 헤쳐 나갈 필요가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 속에 임재 하셔서 당신 속에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 속에 내주하셔서 당신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당신이 책이나 설교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지각과 빛을 주신다는 데 있다.
불결함은 하나님과의 연합에 치명적이다. 청결한 것과 불결한 것은 결코 연합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지혜로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곧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신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유명한 표현에선 “마음의 순수함이란 오직 한 가지만을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한 가지만을 소망하고, 하나님 외의 모든 충성의 대상들을 포기하고, 하늘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 하나님이 보시는 것만을 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만을 하자. 한 가지만을 소망하자.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그것이 선한 것이며, 그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청결함이다
마음의 평정을 배워라
첫 번째 단계는 전통적으로 ‘마음의 평정’이라고 불려왔다.
먼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모든 긴장과 걱정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 방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라. 아마 당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정신이 산만해지면 그것을 다만 아버지의 품안에 올려 드리고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기라.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풀어 버리는 것이다. 억제란 내리누르는 것이며 제지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마음의 평정이란 내버리는 것이며 부어 주는 것이다.
고요의 기도
두 번째 단계로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것을 ‘고요의 기도’라고 불렀다.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통해 마음속의 온갖 방해 요인들과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들과 의지를 박약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내버렸다. 제임스 보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주님은 내 진정한 자아에 더 가까우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훨씬 더 사랑하신다. 주님이 내게는 ‘아빠’요, 아버지시다. 그분이 존재하시기에 내가 존재한다.”
프랑소아 페넬롱은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의 성령이 감화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은사들을 주실 때에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라. 당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님께 귀 기울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모든 외적이고 세상적인 사랑과 우리 속에 있는 인간적인 생각들을 침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영적인 신비 체험
무언의 기도의 마지막 단계는 영적인 신비 체험으로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책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열어 놓고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무언의 기도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려의 말을 하고자 한다. 우리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때가 올 터인데 그래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말없이 기도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그 영광이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인생 초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게르하르트 테르슈터겐의 말대로 “지금도 임재 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