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꽃주머니 /서영숙
창틈의 미세한 바람에도 몸을 움츠린다. “올여름은 와이래 춥노” 하시며 지병인 마른기침을 콜록인다.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는 엄마의 치매 증세 때문에 마음에 잔잔한 어둠이 깔린다.
침대와 휠체어를 대여하고 미끄럼 방지용 물품도 구입했다.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침대는 아주 편하다고 하시며 만족해하신다. 돈 들여서 뭐 하러 샀느냐 하면서도 내심 흡족한 표정이다. 아흔여덟이 되도록 아파서 입원해 본 적이 없으니 조절이 가능한 환자용 침대가 신기할 만도 하다. 구비 쳐 흘러온 여울이 말라가듯 한 세대가 서서히 사그라져 간다.
2년 전이었다. 치매가 점점 심해지고 거동조차 불편해 몇 번 넘어져 다리도 다치고 몸에 생채기도 자주 났다. 시골집에서 더 이상 모시기가 어려워 요양원에 모시는 것으로 형제들이 어렵게 논의를 했다. 그날 밤 나는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다. 마음 깊은 곳 화석처럼 박혀있는 엄마의 평생 삶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우리 자식들을 어떤 마음으로 지켜왔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기에 엄마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 하나 딸인 내게 엄마의 헌신은 눈물로만 말할 수 있다. 며칠 애태우다 남편과 가족의 이해를 구하고 딸네 집에 놀러 가자고 둘러대어 모셔왔다. 새 환경에 적응 못 할까 봐 이해하고 배려해 준 가족들이 고마웠다. 가까운 곳에 천사 주간보호 센터가 있어 낮에는 그곳에서 편히 모실 수가 있었다.
되돌아보니 나와 엄마는 참 좋은 모녀 사이였다. 성격도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 함께 잠자리에 들 기회가 있을 때면 밤늦도록 도란거리다가 내일을 위해서 “그만 자자”하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엄마의 얘기는 한 편의 동화처럼 언제나 재미있었다. 몇 번이고 들어도 지혜롭게 대처하며 살아온 엄마가 존경스러웠다. 7남매의 맏이였던 엄마는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잡혀갈까 봐 열여섯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엄마의 기억은 우리 집에 오던 그 시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너거 집에 온 지 한 달 됐나?”하시며 사위 눈치가 보인다고 빨리 집에 데려다 달라신다. 다 잊어도 남에게 신세 지는 일은 잊기 싫었나 보다. 아들은 괜찮은데 딸에겐 신세 지는 것으로 생각하니 섭섭한 생각마저 든다. 갈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가지 못하는 곳에 대한 집착엔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성실과 자존심 하나로 거친 세월을 견뎌낸 엄마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본인의 뜻과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증세의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면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오래된 입병이 악화되어 구강 내과 진료를 받았다. 입천장에 하얗게 굳어있는 딱딱하고 편편한 나무토막처럼 덮여 있는 것이 밤잠을 못 자게 한다. 약도 소용없는 듯 혀와 입천장이 붙어버린 것 같다. 아프지는 않은데 찝찝하다며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때를 밀 듯 긁어낸다. 이 뿌리만 서너 개 남은 치아로 겨우 삼킨다. 모든 음식은 잘게 썰어 씹지 않아도 될 만큼 조리하고, 식사량도 줄기만 해 적은 양이지만 충분한 칼로리의 영양식으로 장만한다. 달콤한 것이 들어가면 입이 편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단 것 중에 사탕이 제일 좋다고 하셔서 처음엔 몇 봉지씩 사 왔는데, 감당이 안 되어 박스로 구입했다. 어떤 때는 사탕 한 봉지를 다 까서 감식초에 담가놓았다. 엄마만의 처방이며 만병통치약인 양 바르고 먹는데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다.
하루가 다르게 인지능력이 악화 되어 간다. 의지가 강하고 부지런해 칠십 중반까지 시장에 나다니며 장사하시던 분이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오늘은 아침부터 센터에 갈 생각은 않고 방바닥에 옷을 다 흩어놓았다. “오늘 집에 갈란다 니 옷 다 골라가거라”라고 한다. 내 옷은 내 방에 있고 여기 있는 것은 다 엄마 옷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때뿐이다. 이러기를 매일 반복하니 내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귀가 들리지 않아 크게 말하려니 조금만 해도 목이 아프다. 한 번은 물티슈를 한 장씩 빼서 온 방에 펴 놓았다. 젖어서 말린다고 한다. 용도를 일러주며 몇 번을 하지 말라 해도 소용없으니 감추는 수밖에 없었다. 또 어떤 날 아침 베지밀 한 박스를 다 뜯어 빨대를 꽂아 놓았다. “몰라 나는 절대로 안 그랬다.”라며 딱 잡아떼신다. 소용없는 줄 알지만 또 타이른다. “엄마! 자꾸 이러면 먹고 자고 하는데 보낸다.”라고 소리를 지른다. 요양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거기 가면 나도 못 보고 손녀도 못 보고 아무도 없는데 혼자 있어야 한다.” 겁박도 해 본다. 하루는 돈을 달라고 해서 삼만 원을 드렸다. 잠시 후에 돈이 없다고 또 달라고 해서 방금 드렸다고 했더니 절대 받은 일이 없다고 잡아떼신다. 소리를 지르며 언제 줬냐고? 왜 사람을 도둑 취급하느냐고 화를 낸다. 순간적으로 내가 착각을 했는지 누가 치매인지 모를 지경이다. 병 때문인 줄 알면서도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다.
치매는 가족이 돌보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사랑으로 돌보며 한 인간으로서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동안 못다 한 효도를 하며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흔들린다. 어느 것이 정답일까? “부모를 모시는데 핑계는 있을 수 없다.” 한 친구의 충고가 흔들리는 나의 마음에 일침을 가한다. 본인의 의사를 말하며 판단할 힘을 찾아드리고 싶다.
말로써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나의 무지함이 엄마를 더 힘들게 했다. 오늘도 늘 하던 얘기를 또 하신다. “젊을 때 동네 할마시가 북을 둥둥 치며 상여 나가는 걸 보고 죽는 사람 복도 많다. 우짜마 죽노? 하길래 이 할마시야 사는 기 좋지 죽는 사람이 뭐가 복이 많노 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인자 그 말이 이해가 된다.”라며 요즘 자꾸 그 할머니의 말씀을 하신다. 백 번도 더 들었다 그만해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이제는 함께 흥을 돋우며 맞장구를 쳤더니 좋아하신다. 손에 일을 놓아본 적이 없는 터라 마늘 까기, 나물 다듬기, 빨래개기 등을 하도록 소일거리를 만들어 준다. 불안하고 초조해하던 것도 많이 좋아지셨다. 당신의 성격처럼 고운 치매다.
엄마에겐 보물처럼 몸에 차고 다니는 돈주머니가 있다. 꽃 그림이 그려진 주머니다. 어느 날 센터에 그 주머니를 두고 오셨단다. 내일 가면 있다고 해도 밤새 못 주무시고 뒤척이며 걱정한다. 돈이 많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돈주머니에 대한 애착이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침대 밑에 숨겨 두었다. 확인을 시켜드리니 그제서야 잠이 들었다. 다 잊어버려도 헤지고 낡은 주머니만은 잊지 않고 늘 가슴에 차고 다닌다. 엄마 몸을 떠나지 않은 물건이었다. 어릴 때 엄마 몰래 주머니를 뒤져 십 원짜리 몇 개로 과자를 사 먹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들켜서 두 동생과 혼난 기억이 있다. “절대 남에게 욕먹을 짓 하지 말고 어디서든지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언덕 무너져 길 된다.”라는 말씀은 아직도 가슴에 울린다.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었다. 그 시절 어르신들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더 유별했다.
이제 엄마는 우리 집에서 제일 어린 아기가 되었고, 그다음은 여섯 살 일곱 살 손녀 순이다. 왕 할머니 무섭고 냄새나서 싫다고 하던 손녀들도 이제는 익숙해져 도와준다. 오늘도 집에 가서 할 일이 많다며 보따리를 싼다. “감도 따야 되고 감식초도 만들어야 되고 밭도 매야 한단다. 기억에 도움이 될까 싶어 차를 태워 고향을 다녀왔다. 생전 처음 와 본 곳이란다. 그렇다. 잊어버리면 어떠랴 그 생각 속에서 행복하면 된다.
구십 도로 굽어진 등허리를 쭉 펴고 곤히 잠드신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 삼만원이 꼬깃꼬깃 들어있는 꽃주머니가 옷자락 속에 삐죽이 보인다. 찡해서 눈물이 난다. 평생 이주머니 하나로 우리 가족을 보담아 오셨다. 긴 세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주머니를 열었다 닫았다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