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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뉴스 추천 성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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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 기념
<연중 제21주일 기도문>
입당송
시편 86(85),1-3 참조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주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니,
저희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주님의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야고보 사도는 믿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고쳐 주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말씀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우신다.
곧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참된 목표는 세상 끝 날에 성자께서 다시 오실 때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복음).
제 1 독서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2,14-24.26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19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20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23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24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2(111),1-2.3-4.5-6(◎ 1ㄴ)
◎ 행복하여라, 주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
○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
○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
복음환호송
요한 15,15ㄷㄹ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
◎ 알렐루야.
복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4ㅡ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예물 기도
주님,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단 한 번의 제사로 저희를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의 교회에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시편 104(103),13-15 참조
주님, 땅이 당신 내신 열매로 가득하오니, 당신은 땅에서 난 양식을 먹이시고,
술로 사람 마음을 흥겹게 하시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찬례로 구원의 업적을 완성하시니,
저희가 이 성사에서 주님의 자비로 힘을 얻어 치유를 받고,
저희가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 다음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수난의 길을 막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곧 그분께서 하시려는 일이 옳다고 믿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을 넘어서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가 잘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계산을 초월합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모습도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고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상대방에게 거울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면서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라.” 하는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열에 참여하여
오늘의 내 삶의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죽음의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오해나 박해를 감당할 모험이나 투신 없이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 세상에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삶은 고독한 것입니다.
축일:2월18일 복자 프라 안젤리코(피에솔레의 요한) Bl. Fra Angelico Beato Angelico o Fra Angelico (detto Beato Giovanni da Fiesole) Vicchio di Mugello, Firenze, 1387 - Roma, 18 febbraio 1455 Patronato:Artisti (Papa Giovanni Paolo II, 1984) Domenicano
복자 프라 안젤리꼬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화가이자 사제였다. 그의 속명(俗名)은 구이도(Guido) 혹은 구이돌리노(Guidolino)라고도 하였으며, 그의 수도(修道)명은 천사들의 요한이었다. 또 일생을 ’경건한 그리스도 신앙의 표현에 헌신하였다’ 고 하여 베아토 프라 안젤리꼬(축복 받은 천사 수도사)로도 불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것들은 그의 유명한 그림과는 달리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플로렌시아(피렌체) 근교의 비키오(비쿄)에서 태어난 안젤리꼬는, 20세 때 베네데토 (그는 성 마르꼬 수도원의 성가책에 정교한 그림을 그렸는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만 그가 피렌체의 정치적 폭동으로 살해당해 미완성으로 남았다.)와 함께 피에솔레의 도미니꼬 수도회에 입회했으나 얼마 후, 종문 분규(宗門 紛糾)로 코르토나 수도원으로 옮겨 10년동안 코르토나, 토리뇨, 그리고 피에솔레 등지에서 지낸 다음, 1436년 피렌체의 성 마르꼬 수도원으로 옮겨 활동을 하였다. 당시 유럽 사회는, 교회의 대분열과 흑사병 등으로 혼란했는데, 프라 안젤리꼬는 교회와 수도원을 개혁하는데 주도했던 도미니코회의 복자 요한 도미니치, 베드로 카푸치, 리파 프라타의 라우레시오,피렌체의 성 안토니오(그는 후에 피렌체의 주교가 되었을 때, 성 마르꼬 수도원의 프레스코화(안젤리꼬)와 성가책의 그림(베네데토)을 위탁했는데 그들의 그림을 보고 ’천국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경탄했다.)와 함께 살았다. 프라 안젤리꼬의 그림은 종교적인 내면성(특히 중세의 종교성이 그의 필력의 근원에 있다.)을 표현하는데 그지없이 정교했으며 세밀화를 방불케 하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양체 표현(量體 表現)과 원근법을 이용해 그린,음악을 연주하는 아름다운 천사에 둘러싸인 유명한 <아마상인(亞麻商人)의 성모상, 1433년>이다. 또 <그리스도 강생, 1435년>에서는 자연의 직접적인 관조에서 비롯된 듯한 풍경 묘사도 선보이고 있다. Paintings for the Armadio degli Argenti -ANGELICO, Fra (detail: lower left side)1450. Tempera on wood. Museo di San Marco, Florence 지금 국립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는 성 마르꼬 수도원의 일련의 벽화에서는, 프레스코 화법을 채택, 그 제약과 특성을 충분히 살리면서 주제의 본질을 파악한 단순화와 입체적인 구도에 조형적인 인물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그림들엔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대제단의 성모상을 비롯하여 그의 뛰어난 작품의 일부가 있다. 그 곳에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이, 곧 무너졌던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의 폭풍에 물들지 않고 남아 있다. 그의 제단 장식들을 보면, 사물의 핵심을 추려내고 불필요한 세부를 생략하는 사본 색채가의 뚜렷한 터치가 들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엔 흐트러진 것이 전혀 없는데 그것은 분명 사본 채색으로 단련된 손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신학으로 단련된 정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당시 화가들은 성모님을 그리기 위하여 평판이 나쁘더라도 얼굴이 아름다우면 모델로 이용했던 관습 아닌 관습들이 흔했다. 그러나 프라 안젤리꼬가 그렸던 성모의 모습에서는 그가 신학자의 분명한 입장에서 그림이나 조각, 설교, 시 또는 건축 같은 어느 분야에서도 자신의 사고와 방법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주의를 돌리는 일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1445년, 교황(에우제니오 4세)의 소명으로 로마로 가, 바티칸궁 니콜라오 5세 성당에서 그린 여러 벽화는 로마 고대 건축의 장대함을 보여주는 스케일이 큰 작품이다. 이 밖에 <수태 교회>, <최후의 심판>, <동방 박사들의 경배> <천사들의 합창, 1447년 오르비에트 대성당> <성 스테파노와 성 라우렌시오의 생애, 1447-1450년 바티칸의 니콜라오 소성당>등의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프라 안젤리꼬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이나 단테의 시와 같은 문학과 함께 보편적인 하나의 진리를 그만의 미술로서 표현하였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의 예술성에 대한 역사의 공경성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는 성품이 본래 겸손하고 너그러워 사람들로부터 칭송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득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기도를 드린 후가 아니면 결코 붓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프라 안젤리꼬의 생활 신조는 ’그리스도를 그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의 형제들이 목소리나 펜으로 했던 웅변적인 설교를, 그는 붓으로서 최고의 본보기를 드러낸 것이다. 오늘날까지 그가 남긴 교회의 미술적 가치는, 다른 어떤 설교도 들리지 않는 곳에까지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미니코회에서는 일찍부터 그를 복자로서 존경으로 대했으며, 1904년 수도회 총회에서는, 그에 대해 성인의 공인을 교황청에 요청했었다. 그는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그의 축일은 2월 18일이다. (도미니코수도회홈에서) The Annunciation-ANGELICO, Fra 1440-41. Fresco, 190 x 164 cm. Convento di San Marco, Florence 베아토 안젤리코는 15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화가로 성모영보를 즐겨 그렸는데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려진 ’성모영보’ 이다. 이 곳은 현재 안젤리코 미술관으로 유명하지만 한때는 피렌체에서 가장 중요한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도원이었다. 1436년 코시모 데메디치는 미켈로초라는 건축가를 시켜 이 곳을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개조했다. 그리고는 안젤리코를 초빙하여 1436년부터 1445년까지 수도원 전체에 벽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이 그림은 2층 복도에 그려져 수도자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 지나 갈 때마다 수도자들의 구도생활에 평화를 주고 구세주 탄생으로 인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보여 주는 묵상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림의 무대는 우아한 기둥으로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이다. 그림을 보면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 앞에 내려와서 구세주 예수 잉태를 예언하고 있다. 천주의 모친이 되실 여인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의 모습은 두 손을 가슴에 포갠 채 여인에게 예를 다하고 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 38) 라고 무릎을 꿇은 채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전형적인 동정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만 보이고 마리아의 얼굴은 한없이 청순하고 성스러워서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왼쪽에는 이 신비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한 수도자의 모습이 보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13세기 초에 살았던 성 베드로 순교자로서 성 도미니쿠스로부터 직접 사제 서품을 받고 평생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며 지낸 수도자의 모범이 된 이 성인을 이 신비에 동참시킨 것이라고 한다. 안젤리코가 그린 성모영보는 화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종교적 의미 전달에 충실하여 엄격한 신앙심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 안젤리코는 하느님 말씀 앞에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수도자들의 자세와 분심 없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지풍 신부) Deposition (Pala di Santa Trinita)-ANGELICO, Fra 1437-40. Tempera on wood, 176 x 185 cm. Museo di San Marco, Florence
축일: 2월18일 San Simeone di Gerusalemme Vescovo e martire
마태 13,55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마르6,3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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