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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것을 결단하시고 예루살렘에 공식입성을 하던 날,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던 날입니다. 종려주일은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에 만왕의 왕이신 성자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입성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이셨습니다. 세상의 많은 지도자들은 대접받기를 원하고 항상 높은 자리에 앉기를 기대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환대하고 칭찬하면 우쭐하며 권위의식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런 환대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루살렘의 입성의 본 의미는 즐거움과 행복, 능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보다 정말 이 세상을 위한 참된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과연 종려주일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종려주일을 통해 우리가 어떤 신앙의 마음가짐을 가져야할 지 깨닫게 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려주일, 예루살렘의 입성에서 보아야할 것 첫째는 주님의 선택에 순종함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기 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도 타지않은 새끼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시고 묶여 있는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능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가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라는 사실까지 말씀해주시고 그 나귀를 가져올 때 그냥 주님이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면 즉시 보내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려주일에 예수님은 마을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기 나귀가 매여 있다는 것을 아셨으며, 어떻게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는 ‘두 제자들의 말 한마디로 작은 짐승도 아닌 평범한 사람에게는 재산 목록 첫 번째인 나귀를 순순히 내어 줄 수 있었을까?’ 하는 부분에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 지 정확히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인간과 나귀의 절대적인 순종이라는 부분으로 이 부분을 적용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아신 선택과 순종의 결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나귀는 정말 예비되어진 나귀였고 택하여진 나귀였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나귀 새끼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어린 양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시고 택하여 놓으신 나귀 새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새끼 나귀와 새끼 나귀의 주인 모두 예수님께서 쓰신다는 말에 즉시 순종하는 모습을 보게 되지만 이것은 미리 예정된 계획이었고 하나님의 시나리오라는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세상에 많은 나귀가 있지만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쓰임받은 나귀는 이 나귀 한 마리입니다. 세상에 많은 나귀의 주인이 있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에 나귀를 드린 사람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귀의 주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순종하니 이런 귀한 자리를 얻게 된 것입니다.
나귀의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 라는 이야기를 제자로부터 들었습니다. 여기서 ‘주’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퀴리오스’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모든 주권과 소유권과 생명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쓰겠다”가 아닌 “주가 쓰시겠다.” 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온 천지만물에 대한 분명한 소유권이 있는 능력의 주인임을 말씀하시면서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오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는 일에 우리가 사용되기를 기대하며 우리의 모든 것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고 소유권이 우리 주님에게 있음을 믿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아무리 형식적으로 잘 준비된 예배와 신앙적인 생활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찾이 않고 살아가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인 "황소의 머리"는 자전거의 좌석과 손잡이로 만든 것입니다.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것일지라도 피카소의 손에 붙잡히니까 엄청난 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돌을 가지고 미켈란젤로는 걸작 『모세』를 만들었습니다. 평범한 돌이나 폐품도 예술가의 손에 들어가면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의 손에 붙잡혀 쓰임받느냐?’ 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나타납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우리 하나님도 우리를 존귀하게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기만 하면 걸작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혀 쓰임받는다면 그보다 더 신나고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쓰임받는 것이야 말로 가장 가치있고 기쁜 일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미국 시카고의 어느 골목길을 전전긍긍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클리브랜드와 그의 친구 조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골목길 끝에 있는 교회앞을 지나다가 교회 입구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눈이 멈추었습니다. 포스터에는 큰 글씨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이 포스터를 보고는 발이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교회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는 클리브랜드는 자기 친구를 전도하여 교회를 다니자고 했지만 그의 친구 조지는 “너는 바보 얼간이야 뭐 미쳤다고 젊은 나이에 교회를 다니냐?”라고 비웃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교회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클리브랜드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마침내 미합중국의 2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다시 24대 대통령으로 재선하기도 하였습니다. 클리브랜드가 대통령이 되자 각 신문은 당연히 새 대통령의 사진을 담아 각지에 배포되었습니다. 이 신문은 시골 구석 구석까지 가게 되었고 마침내 미국 교도소에 조그만한 감방에도 전해 졌습니다. 교도소 초라한 감방 2층 끝방에는 얼굴에 흉칙한 칼자국이 있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간수가 이 죄수에게 신문을 건내 주자, 이 신문을 받아든 사형수는 두 눈이 휘둥그래 졌습니다. 그리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내가 그때에 올바른 선택을 하였더라면!” 그 사형수는 클리브랜드를 조롱하던 조지였습니다. 조지의 후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바로 기뻐하고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 내가 쓰임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지 오늘 본문의 나귀를 보시면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섬기는 나귀같은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기뻐하시는 종려주일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려주일, 예루살렘의 입성에서 보아야할 것 둘째는 주님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함입니다.
마가복음 11장 7절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예수님께서는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자 제자들은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고 오면서 예수님께서 앉으시기 편하게 자신들의 겉옷으로 안장을 대신하고 예수님께서 나귀위에 앉으시도록 했습니다. 제자들의 겉옷과 나귀의 고통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도구로 제자들의 겉옷과 나귀의 노력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출판사에서 편집장보조 직위를 가지고 근무하는 한 신실한 그리스도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편집장이 써 놓은 원고를 읽으면서 주로 문법이나 구둣점에 잘못이 있는지 점검하는 일을 했습니다. 편집장은 능력이 부족한 여성이었는데, 편집장보조인 자기보다 유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편집업무까지 편집장보조에게 맡기며 그녀의 일은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비록 신망은 편집장이 얻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대부분의 일을 편집장보조가 다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편집장은 발행인과 다투다가 자기가 제시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발행인은 “그래요, 떠나도 좋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당신의 일의 대부분은 편집장보조가 일을 다 해왔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편집장은 물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발행인이 대답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달 전부터 당신이 그녀를 몹시 신뢰하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그 때부터 다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 짧은 이야기는 편집장보조였던 여인이 결국은 편집장이 된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녀는 자기 업무를 잘 해냈으면서도 인정받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자인 발행인이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도 왜 대접받지 못하는 것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녀는 골로새서 3장 23,24절도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래 전에 그녀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을 함께 보실까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우리가 순수하게 정직하게 살아가면서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예화처럼 편집장 보조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맡겨진 일을 해내었더니 사람들이 알아봐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시선을 열어 그녀의 열심적인 노력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교회를 거쳐서 이 고주리에 들어오는 동안 의도적으로 열심히 하는 척 한 적은 없고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맡은 일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까지 10여년이 넘는 시골개척교회기간동안 아직도 그 때의 저를 생각하며 후원의 끈을 놓지 않고 후원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또한 얼마 전 시찰내의 큰 교회 몇 교회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를 돕고자 힘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가 형편이 어떤 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원의 주된 목적은 상가교회에 월세 임대료 지원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따로 우리 교회의 형편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원을 위해 모이신 목사님들께서 우리 교회가 왜 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상가교회 임대료지원이라고 말씀하셔서 형편은 어렵지만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다고 했더니 우리 고주리교회 박기영목사님 지원안하면 누굴 지원하냐며 저를 제일 먼저 거론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적극적으로 지원받아보려고 말씀드리지 않고 오히려 나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를 먼저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저를 밝히 드러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봐주시고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고 자발적인 섬김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보답하시고 상급을 허락하십니다. 생색내는 일이나 가식적인 섬김이 아닌 순수한 섬김과 헌신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종려주일, 예루살렘의 입성에서 보아야할 것 마지막 셋째는 순종하고 헌신함도 내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1장 9,10절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본문에서 나귀가 쓰임받고 제자들의 겉옷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에 사용되었지만 결국 영광은 우리 주님이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귀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위에 어떻게 앉으셨는 지 보면서 겉옷이 누구의 겉옷인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종려주일의 주인공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영광받으려고 살아가지만 결국 나 자신이 드러나는 삶은 실패한 인생이고 우리 주님께서 드러나는 삶은 영광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시민들은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때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원래 시편 118편 25절에 나오는 히브리어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구하옵나니,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인 라틴어로도 똑같은 뜻의 단어는 종종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틴어 “리베라 메”가 히브리어 “호산나”라는 뜻입니다. ‘호산나’의 히브리어 원래 발음은 ‘호쉬아 나’인데 이것을 신약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로 옮기면서 신약성경에는 ‘호산나’로 기록되었고 지금까지 모두 ‘호산나’가 모든 언어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백성들이 외친 단어 ‘호산나’입니다. ‘호쉬아 나’에서 ‘나’는 ‘지금’이라는 뜻이고 ‘‘호쉬아’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호쉬아’라는 단어에서 ‘호세아’ ‘여호수아’라는 단어가 파생되었습니다. 어원이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사람들이 ‘예수’라고 읽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 여호수아, 호세아는 모두 구원이라는 뜻이고 ‘호쉬아’는 동사의 간구형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호쉬아 나’ 와 헬라어 ‘호산나’는 “지금 구원해주소서.”라는 뜻이지요. 라틴어에서는 똑같은 뜻의 단어로 ‘리베라 메’라는 단어를 씁니다. 우리가 오늘 종려주일을 지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와 아름다움 그리고 승리를 상징합니다. 고난주간에 들어가는 첫 날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사람들은 구원의 왕, 승리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흔들며 외쳤던 구원과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 우리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종려주일 수많은 유대인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환영하며 구원해달라고 외쳤던 ‘호산나’는 민족해방,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천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구원과 축복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과 며칠 후 예루살렘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구원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이 다른 것을 느끼며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구원이 궁극적으로 필요한 지 느끼며 예수님에게 호산나를 외치십니까? 우리는 정말 참된 구원과 축복을 바라보며 우리 예수님께 호산나 부르짖으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심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종려나무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자녀의 자리를 지키는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호산나를 외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친히 대신 죽어주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맞이하며 그 희생에 눈물을 흘리며 맞이해야하는 것이 종려주일입니다. 마냥 기쁨의 날이 아닌 고난가운데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의 희생에 함께 동참하기를 다짐하는 날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나귀를 중심으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부르심에 순종하고 고난과 고통을 감뇌하며 예수님을 섬기고 결국 그 헌신과 섬김이 나에게 영광이 되지 못한다하더라도 예수님만 드러나고 예수님만 높아지신다면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가치있는 것임을 고백하는 종려주일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다음 주 부활주일 예수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며 성찬예식을 진행할 것입니다. 성찬식은 교회마다 종려주일에 해야할 지 부활주일에 해야할 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들은 성만찬을 진행했던 날짜와 비슷하게 의미를 잡으려고 성 목요일, 성 금요일이라고 정하고 고난주간 주중에 거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도 종려주일에 거행하든지 부활주일에 거행하든지 하며 몇 번 바꿔 예식을 거행하였지만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할 사실은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생각하며 그 죽어주심에 감격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을 우리 몸에도 새기며 우리도 복음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