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알레(Monreale) 대성당
‘북방인’이라는 뜻의 노르만은 게르만 대이동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지방에 머물러 있던 북 게르만 인이다. 어업을 생업으로 하여 항해술에 뛰어나 9세기부터 본격적인 정복으로 프랑스에 진출한 바이킹, 노르만은 11세기 초에 지중해로 진출하여 남이탈리아에 나폴리 왕국을 건설했고, 또한 이슬람을 쫓아내고 시칠리아 섬을 점령했으며, 1130년 로제르 2세는 두 지방을 합쳐서 양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여 그의 후손이 절손될 때까지 120여 년간 지배했다.
팔레르모에서 남서쪽 8km의 카푸토산 중턱인 해발 300m의 작은 마을에 서있는 몬레알레 대성당은 외관이 투박하고 단조로운 비잔틴 성당의 특징을 살렸으나, 외벽에도 큰 문양의 모자이크를 끼어 넣어 이색적인 인상을 준다. 아랍의 지배를 종결시킨 굴리엘모(루제로 2세의 손자)가 가톨릭이 공식적인 종교로 제정하기를 기원하며 지은 대성당의 모자이크는 팔라티나 예배당의 모자이크 양식이 좀 더 발전 확대된 형태로 두 곳의 모자이크는 마치 쌍둥이 같으나, 당연히 이곳의 모자이크가 방대하다.
교황 루치오 3세가 1182년 이 성당을 대주교관구 대성당으로 지위를 승격시켜 대주교가 기거하는 곳이 되어 1200년에 대주교 저택과 수도원을 추가로 건설하여 중세의 가장 아름다운 성당의 하나로 칭송받는다. ‘생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중 하나’로 종교적 관용이 창조한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성당의 평범해 보이는 청동 문을 들어서니, 목재와 대리석의 조화가 돋보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내부는 여러 양식이 뒤섞인 각가지 조각과 금빛 색깔의 상감 세공으로 덮여 있으며, 창세기와 신약의 여러 가지 장면을 조각한 부조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내부에는 창세기의 이야기가 모자이크로, 외부 회랑에는 신약성경의 그것들이 황금색 모자이크로 만들어져 감탄을 부른다. 가로 101미터, 세로 39미터의 라틴십자가 형태의 성당 내부를 감싸고 있는 21,000제곱미터에 달하는 천지 창조와 그리스도의 삶을 묘사한 거대한 모자이크 군(群)은 1182년에 완성되었다.
아치를 이은 아케이드인 회랑은 스물여섯 쌍의 기둥이 사방에서 받치고 있으며, 각각의 기둥이 서로 다른 디자인과 화려하게 장식된 코린토식 기둥머리를 자랑한다. 기둥이 너무 아름다워 손으로 쓰다듬어 주면 답을 할 것 같은 몬레알레 대성당은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개의 위대한 지중해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낸, 하나밖에 없는 미와 열정의 예술과 건축을 보여주고 있다.
벽은 바로크 양식이며, 정면은 고딕 양식으로 외관을 갖추는데 200년이 걸렸다 하며, 내부는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왕족들의 무덤이 있다. 세계 최고라는 비잔틴 모자이크는 글로 표현되지 않아 사진으로 대신한다. 성당 이웃의 베네데티니 수도원의 12세기에 만들어진 코린트양식 기둥의 섬세한 모자이크도 꼭 봐야하는 것이니, Seeing is believing. 직접 가서 감상하시기를!
타오르미나(Taormina)
카타니아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타오르미나는 멀리서 보면 높은 산중에 5층의 아파트가 서 있는 것 같아 궁금증과 신비감을 느끼게 만든다. 터널을 지나고 구불구불한 포장길을 올라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번호를 계기판에 올리고 주차할 시간만큼의 동전을 넣었다. 비수기라 마을이 북적대지는 않지만 우선 미리 알아둔 식당부터 찾아간다. 이탈리아 음식은 종류가 다양하여 이름만 보고 시키면 엉뚱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종업원에게 잘 물어보고 시킨다. 가격과 맛은 별개이나 대충 음료 빼고 12-15유로 정도면 체면 구기지 않고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메시나와 카타니아 사이의 타우로 산기슭의 솟아오른 해발 200여m의 가파른 구릉 위에 자리한 타오르미나의 옛 이름은 타우로 산에서 유래한 타우로메니움이었다. BC 8세기 시칠리아를 점령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외부의 침략에 대비해 이오니아 해안선의 절벽위에 세운 이 도시는 이오니아 해를 조망하며,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BC 392년 경에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오스 1세에 점령당한 이 도시는 BC 2세기 초에 로마의 침범을 받아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서 식민지가 되었지만,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차츰 쇠퇴하였고, 9세기에 아랍인들에게 점령되어 이름도 무이지야로 바꿨으나, 1078년에 노르만족에게 점령되면서 다시 번영을 누렸다.
비잔틴제국이 시칠리아를 지배할 때는 수도였다는데, 지금은 영화페스티발과 오페라페스티벌이 개최되며, 뤽 베송 감독의 프랑스영화, 미치도록 바다를 사랑한 두 남자의 이야기인, ‘그랑 블루’ (Le Grand Bleu)의 촬영지로 유럽인들에서는 휴양지로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도시 어디서나 해발 3,323m의 거대한 에트나 화산이 보이는 ‘작은 천국’으로 불리는 휴양지로, 마차로 해변과 썰물 때에 바닷길이 열리는 벨라섬의 자갈해변은 해수욕객과 스쿠바 다이버를 부른다.
에트나산을 배경으로 이오니아해 사이의 도시 정상 부근에 세워진 그리스 극장은 기원전 3세기에 지어진 반원형으로, 수용인원이 5,000명이 넘고 객석과 무대 뒤의 높은 돌담장의 일부가 무너져버린 것을 빼면 보존상태도 거의 완벽해 고대 원형극장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며, 여름에는 음악회나 발레 공연 등이 열린다. 시내에서 5분 거리인, 석산을 쪼아 만든 극장은 규모도 규모지만 남서쪽으로는 에트나 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바라다보이고 북쪽 바다 건너편에는 칼라브리아 산맥이 보이는 조망으로도 유명하다.
극장 위를 거닐면 앞뒤로 그림 같은 해변이 보이고, 산 중턱과 정상에 세워진 주택들의 아름다움에 눈이 황홀할 만큼 매혹적이다. 시멘트를 비벼 넣은 적 벽돌로 두껍게 만든 초입의 입구와 무대 일부는 수리 중이며 상부의 계단 좌석은 목재로 덮었다. 이곳에는 또한 1892년의 발굴 때 발견된 로마 시대의 오데온 극장과 저수지의 유적도 있다.
대성당, 코르바자 궁전은 중세에 지은 건축물로, 코르바자 궁전은 아랍의 코르바자 가문이 10세기경 건축한 건축물로, 한 때 의회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산 니콜라스 대성당으로도 불리는 타오르미나 성당은 1400년경 건축된 중세풍 성당으로, 외관이 요새 같아 ‘Fortress Cathedral’이라고 불린다. 대성당 앞의 광장의 켄타우로스 바로크식 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낸다.
석류 주스를 마시며 여행 중에 쇼핑거리를 어슬렁대며 둘러보는 재미로 움베르토 거리로 간다. 주로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와 골목에는 레스토랑들이 손님을 부른다. 음식은 맛있으나 가격은 비쌌다. 시칠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념품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다리가 셋인 메두사, 트리나 크리아와 ‘무어인의 머리’다. 3족 메두사의 세 발 은 삼각형 모양의 시칠리아 섬을 의미하며 풍요를 상징한다.
무어인의 머리는 끔직한 전설이 숨어 있다. 부유한 무어인(북 아프리카의 아랍인과 원주민인 베르베르 족의 혼혈)이 끈질긴 구혼으로 시칠리아 여인과 연인 사이가 되었는데, 어느 날 무어인이 유부남이란 사실을 알자 분노한 여인은 무어인의 머리를 잘라 화병으로 만들었단다. 이 전설을 듣고 보니 시칠리아 여인이 다시 보인다. 여행을 마치고 생각해보니 타오르미나가 가장 인상에 남고 여름에 방을 구할 수 있으면 세상을 잊어버리고 시원한 아침 안개를 벗 삼아 한 일주일 책이나 보면서 지내고 싶은 유적지다.
타오르미나에서 카타니아로 귀환하는 도중에 방향을 바꿔 에트나 화산으로 향했다. 억수같이 퍼붓는 굵은 빗줄기에 화산으로 오르는 언덕길은 물살이 세다. 50여분 달려 오르니 비는 산 아래에서만 내리는지 그쳤지만 추위가 매섭다. 활화산 정상으로 가다보면 도로가에는 용암 덩어리와 시커멓게 그을린 산을 지난다. 도착시간도 늦었지만 이런 악천후에 화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는 당연히 멈춰 있어 유명한 에트나 화산 와인만 두 병 사서 하산했다. 내려오면서 보니까 마치 그저께 화산재가 알려 수목을 다 태운 듯, 산은 나무 한 포기 없이 붉고 검은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