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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 백사장 횟집에서 놀던 때가 1964년 2월 경이였다. 고교 졸업후 고향에 잠시 들렸다가 上京(상경)하는 날, 장목 부두에서 영복호를 타고 초등학교 동창 김석렬군과 동생 김수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따지자면 김군과는 査頓之間(사돈지간)이다. 집안 고모님이 김석렬군의 형수가 되었으니... 저녁 12시(십이)열차를 타고 서울을 갈 생각이였는데, 김석렬군이 갑짜기 택시를 타고 해운대로 차를 몰았다.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가 보면 안다고 했다. 오늘 놀다가 떠나라는 것이다. 어리던 수자가 벌써 환갑도 지나고 진갑도 지나 치매 5기로 양노원에 입원 했다는 소식이 왔다. 한치의 앞을 모르고 사는 인생...요즘 노랫말 처럼 언제 갈지 모르는 인생 웃으면 살아가자는 말이 실감이 난다. 해운대에서 만나 회포를 풀던 그 친구들 모두들 소천하고 혼자 남아 이 글을 쓴다.
해운대에 오니, 언제 연락을 했는지, 利水島(이수도)에 살던 김광한군, 율천(밤개) 구연자가 와 있었다. 김군이 깜짝 Show를 연출했다. 그냥 조촐하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送別會(송별회)"란다. 그때 그날 밤은 통금이 있어 통금전까지 놀았다. 그때 우리는 광어회와 멍게에 소주를 주문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가면서 노래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유행하던 젓가락 장단에, 흘러간 노래 ~ 줄줄이 쉬지않고, 이어졌다. 모두들 名唱(명창)들로 쉴새없이, 누군가가 선창하면, 따라 불렀다. 목이 터지라고.....懷抱(회포)를 풀었다.
해운대에서 운영하던 횟집의 경비는 약 3,000원 정도로 기억된다. 1960년 高 3때의 [수학여행의 경비]가 서울에서 경주에 4박 5일 동안에 지불했던 금액이 8,000원이였으니, 적은 돈이 아니였다. 그리고 거제에서 서울까지 가는 경비는 '애용하던 키타'를 팔아서 갔다.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지나간 추억이다. 巨濟島 장목 부두에서, 여객선 영복호를 타고, 파도와 싸우면서 4~5시간을 뱃멀미 하면서, 부산 남포동(자갈치)에 도착하면, 간단한 정심을 먹어야 했고, 저녁 서울행 야간열차를 타면 밤새도록 찻칸에서, 수잠 자면서,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아침에야 서울역에 도착했던, 가난했던 시절이였다.
필자가 서라벌 고등학교를 졸업 하던, 해인 1961년 5월 16일에는 명동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잤다. 그날 새벽에 요란스러운 총소리에 잠에 깨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完全軍裝(완전군장)을 갖춘 군인들이 골목 코너에서 防禦(방어) 자세로 총을 쏘며, 골목을 이리 저리 돌아 다녔다. 순간 전쟁이 일어났다는 강박관념에 영문을 모르고 얼른 문을 닫고, 있었으나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전쟁이 아닌 군사 쿠테타라는 뉴스를 듣곤, 잠자리에 다시 들수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자행한 쿠데타. 이로 인해 제2공화국이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지고, 약 30년간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유명한 군사 철권통치가 열린다. 1961년 당시 군인들이 명동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큰 소리쳐, 젊은 혈기에 빠에서 육군 소위와 다툰적도 있었는데, 그 파워는 대단했다. 까불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아 다투었던 추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자존심이 상해 싸웠다. 객지에서 깡이 없으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필자의 人生觀이였다.
1964년경의 해운대 바닷가의 사진이다.
이날 栗川(율천) 출신 구연자가 [이별의 노래]를 불러 박수 갈채를 받아, 再唱으로, 당시에는 듣지도 못한,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에, 이미자 노래로 인기가 있어 1965년 4월에 지구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낸 [울어라 열풍아]를 구슬프게 불러, 노래에 대한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친구들의 박수 갈채도 받았다. 필자는 [해운대 엘레지élégie]와 [추억의 소야곡]을, 석렬군이 18번 [이별의 부산 정거장]을, 김광한군은 [굳세어라 금순아]를 제마다 노래 부르고 놀다 보니, 통금 시간이 임박하여 택시를 불러 탓다. 그때의 구연자 모습
구 연자가 산다는 신중달 국회의원댁 서대신동으로, 데리러 준다고 갔다가, 집으로 안가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할수없이 우리 모두 여관으로 들어가 한방에서 밤을 세우고, 上京한 추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때 손벽치고 불렀던 추억의 노래다. 우리 시대에 유행하던 추억의 노래다.
외갓집 이야기
http://blog.daum.net/bangyang/376
http://blog.daum.net/bangyang/2700
★16.慶州金氏族譜 (8)
https://www.youtube.com/watch?v=TpFlLLKT8Kk&t=36s
이별의 노래를 불렀던 : 구연자
https://www.youtube.com/watch?v=u9oDlW5We7Y
울어라 열풍아 노래를 불렀던 :구연자
https://www.youtube.com/watch?v=3i1fbJmGFxg
해운대 엘레지 노래를 불렀던 : 양방수
https://www.youtube.com/watch?v=Rq-en8QlBlc
추억의 소야곡 노래를 불렀던 : 양방수
https://www.youtube.com/watch?v=55Wt0HUD6MU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를 불렀던 : 김석렬
https://www.youtube.com/watch?v=Cb5_tWTuU6I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를 불렀던 : 김광한
이별의 노래를 불렀던 : 구연자 양
울어라 열풍아 노래를 불렀던 :구연자 양
해운대 엘레지 노래를 불렀던 : 양방수
해운대 엘레지 노래를 불렀던 : 양방수 필자
추억의 소야곡 노래를 불렀던 : 양방수 필자
이별의 부산 정거장 노래를 불렀던 : 김석렬 군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를 불렀던 : 김광한 군
1962년 박 영식 감독과 함께 !
1962년 중앙대학교 졸업식장에서
당시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시던, 김수용(金洙容, 1929년 9월 23일.생) 선생님을 박영식 감독으로 부터 소개 받아 "목놓아 울어 봐도"라는 대역(代役)을 소개 받아, "脚本(각본)"을 받아 꿈 많던 시절이였다. 불행이도 이 영화는 불발되고 말았다.
김수용 감독님은 1963년 김승호와 황정순 주연의 굴비,1965년에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을 비롯하여, 그후로도 많은 작품을 발표 했었다. 아역 배우로 '저 하늘에도 슬픔이" 주연을 맡았던 김용연군은 1971년 용산구 후암동에서 옆방에서 같이 살던 추억이 떠오른다. 촬영 갔다가 오는 날엔 아저씨 "담배"하고 양담배를 주어 "禁煙(금연)"할려고 하는 나에게는 유혹이였다. 신혼의 꿈을 안고 살던때여서, 부인이 싫어했던 추억이 떠 오른다. 아역을 맡았던 이야기는, 엄마의 손을 잡고 따라가, 누나가 연극 실습장에서 잘못하면, 용연군이 "누나" 그것도 못해? 하고 詰責(힐책)을 하길래, 감독이 그러면 너가 한번 해봐! 그래서 인정을 받아 주연을 맡았다고 했다. 그후 아역 배우로 乘勝長驅(승승장구)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1965년 영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59년 Miss Korea 오현주 여사와 원로 배우 복혜숙 여사님과 양방수!
1963년 김포 촬영장에서 1959년도 Miss Korea 오현주 女史와
오현주 여사와 복혜숙 여사와 筆者(필자).
여운계 여사와 筆者(필자), 오현주 여사, 복 혜숙 여사님.
嚴冬雪寒 冬將軍(엄동설한 동장군)의 시샘으로 꽁꽁 얼어붙은 손발을 녹이기 위해 모두들 장국밥을 먹고 몸을 녹이던 정겹던 배우들~
당시 綺羅星(기라성)같은 助演(조연) 女俳優 (여배우)들이다.
유난이 춥고 춥던 겨울, 촬영을 마치고 staff 陣(진)들과 장국밥으로 허기
를 채우고...
아역스타 박종화군과 함께 !
박종화군은 1952년생으로 1960년대에 아역스타로 활동하면서 필자의 사무실로 야구팬이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왔었다.
도봉동 촬영장에서 아역 사물놀이 꼬마 스타와 함께 !
도봉동 史劇(사극) 촬영장에서 애들아 ~ 활은 이렇게 쏘는 가야 ~
해운대 아파트 앞에서 타국으로 宣敎를 떠나는 수녀님들의 방문을 받고 기념 촬영
http://blog.daum.net/bangyang/1976
2008년 1월 부터 3월 까지 경남 삼랑진 오순절 마을을 창설한 오수영(히지노) 신부와 3개월간 전국 聖靈 徹夜 祈禱에 參與하면서 당시에 없던 해운대 고층 아파트에서 그때의 추억을 吟味하면서 지내고 왔다.
1960년경 그 때 같이 갔던 장목 선후배들이 한동안 대통령 별장으로 갈수 없는 [猪島]를 유호에서 배를 타고 들어 가서 놀았던 친구들의 그때의 모습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bangyang/376에 있다. 기념사진 촬영중에도 노래를 계속 부르는 여자애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후 결혼을 하고 뿔뿔히 흩혀졌다가 이제 노년이 되어 이들 친구들이 아직까지 부산 김정매네 집에서 가끔 만나지만 주역을 맡아 대중을 리드하던 김 석렬군이 떠나, 그때의 추억과 아쉬움을 못잊어 아직까지 모임을 갖는다는 자리에서 얼마전 김정매와 김금자와 전화 통화를 했었다.
사진참조 ~ 뒷줄 왼쪽으로 부터-양 방수-김인길-이원태(장목 담배집 손자) - 김계자(서편 사진관 딸) 다음이 故 김석렬군 - 다음 - 다음이 - 김 명재군이 키타를 치고, 앞줄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 장목 국민학교 후배 여자들인데 앞줄에 앉은 여자중에 우측에서 네번째가 장목 김정매 동생이 입 벌리고 모래를 부르고 있다. 맨 앞에 누워 있는 故 서정언군,
율천 구 대영 형님이 보낸 소식 정리 해 보면
해운대해수욕장(海雲臺海水浴場, Haeundae Beach)은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1동과 중1동에 걸쳐서 위치한 해수욕장이다. 모래사장의 총면적은 58,400㎡, 길이는 1.5 km, 폭은 30m ~ 50m 이다.
이 곳에는 300여개의 편의·숙박시설이 있고, 해수욕장의 가까운 부산조선비치호텔, 동백섬 누리마루(APEC하우스) 등이 있다. 개장기간은 6월초부터 9월말까지로, 피서객 인파가 2007년 1천 279만명이고, 2008년 1천 45만명으로 감소했다.
2008년 8월 2일 오전 10시부터 7시간 동안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비치된 파라솔의 수가 1시간 동안 가장 많은 파라솔이 백사장에 펼쳐진 시점인 오후 4시 총 7937개의 파라솔이 설치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3개월 후 '기네스 세계 레코드' 본사는 파라솔이 세계 공통의 문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네스 기록 등재불가를 통보했다.
1월에는 추위를 수영으로 건강한 겨울을 보낸다는 뜻으로 하는 북극곰 수영대회가 열린다. 6월에는 해운대 모래축제가 열린다. 7~8월에는 부산국제요트매치컵대회가 열린다. 8월에는 또한 부산바다축제가 열린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는 이안류가 자주 발생하여 매년 입욕 통제가 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이안류는 해저 언덕 등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역파도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해변으로 밀려든 바닷물이 깊이 패인 지형을 통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급물살을 만들어 해수욕을 즐기는 피서객이 여기에 휩쓸리면 깊은 바다로 끌려가기 때문에 위험하다. 2012년에는 11차례의 이안류가 발생해 418명이 휩쓸렸다가 구조되었으며 2013년에는 무려 13차례나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이안류가 발생하여 546명이 이안류에 휩쓸렸다가 구조된 바가 있다. 2014년에는 7월 24일에 이안류가 발생하여 입욕이 통제되기도 하였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이안류가 자주 발생하는 원인은 기상, 지형, 해상의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해운대해수욕장은 인근 송정해수욕장과 광안리해수욕장과 달리 해안선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인근 두 해수욕장은 해안선이 남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해운대해수욕장에는 지속적으로 남풍, 남서풍의 바람이 불게 되며 1.5 m 이상의 파도가 해안선의 직각으로 밀려들면서 이안류가 발생하게 된다. 또한 해운대해수욕장의 지속적인 백사장 모래 유실도 해저에 골짜기를 만들어 이안류 발생 횟수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기상청에서는 매년 해운대 해수욕장의 이안류 발생 예측정보를 전 해역에 걸쳐 망루별, 시간별 이안류의 발생 가능성 예측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안류 예측정보는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후 6시까지 3시간 간격으로 5단계(매우안전, 안전, 주의, 위험, 매우위험)로 매일 제공된다. 또한 지자체에서는 이안류 발생의 다른 원인으로 판단되고 있는 백사장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해 제방을 설치하는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
파도치는 해운대 바닷가
지금도 변함없이 파도치는 해운대 바닷가는 그대로인데.
人傑(인걸)도 물과같아 가고 아니오는메라는 옛 詩人(시인)의 말이 떠 오른다.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파 30세손 양 방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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