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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주의와 열린 사고를 통한 근대성 비판
- 박경애의 수필세계-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열며
문학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수필가는 시대와 역사의 증언자여야 할 것이다. 인간성 상실, 자연 파괴, 사회적 불안과 공포 등 총체적 위기에 처한 현재, 경제적 합리성만이 강조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는 이제 더 이상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인간의 비인간화가 인성 때문이라고 보는 데는 다른 생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도구적’, ‘정합적 이성’만을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구조가 비인간화를 불러온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조직과 구조의 개혁은 필수적이다. 한편 도구적 이성에만 빠져 있는 인간 이성의 찰나적 본성을 등한시하는 더욱 단적인 예는 과학기술의 맹목적 발전과 추종을 들 수 있다. 그 대신 이른바 생태적 합리성에 대한 관심이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인간의식에서부터 생활과 사회구조에 이르기까지 생태친화적인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 생태적 합리성에 근거한 대안적 세계관 모색과 관련해, 특히 우리 전통문화와 생활양식 속에 오늘날 새롭게 되살려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이 수필가 박경애의 주된 관심사이다.
‘의심’하고 ‘회의’할 수 있는 이성적 힘이 상실될 때 인간은 권력과 그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떻게’만 좇는 ‘정합적 이성’ 중심의 인간과 사회는 양심과 도덕성을 잃어 ‘비인간화’의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 즉 ‘비판적 이성’을 도외시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해내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이러한 정합적 이성주의자들이다. 그것은 박경애의 수필 속, 현대 사회와 문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모든 가치를 도외시하는 산업구조, 기술생산의 효율성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과학기술 논리 등이 그것이다. 박경애의 수필은 바로 이 같은 문제점을 공존과 상생의 미학을 통해 찾아내고 있다. 박경애의 수필은 모든 수필이 하나 같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비인간화의 한 예가 될 도구적 이성에 빠진 현대인의 비인간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한마디로 생태수필이다.
II. 생태수필이란?
생태수필의 의미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전체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핵심에 있는 생명의 개념, 즉 생태계 중에서 생명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는 데 있다. 따라서 생태 수필이란 생명 자체를 노래함으로써 생명의 본질과 가치를 추구하는 수필이며,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의 가치와 위상, 생명고양의 조건을 살피어 그 중요성을 문학적 상상력 속에 구체화하는 수필을 가리킨다. 때문에 이를 달리 자연 친화적 수필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하겠다. 박경애의 생태 수필은 주로 고발, 발견, 전망 또는 신뢰가 그것이다. 고발의 장은 생태계 오염이나 생태계 파괴의 참상과 그로 인한 생태적 인간 정신의 상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발견의 장은 자연의 근본이자 바탕인 초록의 현장을 찾아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박경애에게 있어서 자연의 발견은 원시적 삶을 의미하며, 여유와 느림의 미학을 뜻한다. 생명의 발견 안에는 유년의 추억이 있고, 꿈이 나래를 펴고 있다. 그녀는 초록의 체온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전망 또는 신뢰의 공간은 수필가 고유의 감수성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생태 사회를 보여주어 인류에게 그런 미래를 꿈꾸게 만드는 상상력의 보고를 의미한다. 문학적 상상력과 생태학적 인식으로 또 하나의 희망이 될 지구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장이다. 따라서 박경애의 수필집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와 인간 중심주의,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생태문학을 제시한다고 하겠다.
III. 펼치며
가. 생태적 합리성과 탈소재주의
산업사회의 현대는 독자를 감동시키는 강렬한 흡인력과 공감대를 지닌 수필을 요청한다. 뉴턴이 말한 수필의 보편성이야말로 소재의 다양성에 의미를 둔다고 하겠다. 박경애의 수필은 생태수필을 넘어 네 가지 범주로 그 특성이 확산되지만 그녀의 시그니쳐 담론은 생태수필이 최우선이다. 문학적 보편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편중적인 소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녀는 생태수필 외에도 자신의 삶과 관련된 자조적 수필 등 다양성을 품어왔다. 틸 다이가 상상을 ‘소재를 변형시켜 새 현실을 창조하는 힘’이라고 한 것은 소재의 확장이 수필 영역의 확대와 직결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박경애는 그동안 멀리 해온 ‘바다’ 소재의 접근성을 요구받는다고 하겠다. 위의 측면에서 박경애는 하나뿐인 지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생태주의’를 내세우면서 ‘바다’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 바다는 환경인 동시에 문화다. 바다를 함께 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일부분이고 도전과 응전 속에서도 경외와 적응 속에서 삶의 순리를 따르기도 하였다. 미래로 가고 있는 수필 속에서 바다는 중대한 화두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다. 물의 총합으로 표징되는 바다, 생명의 원천으로 화합과 끌어안음의 그 바다를 배경으로 하거나 주요 대상물로 하는 수필은 사람도 등장하지만, 주역을 담당한 바다라는 무대에 내포된다. 우리 나라도 반도의 삼면이 바다를 끼고 있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바다를 읊은 노래가 많다. 우리 시가의 최초 작품이라고 말해지는 ‘구지가’나 ‘공무도하가’가 바다 또는 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부터 그렇다. 그러나 고대시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에 투영된 바다의 모습이 한결같지 않으리라는 것은 물론이다. 이 글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한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플라스틱 빨대가 바다 동물에게 흉기다. 플라스틱 생활용품이 워낙 많다 보니, 작은 빨대는 분류 배출이나 분리수거가 안중에 없어 무시된 것이리라. 묻히거나 소각장에 태워 없어지지 않은 빨대는 바다를 떠돌며 해양 생물의 생명과 생존마저 위협한다. 미세 플라스틱을 먹잇감으로 먹은 플랑크톤, 플랑크톤을 먹은 생선류가 우리 집 식탁 위에 올라와 우리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가. 심지어 천일염 속에서도 미세플라스틱 나온다고 하니 안심 먹거리가 있기는 한 것인가. 플라스틱 빨대는 오 초에 하나씩 생산되고, 자연 분해되는 데는 오백 년이 걸린다고 한다. 플라스틱 빨대 사용은 겨우 오 분에 지나지 않는데, 그 오 분을 즐기자고 환경오염 주범인 빨대를 계속 사용해야 할까. 이대로 가면 언젠가는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이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야 할 때가 아닐까.
아기거북 코에 누가 빨대를 꽂았는가. 오 분의 즐거움을 위해 해양 생태계 파괴에 동조해서야 되겠는가. 빨대 없이 마시는 작은 습관 하나 정도 가져봄은 어떠할까.
-<바다거북> 중에서
박경애의 수필들은 주제의 재료이기도 한 제목에서 이미 생태적 중요성을 다분히 암시하고 있다. 제목은 하나 같이 구체어로 되어 상징성이 크다. 생태적 합리성과 상상력을 주제지향성으로 내세우면서, 우리네 이웃, 정부 당국과 정치인의 안이한 생태인식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비판의 눈길이 있어 박경애는 수필가의 사회적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하겠다. 문학적 안목이라는 것은 대상을 그 대상의 속성 자체로 재인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그 연결고리의 한 축에는 언제나 인간과 삶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중심적이어서 인간 외 다른 존재의 울음에는 무관심할 뿐이다. 그러나 박경애의 수필에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치가 물결치고 있다. 이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은 생태의식이라고 하겠다. 생명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21세기 수필가는 생태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수필은 생명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생태 수필을 쓰는 행위는 모순된 현실을 박차고 나오는 탈출구라는 측면에서 인간이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빨대는 <바다거북>에게 큰 재앙이 된다. 이 수필은 사생과 공존이라는 차원에서 큰 의의가 지닌다.
“미세 플라스틱을 먹잇감으로 먹은 플랑크톤, 플랑크톤을 먹은 생선류가 우리 집 식탁 위에 올라와 우리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지 않는가. 심지어 천일염 속에서도 미세플라스틱 나온다고 하니 안심 먹거리가 있기는 한 것인가.” 어딜 가나 넘치는 차량, 개성 없는 공산품은 산과 바다를 이룬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가면 넘치는 플라스틱 물건들로 머리가 어질어질해 돌아온다. 저 많은 플라스틱 물건을 누가 다 쓰는지, 쓰고 난 쓰레기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박경애는 늘 걱정이다. 작가가 문명의 이기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생태파괴주의 상황을 염려하고 있음이다. 입양되었던 아이가 이제야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안 것처럼 거대한 탑에서 나는 연기와 기계에 둘러싸인 인간들이 녹빛 자연을 그리워하며 하나둘 흙과 친해지고자 하는 생태담론을 왜 필요한지 죽어가는 바다거북을 통해 그 당위성을 잘 표방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생태담론의 의의는 본래 자연에 기대어 살던 인간이 자연과 인간 사이의 본연적인 끈을 끊으려 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고 미래에 예측되는 우리들의 문제는 자연과의 단절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절 이후의 우리의 선택이 문명이기라는 게 문제다. 작가는 주변에 넘쳐나는 플라스틱 빨대를 통해 진정한 생태의 가치를 말해준다.
무분별한 개발과 삼림 훼손으로 지구의 허파인 숲을 얼마나 많이 태우고, 베어 버렸는가. 많은 공장과 자동차가 배출하는 가스는 지구 대기권을 파괴하여 극지방의 빙하를 녹인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해양을 떠돌며 바다 생태계를 교란하는구나. 지금 지구는 ‘코로나 19’로 뜨겁게 열을 내며 앓는 중이다. 지구에 내리는 물 폭탄은 아마도 끓고 있는 지구의 해열제인지 모른다. 몸살을 앓을 땐 쉬어주고, 열을 내리고 따스한 사랑의 손길이 있으면 회복되지 않을까. 지금 겪는 물난리와 폭염은 ‘지구의 몸살’을 낫게 해 주는 자정 활동인지도 모른다. ‘코로나 19’로 공장이 문을 닫고, 사람과 물자의 교류를 줄이니,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고, 미세먼지가 줄어든 것을 본다. 아픈 몸을 어루만져 주듯 지구가 앓는 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건 어떠하랴. 혼자서 앓는 아픔은 더욱 서러운 법이거늘.
- <물물물> 중에서 -
자연과 인간의 삶은 끈끈한 핏줄로 연결된 일종의 공동운명체라고 할 수 있다. 생태계는 인간 경제활동의 모태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활동에 되먹임 작용을 한다. 에세이문예 편집장인 수필가 박경애가 ‘지구의 몸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많은 공장과 자동차가 배출하는 가스’와 ‘지구 대기권을 파괴하여 극지방의 빙하를 녹이는 폭염’ 등이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직시하고 있다는 것은 작ㅅ가정신의 발로라 하겠다. 평자는 ‘생태’ 문제가 절실한 이 시기에 박경애가 이런 생태수필을 기획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최근에 이르러 생태계와 경제활동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경제활동이 지구생태계가 지탱할 수 있는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인간의 경제활동이 생태계와 생태학적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을 인식한 박경애가 생태수필에 집중성을 보이고 잇는 것은 다행이라고 하겠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알트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유상종이라 했으니, ‘아픈 몸을 어루만져 주듯 지구가 앓는 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건 어떠하랴.’고 하는 이 절절함 외침을 들으려 박경애 작가 주변에 많이 모여들기를 기원해 본다.
어느 날 문득, 곤히 자다가 새벽에 눈을 뜬다. 사랑하는 손녀 봄이와 손자 륜이가 지금 같은 지구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게 걱정이다. 우리는 공업화, 과학화로 세상이 변하고 고속 성장하는 걸 몸소 겪은 세대이다. 전쟁 후 가난과 굶주림 속 후진국 삶에서 세계 십 위 권의 선진국 삶을 사는 세대이다. 변화와 발전, 성장을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없애고, 파괴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 온 세대인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거늘, 뿌린 대로 거두는 중인지 모른다. 지금 누리는 이 삶이 아름다운 지구를 훼손하고 ‘자연 질서’마저 파괴하여 세운 사상누각과 같지 않을까. 코로나 팬데믹 같은 인류 대재앙은 인류가 오만하기 그지없어 지구가 보내온 경고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이런 지구에서 사랑하는 손자녀가 살아갈 앞날 걱정으로 잠마저 설친다.
- <연두> 중에서-
위의 수필은 변화와 발전, 성장을 위해 ‘공업화, 과학화’를 가속화해 온 결과가 가져온 지구 환경의 문제를 언어에 잘 담아내고 있다. 수억만 년의 자연을 망가트리는 데 한 세대가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걸 없애고, 파괴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 온 세대인가'라는 진술을 통해 그녀는 근대 이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근거가 되고 있는 ‘정합적 이성’을 은근하게 비판하고 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만을 따지는 ‘정합적 이성’ 논리는 개발지상주의를 가져왔고, 사랑하는 손자손녀가 살아갈 이 땅을 망쳐놓았다. 강물 위에 뜬 등 굽은 물고기의 침묵으로 시작된 인간의 생태에 관심은 지성인의 보편적 의식이 되었다. 자연을 위하는 것이 인간을 위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두는지도 모른다. “코로나 팬데믹 같은 인류 대재앙은 인류가 오만하기 그지없어 지구가 보내온 경고 메시지인지도 모른다.”는 부분에서 우리는 무한정의 개발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작가의 생태주의적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을 노래하되 파괴된 자연을 노래함으로써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게 된 연유는 물론 자연의 변화에 기인한다. 어디에고 순수한 자연은 남아 있지 않고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가 파괴된 자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노래하는 박경애 수필은 자연히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폭염>이란 수필도 ‘우리가 날씨다’라는 문제의식이 놓여 있다. ‘십팔 년만의 무더위라고 한다. 잠 못 드는 열대야는 보름이나 계속되었다. 매미는 덥다 못하여 맵다고 울어댄다. 인정사정없는 더위는 입추가 지났는데도 슬며시 고개를 떨굴 줄모른다.’라는 부분에서 기후문제의 심각함을 알리고자 한다. 작가라면 미세한 자연의 발신음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공감과 설득도 이끌어내어야 한다. 위의 수필 역시 지구를 ‘자연 질서’마저 파괴하여 세운 사상누각’이라 보는 것은 인류의 행복에 과학과 기술이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인간성을 파괴하고 영혼이나 마음 등 모든 비과학적 영역을 삶으로부터 추방시키며 자연과 생명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한다. 인류의 오만, 지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재화의 생산과 많은 물질의 소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간은 갈수록 탐욕적인 존재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정작 잘 모른다. ‘손자녀가 살아갈 앞날 걱정으로 잠마저 설친다.’는 불면의 상황제시를 통해 그녀는 생태위기를 설득적으로 전해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엄마는 금의환향을 꿈꾸며 부평초처럼 객지를 떠도는 아버지의 짝이다. 타향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얼마나 힘드셨을까. 아버지의 탄광 사업 실패는 온 가족을 나락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 반짝이는 눈으로 어미 새만 바라보는 새끼 제비 입에 넣어 줄 먹이가 또 걱정인 엄마다. 또다시 하얀 꽃이 쌀밥이길 간절히 바라시겠지. 고단한 인생 고개 굽이굽이 돌면서 등이 굽은 엄마는 찔레꽃 줄기다. 엄마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은 연로하신 시모와 병든 아버지와 올망졸망 커가는 제비 같은 새끼들이다. 줄기에는 당신을 찌르는 찔레꽃 가시만 무성하구려. 가시 달린 덩굴로 보듬고 품어야 할 삶의 돌무더기가 그 얼마나 되리오.
- <찔레꽃> 중에서 -
작가는 ‘고단한 인생 고개 굽이굽이 돌면서 등이 굽은 엄마는 찔레꽃 줄기다. 엄마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은 연로하신 시모와 병든 아버지와 올망졸망 커가는 제비 같은 새끼들이다.’라는 진술에 담긴 함의는 ‘가시 달린 덩굴로 보듬고 품어야 할 삶의 돌무더기’가 많다는 것이 아닌가. ‘당신을 찌르는 가시만’ 무성한 찔레꽃을 보면서 기구한 삶을 모질게 살아낸 어머니를 그려본다. ‘가시’는 엄마가 껴안아야 할 삶의 무게다. 아버지의 탄광사업 실패는 온 가족을 나락으로 밀어 넣고 말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연로하신 시모, 병든 아버지, 제비 같은 색끼들 부양에 힘든 어머니의 삶을 그녀는 ‘돌무더기’로 비유하고 있다. 전이의 미학이 담긴 진술에는 자동반응성 속에 갇혀버린 인간의 비인간적 삶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산업사회의 기계화된 생산방식과 사회 안전망이 잘 갖춰지지 않은 사회가 가난한 인간으로 하여금 ‘즉자적인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수필 속의 ‘제비 새끼들’ ‘찔레꽃 가시’ ‘삶의 돌무더기’ 등의 객관적 상관물은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정서적인 접근성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매우 성공적인 주제의식의 구체화 전략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자연에서 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고, 우리네 조상들이 이러한 거대 문명을 건설하기 전에는 자연 속에서 먹고 자고 했다는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라면 인간이 자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사실일 법하다. 작가가 이 수필집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폭염 속에서 고생하는 아들, 파괴된 지구환경에서 살아 나가야 할 손자손녀, 찔레꽃 같은 엄마의 삶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이름에 대한 사유를 통해 자신을 존재 규명의 성찰대 위에 세우기도 한다. 존재 본질로서 ‘무’, ‘공’을 깨닫고 삶의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느림의 미학뿐만 아니다. 잊고 있거나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와 우리가 진정 돌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발견과 인식이 이 작품의 존재 의의이며 가치인 것이다. 이름을 개명하지 못한 것은 오래 시간 함께했던 운명적 존재에 대한 애착이기도 하다. 변화의 질주 속에서 옛이름을 고수하며 가슴에 지니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주체적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다. 이름은 위안의 공간이다. 그녀의 수필은 삶의 옆에 또는 삶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있는 중요한 생활이며, 그 삶의 체험이 자신의 수필 속에 절실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개명한다고 하여 타인의 견해를 듣고, 더 이상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데 이름 때문에 이렇게 흔들리는가. 개명한다고 하여 삶이 온전히 달라질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한다. 이름에 愛자를 쓰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름자를 쓰는 모두가 불행하고 나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리라. 이름이란 그 사람을 상징하는 중요한 기호이고 사회적인 약속일뿐이다. 이름에 의해 운명이 정해진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다. 지금까지 겪은 고달픈 삶은 내가 선택하여 내가 만든 것이다. 지금의 삶은 완성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과정이지 않을까 싶다.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과연 운명이 새롭게 바뀐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如主라는 별호를 붙여본다. 나 자신에게 ‘여주’라고 새겨본다. 무겁고 고된 삶의 무게가 힘들게 하여도 지금의 ‘나’로서 살아야 한다. ‘나’는 ‘나’이니
- <이름> 중에서 -
부질없는 욕심과 이치에 맞지 않은 집착에서 벗어나 인위적인 삶을 버리고 이치에 닿는 삶을 공명정대하게 살 때 인간은 장쾌한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다는 것이 무위자연의 본래 의미다. “이름에 의해 운명이 정해진다는 것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다. 지금까지 겪은 고달픈 삶은 내가 선택하여 내가 만든 것이다. 지금의 삶은 완성되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과정이지 않을까 싶다. 이름을 바꾼다고 하여 과연 운명이 새롭게 바뀐다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개명을 하라는 작명가의 권유를 뿌리치고 무위의 사상을 사유하며, 인생의 주체로서 자신을 다잡고 있다. 동양에서는 자연의 질서와 인간 삶의 질서가 다르지 않다는 대원칙에서 철학이 출발한다. 즉 자연이 무위의 비획일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이듯이, 인간도 자연이므로 인간의 삶도 무위의 비획일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여지는 것이다. 이 수필은 서양의 목적론적 존재론의 노예로서 삶이 온통 인위적인 성취와 부질없는 불만족의 연속으로 일관되는 불행을 그만두고 동양적 사유 전통을 우리가 회복할 때 ‘인간의 얼굴을 한 인간의 삶’이 열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如主라는 별호를 붙여본다.’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의 삶을 성찰적으로 반성하며, ‘태어날 때의 무구한 모습’ 즉 인간의 본 얼굴‘을 가지고 싶다는 염원의 발로로 보인다. 이로써 박경애의 문학적 관심은 주체적 삶에 있다고 하겠다.
나. 열린 정신과 떠남의 미학
박경애 수필의 출발점은 언제나 ‘떠남’에서 시작된다. 여행을 하다보면 자기 사고의 한계를 벗어난 사물을 만날 때가 있다. 만물에 민감한 촉수를 가진 작가의 눈으로 대상이 다가올 때, 그 순간 작가는 감동으로 이어지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박경애의 수필 작업은 일상적 삶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의 기록이다. 작가가 수필을 쓰면서 생활의 안정과 행복을 느끼는 데는 여행이란 ‘떠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행을 떠나서 자연을 만남으로서 비로소 한 편의 수필이 완성됨을 볼 때, 작가에게 여행은 문인으로서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제일의 질료다. 정휴 스님은 “사람도 물도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썩기 마련이다. 인생은 강물처럼 흘러야 새로운 만남을 체험할 수 있다. 고정된 틀로써는 전체를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고집을 갖게 되며 본질을 직관하는 시력이 약해진다. 왜냐하면 고집은 정신적인 군살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떠남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고 썼다. 수필 <모로코>에는 ‘전복된 난민의 비애’가 묻어나온. ‘떠남’으로써 얻는 호사보다 그녀는 타자들의 신음에 포커스를 둔다. 연민과 공존의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작가의식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수필가 박경애가 말하는 생태문학은 녹색, 생명, 환경 등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녀의 수필은 단순히 국내의 환경문제,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떠남을 통해서도 외국에 가서도 현대 사회의 모든 병폐를 생태학적 인식으로 바라보며 녹색의 가치에 대한 감성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지난봄 리비아에서 내전과 가난을 피해 새 삶을 꿈꾸는 난민들이 작은 배에 목숨을 건 항해를 했다. 지중해에서 난민선이 전복하여 배에 타고 있던 난민들이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난민 칠백여 명은 작은 어선에 몸을 맡긴 채 목숨을 건 항해를 한 것이다. 지중해는 아름다운 바다로 누구나 꿈꾸고 가보고 싶은 바다이다. 지금 지중해는 “죽음의 바다 지중해”, “난민들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살기 위해 떠난다. 살아남기 위해 떠나감을 주저하지 않는다. 조국을 떠나 낯선 타국으로 떠나간 사람들은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오기는 하려나. 떠나야만 살 수 있는 이들의 현실이 가슴 아프다. 전복의 순간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무모한 도전이 조국을 영원히 가슴에 묻고 말았다.
- <모르코>에서 -
박경애의 여행수필은 ‘떠난 자’만이 누릴 수 있던 행복이 노정되어 있기보다는 자신의 시그니쳐인 생태주의를 주제의식으로 구현하기 위한 사유가 더 많다. 견문의 희영보다도 생태문제와 인간의 인건에 대해 언급하는 바, 그녀는 늘 의식적이다. 모르코 여행에서 본 지중해와 관련된 난민을 연상하고, 난만들의 무모한 도전으로 인한 희생의 일화를 소개한다. ‘난민 칠백여 명은 작은 어선에 몸을 맡긴 채 목숨을 건 항해를 한 것이다.’라고, 난민의 현실을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수필은 휴머니즘에 대한 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해서 창작된 것이다. 이러한 생태적 마인드를 통해 작가는 지중해에서 일어나고 있는 난민과 삶의 관련성을 인권의식과 연결시켜 이슈화하는 데 성공한다. 최소한 박경애는 휴머니즘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있거나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해 의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행 중에도 독특한 자신의 방식으로 휴머니즘을 깊이 있게 형상화하여 보여주었다는 측면에서 이 수필은 기행수필의 문제를 잘 극복하고 있다. 해외 여행에서 마주친 난민문제와 인권과의 만남으로 성립되는 소중한 의식이 정겨운 강물처럼 출렁이고 있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들 작품은 판에 박은 듯한 안내문 같은 정보 전달, 소개 형태의 기행 형식에서 탈피하고 있어 예술적 감흥을 준다. 통섭의 도움으로 텍스트에 인간적 감촉, 개인적 체취가 강하게 풍겨 기행수필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꼬불꼬불 산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이 높은 산허리에 집들이 모여 만든 작은 마을이다. 깊고 높은 산 속 오지에 새로이 객잔을 짓는 모습이 보인다. 늘어나는 관광객으로 이들의 생활 모습이 변하는 중인가 보다. 그간 산골 오지로 그들만의 문화와 풍습이 간직되어왔으리라. 밀려드는 외지인들로 인해 전통과 풍습이 빛이 바래지나 않을지 조심스럽다. 몇 년 전 방영한 ‘차마고도’ 다큐멘터리 덕분에 한국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식당 내부는 온통 한국 관광객과 산악 팀원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자신들의 감동을 이런 흔적으로 나타내었나 보다. 벽에 이름을 남기게 한 것은 한국 관광객들을 맞는 그들 나름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객잔의 벽면에 이런 글귀가 있다. ‘천하제일측’ 천하에서 제일가는 화장실, 아름다운 비경 속에서 정화되지 않을 것이 무엇이랴. 몸속 깊숙이 쌓인 물질문명 세상의 ‘인’을 설산의 바람으로 날려버리리라.
- <차마고도> 중에서 -
떠남의 형태는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이 합일된다면, 그녀는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학은 그 자체로서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적 진실과 그 형상화를 통해 문학적 가치를 확인받는 것이다. 그녀의 언어는 물 흐르듯이 고요하게 흐르다가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큰 소리를 내다가 이 시대 삶의 자유분방하고 격렬한 몸짓으로 변화한다. '몇 년 전 방영한 ‘차마고도’ 다큐멘터리 덕분에 한국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식당 내부는 온통 한국 관광객과 산악 팀원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자신들의 감동을 이런 흔적으로 나타내었나 보다.'라고 하는 ‘한국 관광객’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 속에서, 우리는 떠남의 미학을 한국의 세계화를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성실성과 조우할 수 있다. 수필이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의 발견을 통해 그렇지 않은 것을 추방하는 일이다. 당연히 고양해야 될 가치인데도 사라져 갈 때, 그것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도록 가치화하는 것이다. 평자는 ‘몸속 깊숙이 쌓인 물질문명 세상의 ‘인’을 설산의 바람으로 날려버리리라.‘ 고 한 이 작품의 역행적 가치에 주목한다. 작가는 역사 앞에, 자신의 소신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진실 하나의 힘만 믿고 세상에 대해 부끄럽지 않다면 그것으로 자랑스러울 수 있다. 작가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여기서 찾고 있다.
하루의 시작은 일기예보를 보는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지금은 무색하다. 모두가 미세 먼지와 초미세먼지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 살 수는 없으리라. 삶의 가장 단순한 진리는 ‘숨을 쉬려면 공기가 필요하다.’ 돈 주고 물을 사 먹을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는가. 공기도 자판기에서 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도 공급지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이처럼 공기도 어디에서 공수해 오느냐에 따라 가격을 차등 지급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자연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누구에게나 공짜다. 하늘의 해도 공짜, 숨 쉬는 공기도 공짜다. 공평한 대자연에게 가격을 매기고, 불공평하게 만드는 자 누구일까. 만년설 덮인 맑디맑은 공기가 이렇게 부러울 줄이야. 지구는 난개발로 몸살을 앓는다. 자연의 이상 신호를 무시한 결과는 ‘지구의 온난화’로 돌아왔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무엇으로 채우랴. 삶이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거늘.
- <가깝고도 먼 나라> 중에서
삶이 지니고 있는 허위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 수필의 소명이기도 하다. 여행을 하면서 삶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면,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는 떠남을 통해 존재의 근원적 깊이에 더 가까이 가 닿으려는 보편적 욕망을 풍요롭게 보여주고 있다. ‘공평한 대자연에게 가격을 매기고, 불공평하게 만드는 자 누구일까.’라는 물음을 통해 그녀는 자본주의 저급한 가치를 정조준한다. 작가는 치열한 문학적 탐구 정신으로 제재를 주제화하는 과정을 잘 파악해서 그것을 다시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거친다. 감동은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에서 나온다. ‘경험’을 넘어선 ‘체험’은 생경함과 신선함을 주면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수필미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수필가의 유일한 도구가 언어이듯이, 박경애는의 유일한 표현 도구 역시 언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누구나 숙명적인 표현의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작가는 특유의 언어감각으로 이를 잘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주제의식의 상상화로 빛나는 결말부 마지막 문장, “ 지구는 난개발로 몸살을 앓는다. 자연의 이상 신호를 무시한 결과는 ‘지구의 온난화’로 돌아왔다.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무엇으로 채우랴. 삶이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거늘.”라는 진술은 박경애의 문학적 저력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 수필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작가의 지성적 성찰을 잘 드러내어 보여준다고 하겠다.
아들은 내 삶의 보호자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집안의 기둥이자 보호자임을 자청한다. 엄마를 대신하여 아들은 집안의 소소한 잡일을 도맡아 한다. 등교 후, 정신없는 엄마를 대신하여 가스 불 확인하러 몇 번이나 집에 갔을까.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의 기분을 살피는데 신경을 얼마나 썼을까. 지치고 힘든 엄마의 피로 회복제를 자청한 적이 그 얼마인가. 어린 나이인데도 이모들과 말이 통하는 늠름한 애어른이라 한다. 내 삶에 빠져 지치고 고단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들이 예민한 사춘기를 어찌 겪었는지 모른다. 아들이라고 어찌 힘들고 외롭지 않았을까. 싫은 내색하지 않고 잘 자라준 아들이 고마울 뿐이다. 남태평양 낯선 곳에서 운전하는 아들의 뒷모습이 듬직하고 믿음직하다.
- <두 번째 서른> 중에서 -
박경애는 남태평양 낯선 곳에서 운전하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듬직하고 믿음직하다고 생각한다.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의 기분을 살피는 데 신경을 얼마나 썼을까. 지치고 힘든 엄마의 피로 회복제를 자청한 적이 그 얼마인가.’ 하며 아들을 자신을 위해 헌신한 정도를 가감없이 적어나가고 있다. 아들은 자신의 축소판이다. 모든 진실이 그 안에 있고, 모든 인간적인 체온이 그 안에 있고, 신비한 힘 또한 그 안에 있다. 아들은 작가의 삶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아들은 내 삶의 보호자’라고 하는 데서 대지를 촉촉이 적셔주는 모자지간의 끈끈한 유대가 감동을 준다. 모자는 아버지의 부재로 시작해서 항상 함께 늘 공존해 온 것이다. 아들은 그녀에게 등대인 것이다. 두 번째로 맞이하는 서른이란 시간 속으로 있는 수필 속에서 아들은 중대한 화두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화합과 끌어안음의 차원으로 수필의 소재 속으로 끌어들인다. 인연이라는 측면에서 사람을 이야기하자면 작가는 제일 먼저 자연스럽게 아들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들은 생활에 지친 자신에게 위안과 안식을 주는 힘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가 자신의 든든한 보호자를 아들로 설정한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하겠다.
오늘 산 삶이 끝이라 여긴다면 이루지 못한 꿈이 많으면 애통하여 어찌 하루를 마감할까. 한때의 어리석음으로, 한때의 부질없음으로 쏟아부은 인생 수업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잊지 못 하리라. 일확천금이란 있을 수 없음을 손가락 마디에 자리 잡고 솟아오르는 굳은살을 보고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 굳어가는 살점에 지난날의 뼈아픈 기억을 켜켜이 쌓아 올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삶에는 왕도도 없고 정도도 없다고 한다. 오직 하루를 살아서 쌓여지는 것일 뿐이다. 동생의 손가락 위에 얼마만큼의 더 굳고 딱딱한 굳은살이 얹혀지면 허리 펴고, 가슴 펴고 살아질까. 동생은 오랜 시간 동안 구부정하게 굽어가는 꿈을 보며 살아왔으리라. 그리운 학창 시절에 가지 못한 수학여행 대신 동생네 가족 여행을 꿈꾸어 본다. 굳은살 앉은 손에 가족 여행의 티켓이라도 안겨지면 굳어가던 손과 마음이 녹아내리려나.
- <굳은 살> 중에서-
작가의 내부에는 언제나 굳은 살의 동생이 자리잡고 있다. 동생에 대한 걱정과 사랑은 ‘동생의 손가락 위에 얼마만큼의 더 굳고 딱딱한 굳은살이 얹혀지면 허리 펴고, 가슴 펴고 살아질까.’에 드러나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동생은 혈연 관계만은 아니다. 아픈 손가락이다. 이 수필은 동기간의 우애가 얼마나 큰 가치인지 말해준다. 수필 <굳은 살>은 ‘내게 가장 아리는 손은 큰 남동생이다. 형제들 모임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동생 손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한다. 두 손바닥은 두툼하고 딱딱하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 못 보던 혹이 하나 얹혀 있다. 동전 크기로 높이까지 가진 작은 산이다. 작은 산이 그 자리에 자리하기까지 느꼈을 고통의 크기는 얼마만 했을까.’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의 시선은 남동생의 검지에 있는 혹에 얹혀있다. 타자를 제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형제에 대한 애정이 깊은 작가가 '아픈 손’을 그 대상의 하나로 설정하고 쓴 글이다. 작가는 한 형제라도 못 살면 다른 형제들도 행복하지 않다는 교훈을 들려준다. 여기에는 작가의 남동생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움의 텃밭은 언제나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의 시간에 대한 반추를 통해 애틋한 애정, 원시의 순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박경애에게 '남동생'은 바로 그러한 존재다. 배추장사 행상을 시작으로 대기업 영업사원, 동업의 부도, 사채, 빚 등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이런 동생의 삶을 ‘아린 손’ ‘굳은 살’로 잘 형상화하였다. 수필은 삶의 경험이 녹아 있어야 향기가 나는 글이라고 하였다. 연민이 녹아 있는 글이면 더욱 수필다운 체취가 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잘 살기를 원한다. 문명은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남동생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은 보장받지 못했다. 작가의 움직이는 행위가 단순히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면 수필은 맛을 잃기 쉽다. 박경애의 사유 과정이 수필이 되는 것은 아픈 손의 발견을 통해 동기간의 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한한 애정을 지닌 사람이다. 작가는 ‘동생네 가족 여행을 꿈꾸어 본다.’ 굳은 살 앉은 손에 여행티킷이라도 안겨지면 동생네 가정에도 봄이 올 것으로 여기며 행복을 만끽한다. 이러한 행복이 여행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파악하는 것이 감상 포인트다. 이 수필은 담에서 열림으로, 맺힘에서 풀림으로 나아가는 출구이며, 떠남과 벗어남의 자유를 가르쳐주는 역동성의 공간을 지향한다.
VI. 닫으며
가정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우주를 살피는 것은 곧 자아를 찾는 작업이다. 수필은 또한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의 눈으로 응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자아 성찰은 바로 자기 내면의 자아를 바르게 세우는 작업인 것이다. 작가가 ‘떠남’을 꿈꾸는 것은 자아를 찾기 위함이다. 그래서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자유에 대한 가치와 주체에 대한 성찰의 의미를 고양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수필집은 뿌리내릴 수 없는 예술가의 자유정신을 문학적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고행 속에서 삶의 진가를 확인케 하는 그 역설적인 활기가 작품 전체를 휘감고 있는 고요하고 평온한 정적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떠남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작가의 떠남에 박수를 보낸다. 그녀는 붓다의 얼굴을 닮기 위해, 좁혀지는 가슴을 넓히려 부단히 일상을 탈출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도 맞는 사람을 만나 자연에 동화되어 차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 이것이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든 인간은 떠나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는가. 떠남을 통해 우주와 소통하면 구도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오늘도 떠남을 기대한다.
자연에 대한 꿈과 동경은 바로 중심 바깥으로 던져진 존재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낸 삶의 변증인 것이다. 그녀의 수필이 주는 맛은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길러 올려진 언어가 진정성의 분위기를 뛴다는 데 있다. 일상을 현실이라는 인식에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이상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작가의 용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행위는 대상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인식행위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의 인식 대상과 행위가 바로 사회 현실이고 역사 현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위에 다뤄진 작품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의 관점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경애 수필이 생태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이제 수필은 그 위상을 높일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인식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빠져나간 신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태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삼고, 생태문학의 카테고리 속에서 수필가의 관심이 생명을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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