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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한 후
신앙의 최대의 적은...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들이 조심할 것은 무엇입니까?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이 한 순간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위대한 승리를 거둔 뒤 우리들이 조심할 것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18:12)고 말합니다. 즉 신앙생활 가운데 위대한 승리를 거둔 뒤 교만해서 한 순간 무너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가장 주의할 것이 상대를 깔보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우리들은 이 본문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나안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문턱이 요단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임종을 보았습니다. 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여리고를 점령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사랑 그리고 신실하심을 통해서 여리고가 점령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크나큰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기쁠까요? 이스라엘은 한 사람도 손실이 없는 승리는 맛봤습니다.
승리 후에 나타나는 문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요, 언약의 결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자기의 능력으로 이 일이 나타난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자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여호수아를 높이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으므로 그의 명성이 온 땅에 두루 퍼졌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높이셨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높임을 받게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7장1절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바로 복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반응에 따라서 우리 주변이 복을 받기도,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누구와 함께 해야하는가? 이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전체가 한 사람의 범죄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간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잇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승리를 주신 것을 믿었다면 아간은 범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솔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것입니다.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
아무든 이스라엘은 큰 승리에 도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성을 볼 때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견고한 성인 여리고를 우리는 무너뜨렸다. 그런데 이 작은 아이성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탐군의 보고를 보십시오. "돌아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아이성을 치기 위해 모든 군대가 다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곳은 2-3 천명 정도의 병력이면 충분히 칠 수 있는 조그마한 성이었습니다.'"(수 7:3)고 보고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주의해야 할 때는 언제입니까?
모든 것이 문제없이 잘 나가고 있을 때입니다. 승승장구할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한번 승리했습니다. 물론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승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입성해서는 처음입니다. 그런데 한 번 승리하고 교만하게 행하는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이렇게 행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교만하게 행동으로 옮김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는 정탐군의 보고를 듣고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처음 여리고를 정탐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수5:13-15). 그는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여호수아는 신을 벗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전쟁의 선봉에서 서면서 자기의 신을 벗고, 리더로써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신을 신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승리에 토치 되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여리고 전투에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들이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든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힘을 의지해서 전쟁을 행하고 있습니다.
전투는 계속됩니다.
이스라엘이 교만하게 행동한 결과 처참하게 패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영적 전투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단이란 영적 존재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시험하는데 포기함이 없습니다. 사단은 끝임 없이 우리를 시험하고, 기회를 옆보고 있습니다. 끝임 없이 우리들을 향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 시도하고, 두 번 시도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끝까지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올무를 만들고, 넘어뜨리기 위해서 함정을 파고 기다립니다.
찬송가 401장 3절은 "너 가는 길을 모두 가기 전에 네 손에 든 검을 꽂지 말아라. 저 마귀 흉계 모두 깨뜨리고 끝까지 잘 싸워 이겨라"고 말합니다. 왜 꽂지 말아야 합니까? 가나안의 전투는 가나안을 완전히 정복할 때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 칼을 꽂아서는 안됩니다. 모든 전투가 끝날 때까지 검을 들고 악한 꾀를 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라고 경고합니다. 된줄로 생각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참 교만한 사람입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언제 깨닫는 줄 아십니까? 좀 뭔가 내 뜻대로 되면 쉽게 교만하는 나를 볼 때입니다. 제가 계획한 일이 순조롭게 성취되면 어느새 저는 제 머리를 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누가 저에서 "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또는 "목사님의 설교로 제가 지금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때입니다. 그러면 저는 금방 '그래 나는 참 설교를 잘해' 또는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 나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태어났다면'하고 생각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시험)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허락하시는 것이 많습니다(고전10:13). 즉 우리에게 적당하게 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욕심에 의해서, 또는 게으름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인가 배워야 합니다. 그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롬 8:28). 아무든 우리들은 큰 승리를 경험한 순간, 내가 계획한 일이 성취되는 순간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뤄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취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교만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한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인 크라이슬러(1875년)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부러워하고, 칭찬할 때마다 "지금의 제가 된 것은 제 능력보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저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을 보셨나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음악을 재 명예를 위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겸손해야 합니다. 크라이슬러는 자신의 재능으로 인해서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겸손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고백 후
사도 베드로는 마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것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것을 너에게 알리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이시다."(마 16:17)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베드로는 예수님께 꾸짖음을 받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일을 막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인정을 받는 순간 꾸중을 듣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된 줄 생각하면 곧바로 내 생각 또는 사단의 꾀에 넘어가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영적 전투는 씨름입니다.
씨름에서 중요한 것은 하체입니다.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씨름 선수들은 가능한 낮은 자세를 취합니다. 몸이 높으면 그만큼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투는 이와 같습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대신 겸손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높이시고,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십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아이성과 전투하기 전에 하나님께 겸손히 신을 벗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써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종의 자세로 나아갔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아이성을 정탐했던 사람들이 경솔히 보고하지 않았다면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물론 아이성의 패배는 아간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패배는 교만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를 향해서 큰 승리에 도치되어서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아무리 작은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시1:1에서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않습니다. 그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항상 주님의 말씀 앞에서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 앞에 섰다면 결코 이스라엘은 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죄를 정확히 지적하고, 이스라엘이 악을 제거하여 정결된 후 전쟁에 임하도록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위대한 승리 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교만을 주의하십시오. 큰 승리를 얻은 후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주님의 말씀에 더욱 믿음으로 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